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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 칼럼] 하나님의 사람, 발 닦는 은혜

▲ 제자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 사진: 유튜브채널 ScripturePlus 캡처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

예수님께서는 아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돌아갈 때도 아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하십니다. 자기 백성들은 이 땅에 있습니다. 예수님 없을 때에도 예수님 있을 때처럼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세족식이라는 것입니다.

때를 알기를 축복합니다. 화초지시(花草知時), 꽃도 풀도 때를 압니다. 꽃을 피울 때와 질 때를 압니다. 예수님의 그 때를 알려면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사람이 있다는 것은 반대로 예수님의 사람이 아닌 사람도 있다는 뜻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언제나 ‘나는 예수님의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요 13:2)

마귀의 사람도 있고 예수님의 사람도 있는데,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분별점은 발을 닦아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요 13:3~4)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요 13:18)

‘모두’가 하나님의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모두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각성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발을 닦아준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인지 마귀의 사람인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세족을 섬김의 차원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람인지 구분하는 구분점이 사라집니다. 고만고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세족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모이면 고만고만한 알력이 생깁니다. 고약합니다. 뭔가 서로 경쟁합니다. 그런 의식이 있는 한 주님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있었고, 주님께 가르침을 받았고,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하나님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낮다, 이것은 천한 것이라는 세상의 가치를 갖고 있는 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곳으로 가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실행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굿간으로 오신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낮은 곳으로 오셨다고 말하는 세상 가치는 깨져야 합니다. 마굿간이 낮은 곳이면 헤롯왕궁이 높은 곳입니까? 높고 낮다는 우리의 그 가치가 깨져야 합니다. ‘이것은 높고, 저것은 낮은 거야, 그래서 우리는 저 높은 곳을 지향해야 해.’ 하는 마음이 있다면 결코 세족하며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속에 다른 가치가 있으니 발을 닦아주며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치가 무엇인지 일깨워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예수님과 함께 먼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우리는 보냄을 받았습니다. 우리를 보내신 분은 우리의 주인이고 선생님입니다.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내신 분보다 결코 크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보내신 분의 뜻보다 더 높게 생각하는 가치가 따로 있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에게 보냄 받은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부르심을 이야기할 때 구분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구체적으로 어떤 현장으로 부름 받았다고 여겼을 때가 있었습니다. 현장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몸이 상해도 헌신하고 봉사했습니다. 현장에 충성했는데 나중에 보니 남는 것이 없었습니다. 저를 그곳에 보내신 분이 현장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우리는 먼저, 주님에게로 부르심 받았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주님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봄으로 주님의 겸손과 온유가 함께 와서, 함께 멍에를 멘 우리에게 주님의 생각과 마음이 깃들게 됩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님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이 우리를 보내십니다. 파송하십니다. 함께 갑니다. 그때부터는 우리를 보내신 주님을 의식하게 됩니다.

제가 너무 많이 지적했습니다. 너무 많이 가르쳤습니다. 화가 나는 이유가 상처 때문인 줄 알았습니다. 아니었습니다. 삶의 현장으로 부름 받았다는 의식이 너무 강했고 그런 의식으로 현장을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속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지를 구분하는 분별점이 어디에 있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향한 시선이 끝없이 머무는 인생!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원합니다!

베드로, 얼마나 많이 속습니까? 다른 복음서를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배척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나게 고백했습니다. 세금 문제가 나왔을 때 물고기 입에 반 세겔이 있을 것이라는 경험도 했습니다. 수많은 기적을 직접 봤습니다. 그런 베드로도 여지없이 넘어집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이렇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믿음을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이 진짜인 줄 알고, 그것이 전부인 줄 압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주님이 진짜인 줄 압니다. 그러나 귀신도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고 경배하고 떱니다. 그러나 귀신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믿음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알아보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가치가 변할 때, 예수님께서 보내신 그곳, 그 일, 그 뜻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고 하니까 또 스스로 힘을 내고 뛰어다니며 헌신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문제에 대해 헌신하고 감당하는 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구, 저 인간 만난 것이 내 십자가니까 내가 지고 가야지, 그게 내 십자가지.” 하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자기 십자가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부족해서 남겨놓은 것이 있으니 우리가 그것을 채우면 완전해진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 뜻을 실행하려면 우리 속을 비워야 합니다. 우리를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의지로 안 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생각을 부으시고 우리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행하시게 하는 것이 남은 고난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했을 때만 주님의 뜻이 온전하게 보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열심을 부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얼굴이 더 험악해집니다. 속이 진짜 행복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행복이 없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내 안에 주님이 사신다고 하십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열심을 부립니다. 그러나 험악해집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 2:16)

원어 성경에는 그렇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풀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원어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사람은 토라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실함을 통하여 의롭게 되는 것이다! 번역된 성경은 내가 믿는 믿음으로! 원어의 뉘앙스는 예수님의 믿음을 통하여!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믿음이 있기 때문에 택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표시가 나는 것은 예수님의 믿음 때문입니다. 그 표시가 세족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수님을 알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는 것만큼 교만해질 확률이 높아집니다. 가르치면 되는 줄 압니다. 저는 그냥 보여주고 싶을 뿐입니다. 사랑하라고!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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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저서로 <주께서 피워내시는대로>(토브원형출판사, 2020), <예, 주님 제가 순종의 전문가입니다>(토브원형출판사, 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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