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윤·이경란 목사 부부 (열린문교회)
291호 사람풍경
경북 칠곡 산골짜기의 굽이진 길을 따라 오르막에 올라서니 갑자기 예상치 못한 마을 하나가 눈앞에 펼쳐졌다. 일찍부터 집 앞에 나와 취재진을 기다리고 있던 김창윤 목사가 환한 얼굴로 취재진을 맞았다. “주님이 마음을 다잡아주시고, 말씀 따라가는 삶을 살게 해주셨어요. 앞으로도 다른 건 없어요. 말씀만 따라가야죠.” 한가로운 산골집 식탁에 차려진 소박한 목련차 향기 사이로 김 목사가 들려주는 순종의 이야기가 마음을 더욱 향기롭게 했다.
– 이곳에 어떻게 교회를 개척하게 되셨어요?
김창윤(이하 김): “이전 사역지였던 병원 원목으로 섬기고 있을 때, 주님이 교회를 개척하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때가 코로나 기간이어서 병원에서는 저희를 말리셨어요. 그러나 주님이 역대상 22장 19절 말씀까지 주시면서 확실히 말씀하셔서 병원을 그만두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병원에서 함께 근무하셨던 권사님이 자신의 집에서 개척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셨어요. 당시 그 집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어요.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받고 이곳으로 와서 돌아보니 음성 한센병자들이 모여있는 마을이더군요. 이미 마을에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께 양해를 구하고 우리도 하나님께서 교회로 보내셨으니 집에서 예배를 드리겠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대신 동네에서 전도하지 않고 교인들은 우리 교회로 모셔 오지 않겠다고 약속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주님이 이곳에 불러주신 것에 감사해서 예배드리고 영혼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로 부르심을 받고도 성도를 모을 수 없으니 답답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함께 신앙 훈련을 받으며 교제하던 한 집사님의 연락을 받았어요. 코로나 때 교회가 외부인을 잘 받지 않아 예배드릴 교회를 찾을 수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영상으로 함께 예배를 드리자고 제안했어요. 선뜻 좋다고 하시더군요. 그때부터 함께 예배하게 됐고, 코로나 이후에는 동탄으로 매주 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지금은 동탄과 가까운 곳으로 옮기려고 기도하는 중이긴 합니다.”
주님 인도로 한걸음씩
– 결과적으로 경북에 교회를 개척하고 경기도에서 예배를 드리신 거군요. 목회를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김: “1995년에 결혼을 하고 그 해에 신학을 할 마음을 주셨어요. 열왕기서에 보면 나아만 장군이 나옵니다. 어린 종의 말을 듣고 나병을 고치게 된 그 내용의 설교를 듣고 어머니가 제게 어릴 때부터 목회를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장로가 돼서 돈 많이 벌어 교회를 섬길 거라며 그런 얘기는 하지 말라고 했죠. 그런데 나아만 장군은 그 종의 말을 듣고 축복을 받았는데, 나도 축복을 받으려면 어머니가 하신 말씀을 들어야 되는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신학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문제는 아내였어요. 목회자 자녀로 자란 아내는 절대 목회자와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고, 제게도 목회하지 않을 것을 다짐 받았는데, 제가 신학교에 가겠다고 하니 엄청 반대했어요. 그럼에도 주님의 은혜로 나중에는 허락을 해주더군요. 그런데 막상 신학을 공부하면서 하나님 앞에 순종한다는 게 너무 어렵다는 걸 알게 됐어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었어요. 성경을 보면 내 것을 희생해야 하는데 저는 그게 안 되는 거예요. 내 길은 목회가 아닌가 보다. 목회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하고 신대원 3학기를 남겨놓고 자퇴를 했어요.”
– 어렵게 신학을 결정하셨는데, 우여곡절이 많았군요. 이후엔 어떻게 되셨어요?
김: “아내가 난리가 났죠. 이제 와서 못하겠다고 하면 어떡하냐. 그러다 갑자기 선교를 가자고 하더군요.”
– 갑자기 선교를요? 사모님은 어떻게 그런 제안을 하게 되셨나요?
