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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당신의 복음 어휘를 확장하라

Unsplash의 Sherise Van Dyk

탈 기독교 시대에 어떻게 죄와 구원을 이야기할 것인가

케빈은 1960년대에 태어났다. 작은 마을에서 자란 그는 교회 주일학교와 중고등부 모임에 다녔다. 대학 시절, 조금씩 바빠지면서 신앙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삶에서 술, 데이트, 마약이라는 금단의 열매를 실험했다. 하지만 각종 쾌락은 그의 영혼 깊은 곳까지 만족을 주지 못했다. 더 문제가 된 건, 케빈이 자신이 잘못된 일을 하고 있다는 죄책감을 느꼈다는 사실이다.

어느 날 캠퍼스에서 케빈은 낯선 사람에게서 전도지를 받았다. 그 사람은 “율법”과 “죄” 같은 단어를 사용해서 케빈에게 전도했다. 당신은 지금 하나님께 반항하고 하나님의 통치 밖에서 살고 있다고, 당장에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고 강권했다.

그의 말이 케빈의 마음을 찔렀다. 케빈은 탕자 이야기(눅 15:11-32)를 기억했다. 그는 당장 회개하고, 기독교적 양육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을 주님이자 구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 지금부터 케빈의 이야기를 그의 동료인 카일리의 이야기와 한번 비교해 보자. 2000년대에 태어난 카일리는 스마트폰과 글로벌 공급망으로 연결된 세상에 푹 빠져서 살았다. 그녀는 기후 변화, 경찰 폭력, 성적 학대에 대한 이야기를 수시로 듣는다. 그렇다 보니 인종 차별, 빈곤, 환경과 같은 사회적 문제에 열정적이다.

카일리와 케빈이 믿은 기독교 사이에서 공통점을 찾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녀는 열두 살이 되었을 때 교회에 가던 발길을 끊었다. 카일리에게 기독교 이야기는 전반적으로 특권을 누리는 백인 남성의 사회적 구성물이며, “율법”이나 “하나님의 통치” “복종”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로 여자를 억압하는 구식 도덕관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적절한 종교적 용어로 교묘하게 가렸을 뿐이다.

게다가 카일리에게는 그 어떤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그녀는 정의를 옹호한다. 그런데 그녀가 도대체 어떤 “죄”를 지었다는 건가? 그녀가 어기는 “율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누군가가 지금 “반역”을 저지르고 있다면, 그건 오히려 세상의 흐름에 맞서려는 그리스도인이다. 언젠가 역사는 그리스도인이 잘못된 편에 있었다고 판단할 것이다.

케빈은 카일리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가 카일리에게 자신에게 익숙한 말로 복음을 설명하려고 하는 순간, 카일리는 바로 등을 돌렸다. 더 나쁜 건, 케빈의 시도가 카일리로 하여금 그녀가 기독교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최악의 두려움이 사실이었음을 확인시켰다는 사실이다.

케빈의 마음을 찔렀던 말은 카일리의 마음을 전혀 찌르지 못했다. 오히려 역효과가 나타났다. 그녀의 마음은 더 굳어졌다.

문제: 당신이 말하는 것과 상대가 듣는 게 다르다는 사실

모르몬교도와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다 똑같은 단어인 “하나님”을 사용하지만 의미가 다르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이라고 할 때, 그건 유일신을 지칭한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이라고 할 때, 그건 고귀한 인간을 지칭한다.

같은 단어지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이것이 바로 모호함의 문제, 즉 “당신이 말하는 것과 상대가 듣는 것이 다르다”는 문제이다.

이것은 탈 기독교 시대에 죄를 설명할 때 생기는 문제이다. 그리스도인과 모르몬교도가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다르게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은 “죄”라는 단어에서 각기 다른 두 가지 의미를 유추한다.

