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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건국전쟁’이 보도한 이승만 진실

▲ 이승만 대통령. 사진: 유튜브 채널 뉴데일리TV 캡처

샬롬을꿈꾸는나비행동(샬롬나비)이 6.25전쟁 74주년을 앞두고, 공산군의 남침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고 한미동맹을 이끌어낸 이승만 건국 대통령을 바로 아는 것은 나라의 근본을 세우는 일이라고 17일 논평했다. 샬롬나비는 논평문을 통해 “이승만의 독립정신, 애국운동, 자유민주국가 건설, 농지개혁, 한미동맹 체결, 전국민 기초교육 및 산업화와 자유기업, 원자력 육성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초석이 됐다”고 밝혔다.

다음은 논평문 전문이다.

TV조선이 이번 2024년 6월 현충일 전날 밤 다큐영화 ‘건국전쟁’을 방영하였다. 6.25전쟁 74주년을 맞아 이달 ‘건국전쟁’을 방영한 것은 자유민주주의국가를 지킨 대통령을 추억하는 것으로 뜻깊은 일이었다.

이승만은 한반도에 최초의 근대 국민국가를 건설한 독립국가 창시자요, 최초의 자유민주의 체제를 도입한 선구자였다. 그가 만든 대한민국은 오늘날 세계 10대 선진국이 되었다. 그런데도 오늘날 그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친일파,” “독재자,” “한강 철교 끊고 도망간 런승만”이라고 매도당하는 이유는 이승만 때문에 남조선 혁명을 좌절당한 극좌 친북좌파의 이승만 악마화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건국전쟁’으로 전국민 차원에서 이승만 바로 알기 열풍이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승만을 폄하한 ‘백년전쟁’은 침묵하고 있다. 2013년 제작돼 수백만이 시청한 이 다큐물은 이승만을 하와이 깡패, 테러리스트, 백인 미녀들과 놀아난 플레이보이로 원색 비방한 ‘이승만 죽이기’의 결정판이었다.

‘건국전쟁’에 이어 앞으로 새로운 사료들이 이승만 왜곡을 깨뜨리고 진실의 역사를 조명해주기 바란다. 한국 사회에서는 흔히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은 하지만, 정작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역사를 잊을 뿐 아니라 왜곡하고 지우려는 행태를 이어가고 있다. 영화 ‘건국전쟁’은 그 같은 과오와 민낯을 고발한다. 영화 ‘건국전쟁’이 무수한 고정관념과 비관적 전망들을 깨고 승승장구하고 있다. ‘우파’, ‘다큐’, 그리고 무엇보다 ‘이승만’. 대한민국 사회, 특히 좌편향된 문화예술계에서 도저히 인기가 없을 것만 같았던, 아니 오히려 거센 비난과 반발까지도 예상됐던 이 키워드들을 모두 품고도, 이 영화는 연이은 박수갈채와 함께 “우리가 이승만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대각성까지도 이끌어내고 있다.

샬롬나비는 6.25전쟁 74주년 맞이하여 공산군의 남침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고 한미동맹을 이끌어낸 이승만의 귀중함을 다시 한번 인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1. 이승만은 왕조시대에 태어나 왕조를 국민들의 국가로 만든 대한민국 건국의 공로자다.

이승만은 고종 폐위 음모 사건 때문에 옥중살이를 하였다. 봉건 전제군주국가에서 자유민주 체제 대한민국을 만들고, 여성 참정권을 보장하였고, 신분 차별을 없앴다. 그는 워싱턴, 하버드, 프린스턴을 졸업하여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최고의 대학에서 수학하였고, 73세에 대통령이 되어 농지개혁을 시행하여 토지를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75세 때 6.25 전쟁에서 국가를 지켰고, 반공포로를 석방하였고, 휴전 후에 미군 철수 막기 위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하여 오늘날까지 한반도에 전쟁을 억제하였다. 그는 산업화 초석을 놓았다. 그는 국민소득 63달러 상황에서도 1959년 원자력 개발을 위해 젊은 과학자들을 미국 유학시키고 서울대에 원자력학과를 만들어 오늘날 대한민국을 세계적인 원자력 국가로 만드는 초석을 닦았다. 그가 추진한 과학기술육성과 산업화에 기반한 자유기업육성 정책은 한국전쟁 후 87달러의 대한민국을 오늘날 3만6천불의 세계적인 경제 선진국가로 만드는 기초를 닦았다.

2. 이승만의 정읍 선언은 북한에서 진행되고 있던 분단을 알아차린 선제적 구국 결단이었다.

이승만을 비난하는 이들은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을 천명한 이승만의 ‘정읍 선언’이 민족을 반쪽 내서라도 권좌를 차지하려는 노욕(老慾)의 발로였다고 폄훼한다.