이경란(이하 이): “제게는 항상 선교라는 꿈이 있었어요. 지나가는 비행기만 봐도 ‘하나님, 저희는 언제 나가게 해주실 거예요?’라고 묻곤 했는데, 이제 신학도 그만두겠다고 하니 그러면 선교를 가자고 했어요. 남편은 안 간다고 하더군요. 막연히 선교를 가고 싶은 마음만 가지고 있다가, 제가 당시 운영하고 있던 영어 과외 원어민 선생님의 필리핀 친구를 만나게 됐어요. 그 친구에게 ‘나는 선교가 꿈인데 너무 가고 싶다.’고 했더니 자기가 교수로 있는 학교로 오라고 하더군요.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남편에게 가자고 했어요. 그런데 남편이 안 간다는 거예요. 저도 뜻을 굽힐 수가 없어서 아무것도 없이 아이들만 데리고 무작정 필리핀으로 갔어요.”
– 그럼 목사님은 어떻게 되신 거에요?
김: “아내는 영어를 배우면서 선교에 대한 폭을 늘리길 원했어요. 그러나 저는 필리핀은 낙후된 나라여서 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나 장인 어른이 아내의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강권적으로 제게 목사 안수를 받고 파송을 받아서 선교를 나가라고 하셨어요. 저는 거의 타의로 집사람을 따라 필리핀으로 갔어요. 집도 팔고 돈을 좀 만들어서 필리핀에 도착해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고 남은 돈으로 선교 사역을 하다보니까 돈이 다 떨어진 거예요. ‘그러면 이제부터 하나님이 하시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재정의 어려움은 여전했어요. 그리고 제 마음은 점점 힘들어졌어요. 2년 정도 버티고 나서 아내에게 이야기했죠. 힘들다고, 돌아가자고요. 그러나 아내는 돌아가지 않겠다더군요. 게다가 아내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서 사역을 열심히 했어요. 저는 영어도 못하고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어요. ‘이제는 끝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저 혼자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선교 사역에 실패를 경험하고
– 사모님은 그때 어떤 심정이셨어요?
이: “필리핀에서는 공동으로 선교 사역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말을 잘 못해도 어느 정도 통할 수 있었어요. 저는 앞만 보고 달려 나가는데 목사님은 점점 뒤로 빠지는 느낌이었어요. 부부 사이에 점점 거리가 생기고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가게 됐어요. 남편도 끝이라는 마음으로 한국에 들어간 거죠. 저는 이후 5년 동안 필리핀에 남아 사역을 이어갔어요.”
– 목사님은 한국에 혼자 오셔서 어떻게 지내셨어요?
김: “한국에 왔을 때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였어요. 하나님도 없고, 이제 예배 안 드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친구에게 연락이 왔어요. 자기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에서 함께 하자고요. 차마 ‘안돼.’라고 말을 못하고, 갈 테니까 사역도 시키지 말고 주일 하루만 가서 예배드리겠다고 했어요. 그러는 동안 제가 트럭 일을 하게 됐어요. 평일에는 음료회사에서 일하고 주일에는 교회 사역을 했어요. 친구와 함께 지내는 5년 동안 교제하면서 처음에는 ‘하나님은 없어.’라고 하던 제 믿음이 친구를 통해 점점 회복됐어요. 제가 당시에 신앙적으로도, 여러 가지로 아무것도 되는 게 없으니까 마음에 깊은 자책을 하고 있었는데, 마음이 힘드니까 병이 생기더군요. 하루는 열이 아주 많이 났어요. 돌봐줄 사람도 없으니까 며칠 동안 집에서 끙끙 앓았어요. 그때 친구가 저와 연락이 안되니까 찾아왔는데, 거의 죽을 지경인 저를 본 거예요. 친구가 저를 며칠 돌봐주고 병원에도 갈 수 있게 되면서 회복이 됐어요. 그 무렵 친구는 ‘하나님 앞에서 지금 벌 받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러자 하나님의 일을 바로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럴 즈음 아내가 5년 만에 한국으로 들어오게 됐어요.”
– 그러면 선교 사역이 마쳐진 건가요?
