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면 그 상대를 보고 싶고 만나고 싶다. 만남을 위해 드는 대가지불이 피곤하지도 지치지도 아깝지도 않다. 사랑이라는 에너지 때문이다. 거듭난 이후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나면, 이제 사랑할 대상은 내가 아닌 주님이 된다. 나를 사랑하던 에너지가 주님을 향하게 된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말씀이 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반드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빠지고 죄를 사랑해서 멸망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 생명으로 변화를 경험하고 나면 우리는 진리 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지 않게 된다. 진리 안에서 참자유를 누리고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 이것이 우리 영혼의 본성과 맞게 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 안에 완전한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서 우리의 가치관이 바뀌게 된다. 이 가치관의 변화는 땅에 속했던 기준이 하늘의 기준으로 바뀌고, 나 중심의 관점이 예수 중심의 관점으로 바뀌고, 불의와 거짓을 좋아하던 사람이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나의 유익만을 구하던 자가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다. 내가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가 기뻐하고 슬퍼하는 일은 달라진다. 살아있는 생명의 신앙이 우리의 가치관까지 바꾸면 살아있는 믿음과 살아있는 소망과 살아있는 사랑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우리 삶을 지치지 않게 이끌어간다.
복음이 우리와 교회를 이렇게 새롭게 할 수 있다. 복음을 만나 거듭난 생명으로, 삶의 주인이 ‘나’에서 ‘주님’으로 바뀌고 나면, 그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 바뀌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신앙과 믿음을 고백하면서도 삶이 전혀 따라주지 않는 사람은 가치관이 바뀐 게 아니다. 가치관이 바뀌지 않은 채로 직분만 올라가고 신학 지식만 쌓이면 괴물 같은 교인이 된다.
C.T. 스터드의 고백처럼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가 정녕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서 죽으신 게 사실이라면 우리가 그를 위하여 드리는 어떠한 희생도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다.’ 당연한 말이다. 나 같은 자를 구원하려고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어떻게 사람의 지혜로 이해할 수 있을까? 인간의 능력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우리 인생이 뒤집어지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다.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다, 사랑하다 구원할 다른 길이 없어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었다는 말보다 감동적인 스토리가 어디 있는가?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말하는 복음이다. 그 중심에는 십자가의 그 놀라운 사랑이 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아멘. (2018년 9월) <계속> [복음기도신문]
김용의 | 순회선교사, LOG미션 대표. 전 순회선교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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