탈 기독교 시대란 무엇을 의미할까? 탈 기독교 시대에 기독교는 더 이상 인류를 지배하는 서사가 아니다. 기독교는 많은 선택지 중 하나에 불과하고, 게다가 가장 바람직한 선택지는 더더욱 아니다. 기독교 시대에 자란 사람들(케빈)은 일반적으로 성장 배경이 주는 믿음 때문에 도덕적 절대성, 죄, 심판 같은 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교회에 대해서도 나름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에 반해서 탈 기독교 시대에 자란 사람(카일리)은 케빈과 동일한 배경적 믿음 또는 교회에 대한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기독교 성장 배경이 주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에는 기독교적 맥락에서 제시하는 “일반적인” 전도(예를 들어 사영리)가 도움을 준다. 사람들이 막연하게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여러 개의 점을 연결”함으로 죄를 용서받고 영생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면 된다. 하지만 탈 기독교 맥락에서 볼 때, 지금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전혀 다른 “점”을 가지고 있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메시지 자체는 달라진 게 전혀 없다고 해도, 일반적인 복음 설명으로는 기독교 시대와는 달리 동일한 방식으로 사람들과 연결할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죄와 구원에 대한 기존의 방식을 버려야 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죄에 대해서 우리는 ‘더’ 성경적으로 말해야 한다. 절대로 ‘덜’ 성경적이어서는 안 된다. 앙리 블로셔는 구약성경에서 “죄”를 설명하는 데 무려 50개 이상의 히브리어 단어가 사용되었다고 말한다. 신약성경은 여기에 몇 가지 단어를 더 추가했다. 그리고 신약 속 전도자(세례 요한과 사도들)는 당시 문화에 존재하는 용어와 은유를 사용함으로 사람들의 죄와 은혜에 대한 필요성, 그리고 그들을 구하고 용서할 수 있는 구주라는 점을 연결한다.

성경은 죄와 구원을 설명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보여주는데, 특히 다음 네 가지 이미지는 카일리와 같은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진실함, 선함, 아름다움을 보는 데 도움을 준다.

1. 수치와 명예

탈 기독교 시대에 우리는 죄책감-죄 없음 문화에서 수치-명예의 문화로 이동하고 있다. 우리는 집단주의가 되었다. 그 어떤 의문도 제기하지 않는 집단에 대한 절대 충성이 요구된다. 이탈 사인이 보이면 놓치는 법이 없다. 규율을 어기는 자는 당장 소환되어 취소되고, 수치를 당한다.

이처럼 전혀 다른 문화에 참여할 방법을 찾을 때, 우리는 사도행전의 사도들로부터 배울 수 있다. 유대인 청중에게 설교할 때, 그들은 죄책감-죄 없음 모델에 호소했다. “당신은 메시아를 죽였고, 이제 회개해야 합니다”(행 2:14-36 참조). 하지만 이교도 청중에게 설교할 때는 수치와 명예에 호소했다. “좋은 것을 주시는 선한 하나님이 계시지만, 당신은 그를 경배하지 않습니다”(행 17:22-31 참조).

나는 고등학교에서 복음을 전할 때 비슷한 방식을 사용한다. “당신이 십계명을 어겼어요. … 그래서 당신은 죄인이에요. … 그러니까 회개해야 해요.” 내가 이렇게 말을 시작하면 당장 학생들은 다른 생각으로 눈을 굴리기 시작한다. 그들은 내가 자신들에게 억압적인 권력 도구를 강요한다고 생각한다.

대신에 나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을 사랑하는 선한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아요. 모든 것을 베푸는 분을 무시한 채, 우리는 그냥 선물을 즐기기만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그 대가로 하나님은 우리의 수치심을 없애고, 우리를 높이 올리고 존중하십니다.”

내 말을 듣는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는 선한 하나님이 있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그런 하나님이 있다면, 왜 그를 존중해야 하는지는 알 수 있다. 이 주장은 그들의 가치관과 완전하게 일치한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의 삶에 수치심이라는 문제가 있음을 알고 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그 사실을 더 명확하게 설명한다.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내 모습은 내가 되어야 할 상태가 아닙니다. 나는 지금 나 자신을 실망시키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도 실망시키고 있어요. 그리고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실망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틀 안에서 나는 하나님이 우리의 수치심을 씻어내는 것으로 구원을 설명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회복시킨다는 거다. 하나님이 우리를 들어 올리고 존중하신다. 이 문화권에서 나는 민수기 6:24-26에 나오는 제사장의 축복, “체면을 세워주고”와 “평화”를 약속하는 내용이 매우 매력적이라고 ​​믿는다.