김: “아니요. 다른 지역으로 새로운 선교를 준비하기 위해 잠깐 한국으로 들어온 거예요. 그때는 아내도 저도 서로 보는 것도 싫어할 정도로 사이가 어려웠어요. 그러나 아내는 한국에서 달리 갈 곳이 없으니 제가 있는 곳으로 찾아와서 지내고 있었어요. 하나님은 아내에게 가정을 회복하고 저와 연합하라는 마음을 주셨다고 해요. 저도 아내와 끝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은 아니잖아요?”
– 그 어려운 시간을 사모님은 어떻게 지내셨어요?
이: “선교가 너무 하고 싶은 마음에 2013년 10월에 필리핀에서 나오게 됐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갑자기 가정의 회복에 대해 말씀하시는 거예요. ‘하나님, 이 세상 모든 사람과 연합해도 이 사람은 싫습니다.’라고 했지만, 주님이 말씀하셨으니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그렇게 남편이 지내고 있는 경기 수원으로 갔어요. 마침 다시복음앞에 집회 소식을 듣고 참석하게 됐죠. 이어 복음학교까지 가게 되면서 주님이 복음으로 저를 만나주셨어요. 남편과 제가 복음 앞에서 와장창 깨졌어요. ‘우리가 진짜 지옥 뚜껑을 밟고 있었구나.’라는 사실을 발견했죠. 내가 얼마나 악독한 존재였는지 주님이 알게 하시고 나니까 큰 회개가 일어났고, 너무 기뻤어요. 하나님은 2차 선교를 준비하는 저의 모든 것을 무너뜨려주시고, 가정의 머리인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어요.”
복음으로 가정의 회복을 경험하며
– 복음 앞에서 가정이 회복이 됐네요.
김: “이후 서울 송파에서 교회를 섬기고 있다가, 어느 날 기도 중에 주님이 로마서 12장 1절부터 13절 말씀을 주시면서 농사에 대한 마음을 주셨어요. ‘하나님, 왠 뜬금없는 농사요?’ 저희는 서울에서 자랐고 농사의 ‘농’자도 모르는데 막막했어요. 오직 기도할 수밖에요. 아는 지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한 전도사님이 연락을 주셨어요. 농사할 수 있는 기도원이 있다면서요. 그곳이 전북 남원 호렙산기도원이었어요.”
– 남원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나요?
김: “이곳에서 하나님은 진짜 예배가 뭔지 알게 해주셨어요. 함께 모여서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것만이 예배가 아니라, 내 삶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 어디를 가든지 주님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 예배라는 것을 배우는 시간이었어요. 감자를 심을 때 땅에 검은 비닐을 쳐요. 싹은 비닐에 구멍난 곳으로 올라오죠. 그런데 구멍이 없는 곳으로 올라온 싹들은 모두 녹아서 죽는 거예요. 그래서 비닐을 찢으면서 그 싹들을 비닐 밖으로 꺼내고 있었는데, 마치 예수님이 나를 살리시려고 자기 몸을 찢으셨다는 것이 묵상이 됐어요.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위해 예수님이 몸을 찢어서 살려주신 거구나. 이 은혜가 얼마나 큰지요. 농사를 하면서 복음을 깨닫게 되고, 그럴 때면 주님을 찬양하면서 어디서든, 어느 때든 예배를 드리게 됐어요.”
이상 291호에 게재
– 그렇게 예배의 은혜를 누리게 되셨군요. 흥미진진하네요. 다른 얘기도 많을 것 같네요.