2. 깨어짐

“깨어짐”이라는 용어는 죄가 가진 수직적 요소를 완화한다는 이유로 기독교계에서 논란이 된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 문화와는 일맥상통한다. 이 말은 피조물이 인간의 죄 때문에 신음하는, 죄의 수평적이고 내부적인 표현을 나타낸다. 또한 인간의 “불의” 즉 구부러지고 뒤틀린 우리의 죄 많은 본성을 설명한다. “깨어짐”이라는 용어는 우리 문화의 스토리라인으로 들어가는 진입점을 제공한다.

“깨어짐”이라는 용어가 죄악의 전체 범위를 적절하게 포괄하지 못한다고 여전히 걱정된다면, 우리는 그 용어를 다른 단어와 같이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우리는 죄책감, 수치심, 고통, 깨어짐, 상처, 후회를 가지고 있다.”

카일리는 그녀의 세상이 깨졌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세상에는 폭력, 빈곤, 불의가 만연하다. 카일리는 자신을 깨진 사람으로 볼 수도 있다. 풍부한 물질적 자원에도 불구하고, 서구 세계는 스트레스, 불안, 우울증이 높다. 카일리 자신도 이러한 것들로 인해 내부적으로 고통 받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이 깨어진 상태를 가장 잘 설명할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말을 인용하는 것을 좋아한다. “선과 악을 나누는 선은 국가나 계층, 정당을 통과하지 않고 모든 인간의 마음을 통과한다. 인간 각각의 마음을 관통한다.”

세상이 “깨졌다”라고 진단하는 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이다. 우리는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만 해결할 수 있다. 사회는 각 부분의 합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사회를 구성하는 부분이다. 따라서 사회의 악은 우리 각자의 내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우리가 깨졌기에 사회가 깨진 것이다.

해결책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모든 게 나의 문제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이 깨어진 상태를 고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마음이 필요하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정의와 회복을 가져오는 이사야 61장에 호소할 수 있다. 우리는 “병든 자”에게 “의사”로 오신 예수님께 호소할 수 있다(막 2:17). 하지만 그 ‘병’이 다른 곳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3. 자기 의와 나의 부족함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오늘날 케빈과 카일리와 같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말씀 속에서 만나도록 만든다. 예를 들어, 케빈은 누가복음 15장의 둘째 아들 그리고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세리와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다. 반면에 카일리는 동일한 비유 속 큰 아들과 바리새인에게서 자신을 볼 것이다.

이러한 비유는 카일리와 같은 사람에게 무장 해제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대학생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예수님께 ‘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에 따르면 죄는 ‘지구를 보호하는 날’에 모든 집이 다 전깃불을 껐는데 유일하게 불을 끄지 않는 이웃을 바라볼 때 생기는 당신의 마음입니다. 또는 다른 사람이 비닐봉지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나만 에코백을 사용한다며 느끼는, 나만 다르다는 독선적인 느낌입니다.”

카일리가 자랑스러워하는 바로 그 모든 게 예수님 앞에서는 그녀가 죄인임을 드러낸다. 어떻게? 예수님에 따르면, 카일리의 죄는 그녀가 법을 어겨서가 아니다. 대신에 그녀가 “자신을 높이는 자기 의” 때문에 생긴다. 큰 아들이 아버지에 대한 선행을 무기로 삼고(눅 15:29) 바리새인이 하나님 앞에서 선행을 과시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18:11-12), 카일리는 자신의 선행을 높이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카일리도 자신이 마땅히 있어야 할 위치에는 여전히 “미달”이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자기가 속한 집단이 만족할 수준에까지는 결코 이르지 못할 것이다. 단 한 번의 잘못된 표현이 들어간 소셜 미디어 게시물로 그녀는 그 집단으로부터 당장 취소될 것이다. 또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녀는 이미 알고 있다. 자신이 결코 스스로 만족할 수준에 도달하지 못할 것을 말이다. 에코 쇼핑백을 잊고 비닐봉지를 사용했던 때도 있다. 그녀는 결코 백 프로에 도달할 수 없다. 왜 카일리는 매일 전기를 아끼지 않고 ‘지구 보호 날’에만 전깃불을 끄는가?