김: “아내가 복음사관학교 훈련을 받으러 떠나고 저 혼자 농사를 지은 적이 있어요. 아내 없이 배추를 추수해야 하는데 너무 막막한 거예요. 아내는 손이 매우 빠르고 일을 잘하거든요. 처음 며칠은 어떻게 하나 고민만 했어요. 3, 4일이 지나고 ‘이러면 안되겠다. 나 혼자라도 말씀기도해야겠다.’ 생각하고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주님이 마음에 ‘얘,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두려워하지 말고 걱정하지 마.’라고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마음에 기쁨이 생기고 힘이 나더군요. 몇 달 동안을 주님이 주신 기쁨으로 살았어요. 그리고 한 가지 이야기가 생각났어요. 신앙 훈련을 받을 때 한 강사님이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께서 오지로 보내셔서 거기에서 계속 설거지만 하라고 하면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어요. 저는 당시 ‘아멘.’을 못했어요. 그런데 이곳에서 실제로 다른 사람의 설거지를 해주는 일이 생겼어요. 이웃에 사는 친구가 하루는 제게 자기 설거지를 해달라고 하는데, 제가 그때 아멘하지 못한 것이 생각나면서 흔쾌히 설거지를 해줬어요. 제가 설거지를 하게 되고, 또 농사를 통해 복음을 깨닫고, 이곳에서 주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보면서, ‘이게 주님의 일이라면 저는 어디든 갈 수 있겠습니다. 설거지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겠습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됐어요. ‘주님이 가라고 하는 곳에 어디든지 갈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게 진정한 예배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죠.”
–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든지 순종하는 것이 예배라는 말씀이시죠? 이후에 어떠한 순종의 걸음이 있었는지 궁금하네요.
이: “농사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한 적도 없는데, 주님이 갑자기 간호조무사에 대한 마음을 강하게 주셨어요. ‘이 나이에 왜 간호조무사를 따야 되나요?’ 물었지만, 강력한 부담을 주시는 바람에 일단 학원에 다니면서 자격증을 취득하게 됐어요. 2012년에 주님이 말씀을 주시면서 남원을 떠나서 새로운 길로 갈 것에 대한 마음을 주셨어요. 그때 한 분의 소개로 의성에 있는 병원 원목으로 가게 됐죠. 남편의 사역지였기 때문에 저는 일을 할 계획도 없었는데, 제가 간호조무사 자격증이 있다는 것을 아시고는 저도 병원에서 일을 해달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남편과 함께 병원 환자들을 섬기게 됐어요.”
– 갑작스럽게 딴 자격증이 이때 사용됐군요.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무엇인지 순종을 통해 보게 됐네요.
이: “그곳에서 94세 할아버지를 만나게 됐어요. 목사님이 그분에게 인사드리고 예수님을 전하는데 “뭐요? 꺼져.”라고 하셨어요. 목사님은 일보 후퇴하셨죠. 저는 그분에게 주사를 놔드려야 되니까 계속 만나면서 친해지게 됐어요. 그리고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전하게 됐어요.”
김: “병원 사역은 이 할아버지 한 분을 위해 우리를 보내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복음을 전하려고 하니까 주변에 있는 것들을 막 집어던지면서 굉장히 싫어하셨어요. 이분이 군대 생활을 하실 때 고참이 예수 믿는 사람이었는데, 자기에게 너무 많은 피해를 줬던 거예요. 그래서 예수 믿으라는 말만 해도 밥상을 엎을 정도였던 것이죠. 아내가 이분과 가까워지면서 결국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면서 하나님이 아내에게 왜 간호조무사를 따게 하셨는지 알게 됐어요. 할아버지가 퇴원하시고 매주 한 번씩 가서 예배를 드렸어요. 할아버지가 어느 날 질문을 하시더군요. “나도 천국 갈 수 있나? 천국이 좁지 않을까?” “걱정하지 마세요. 얼마든지 가실 수 있어요.” “내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알아? 나는 천국 갈만한 게 안돼.”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주님께 나오기만 하면 다 용서하세요.” 나중에는 할아버지가 정말 간절하게 기도를 하셨어요. 얼마 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 집례를 제가 하게 됐어요. 가족들에게 ‘할아버지의 영혼은 지금 하나님 나라에 가셨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고, 믿으면 천국에 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꼭 믿으세요.’ 이렇게 메시지를 전하고 장례를 마치고 났는데, 주님이 역대상 말씀을 주시면서 다음 걸음을 말씀해 주셨어요. 개척하라는 말씀이었어요. 그렇게 온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김 목사는 인터뷰 이후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인천 임학동에서 열린문교회를 개척해 섬기고 있다.
– 앞으로의 계획과 기도제목 말씀해주세요.
김: “계획은 없어요. 주님의 말씀 따라가는 게 저희의 계획이고, 주님 말씀하실 때, 정확하게 순종할 수 있는 게 기도제목이에요.” [복음기도신문]
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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