해결책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자신을 높이는 것을 멈추고, 하나님께서 그녀를 높이시도록 하는 것이다(14절). 그녀는 자기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선행을 무기로 공격하는 것도 멈춰야 한다. 대신에 그녀는 “본향으로 돌아와야” 한다.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드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 집을 나갔던 탕자처럼 말이다. 사랑해 달라고, 인정해 달라고 외치는 대신에 그녀의 선행이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기 때문에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결과가 되어야 한다.

4. 죽음과 예수 밖에 머무는 현실

신약성경은 구원을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와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표해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고후 5:14-15). 이것이 구원의 법적 본질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부활하여 새 생명을 얻었다(17절). 이것이 우리가 누리는 구원의 현실적 본질이다.

그에 따라 우리 죄에는 이중적 측면이 있다. 우리는 범죄를 저질렀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그게 다가 아니다. 우리는 또한 타락했다. 구부러지고 뒤틀렸다. 마냥 부족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야 하고 새로운 본성까지 부여받아야 한다. 이런 이중적인 측면은 우리에게 죄와 구원에 대한 더 완전한 그림을 제공한다.

죄와 구원의 관계 속에 담긴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라는 측면이 케빈에게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카일리에게 의미가 있을 “그리스도 안에”라는 측면을 탐구해야 한다.

세속적인 환경에서 사는 비그리스도인에게 말할 때, “예수 안에”라는 언어는 청중을 무장 해제한다. 죄와 구원을 설명할 때 그들에게 이 범주는 익숙한 게 아니다. 하지만 이건 직관적으로 그들에게 통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나는 예수님과 연합하지 않는 것이 위험하다고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물지 않으면 결국 죽는다는 게 예수님의 말씀이다(요 15:1-8). 가혹하게 들리겠지만, 자연 세계는 그렇게 돌아간다. 포도나무에서 잘려나간 가지는 자연스럽게 죽는다. 따라서 창조주와 단절된 우리가 죽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별개의 정체성, 성공, 안전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결국 시들어 죽을 것이다. 청중에게 이 주장이 사실임을 알려주는 실제 사례는 널리고 널렸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 팀에 합류해야 한다. 예수님 안에 머물러야 한다. 예수님 안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예수님께 당신의 영으로 우리를 채워 달라고 기도하자. 그러면 시들어 죽는 대신 당장에 “영생”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만 가능한 충만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누릴 것이다.

더 넓게 탐구하자

기독교 시대에 우리는 주로 죄와 구원을 죄책감과 죄 없음, 죄와 용서, 심판, 그리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설명했다. 이 모든 게 케빈 같은 사람에게는 말이 된다.

탈 기독교 시대에도 이 진리가 달라진 건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설득력이다. 구원에 대한 서사에서 기존의 방식을 포기하자는 게 아니다. 더 광범위한 성경적 은유를 탐구하고 복음 대화에 엮어 넣자는 것이다. 수치와 명예, 깨어짐과 회복, 자신을 높이고 낮추는 것, 부족함과 높여짐, 죽음과 그리스도 안에 거함과 같은 은유를 탐구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성경 속 전도자들 뿐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서 보다 더 다양한 청중에게 죄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복음기도신문]

원제: Expand Your Gospel Vocabulary

샘 챈(Sam Chan) | EvQ School of Evangelism과 ministry of City Bible Forum의 멘토이다. 지은 책으로는 Evangelism in a Skeptical World와 How to Talk About Jesus (Without Being That Guy)가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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