그러나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1945년 8~9월 38선 남북의 통행과 통신·우편을 차단했다. 스탈린은 9월 20일 북한 주둔 소련군 사령관 슈킨에게 ‘한반도 북부에 소련의 이익을 영구히 구축할 정권을 수립하라’고 지령을 내렸다. 아직 이승만이 귀국하기도 전의 일이었다. 이에 따라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사실상의 정부가 들어서 토지 국유화를 추진했다. 분단의 원인은 이승만이 아니라 소련과 북한이었다.

이승만이 귀국하기 전에 소련 스탈린이 북한에 친소 정권 수립을 지시했고 남북 간 38선 통행도 소련이 금지했다는 역사적 사실들이 이승만이 분단의 책임자라는 주장을 반박한다.

북한은 1946년 2월 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하였기에 이승만이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남한 만의 단독정부수립 선언은 소련 주도의 한반도 공산화를 막았으며 뒤이어 1948년 건국에 기여하였다. 이승만의 건국은 518년 조선왕조를 민주공화정으로 바꾼 대혁명이었다. 당시 한국민의 70% 이상은 사회주의를 선호하였으며 극한적 이념 갈등으로 인한 내전 상황이었으나 이승만은 이런 내전을 극복한 후 대한민국을 건국하였다. 당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만이 살길이며 공산주의는 절대 불가함은 40년간 미국생활을 하고 미국에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승만만이 체득한 선견지명이었다.

3. 이승만은 친일파 등용하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의 각료 대부분은 항일 독립운동가였다.

이승만이 임명한 부통령 이시영, 국무총리 이범석, 법무부 장관 이인, 문교부 장관 안호상, 농림부 장관 조봉암 등 대한민국 초대 내각 각료 대부분이 항일·독립운동가였다. 반면 북한은 공산주의에 협조한 인물에게 과거를 묻지 않은 결과 내각에 강양욱·이승엽·정국은 등 과거 친일 경력이 있던 인물이 상당수 들어갔다.

3. 6.25 전쟁이 나자 이승만은 해외도피 권유 받았으나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6·25 초기 주한 미 대사가 해외 도피를 권유하자 권총까지 꺼내 들고 물리친 이승만과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황이 불리해지자 가족을 만주로 도피시킨 김일성의 행태와도 대비된다.

미국 CIA 감청 부서에서 기록한 1950년 6월 27일 이승만의 라디오 연설 원본을 분석한 결과, 연설 어디에도 ‘서울 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켜 달라’는 내용은 없었다. 무초 주한 미국대사가 ‘한반도를 떠나 망명정부를 세우라’고 권유하자 이승만은 권총을 꺼내 들고 ‘인민군이 들어오면 이 총으로 그들을 쏘고, 마지막 한 발은 내게 쏘겠다’고 말했다. 이것은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일기에 나오는 증언이다. 이승만은 결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한반도를 떠나지 않고 국토를 사수했다. 전쟁을 일으켜 놓고 불리해지자 가족을 만주로 피신시킨 인물은 북한의 김일성이었다. 이러한 김일성과는 달리 나라를 지키기 위해 6.25 전쟁 중 279번의 연설을 하며 장병의 사기를 북돋웠던 이승만 대통령의 행동은 대조된다.

4. 미제의 앞잡이였다? 아니다. 그는 당시 투철한 국제적 안목으로 미국에 자주적 정책을 편 강력한 지미(知美) 정치가였다.

이승만이 미제의 앞잡이라는 것은 모함이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광대한 영토를 지닌 미국은 당시 한반도에 큰 관심이 없었다. 가난한 약소국이었던 이 나라는 처음부터 미국의 관심 밖이었다. 이런 미국을 상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뤄내는 데 성공했다. 주한미군 주둔, 한국군 증강, 8억 달러 경제원조 등 약소국이 강대국을 상대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을 얻어냈다. 그 결과 70년 이상 100명 이상이 죽는 전투가 한반도에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는 역사상 유례없는 평화를 이룰 수 있었다

5. 한강 철교 폭파전 부교(浮橋)를 설치해서 피난민들이 건널 수 있도록 했다.

6·25 때 한강다리를 폭파하고 대통령 혼자 서울을 탈출했다는 건 정설처럼 여겨져 왔다.

“6.25 당시 한강 철교를 끊고 도망간 런승만”이라고 매도되었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국군은 한강다리 폭파 전 부교(浮橋)를 설치해 피란민들이 한강을 건널 수 있도록 도왔다. 다큐영화는 한강대교 폭파 시에 공무원 수십명이 사망했으나 피난민들이 희생당하지는 않았다고 전한다.

6. 그는 장기집권 했으나 독재자는 아니었다. 그는 대학병원에 부상당한 학생들을 위문하여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 했다.

이승만은 독재자였다? 사실이 아니다. 만약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뒤엎는 독재 체제였다면 의회와 언론의 역할이 봉쇄돼야 했을 텐데 그런 일은 없었다. ‘독재자 이승만’이라는 것은 당시 야당의 정치적 구호 속에서 주로 등장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평화선과 독도 수호, 전체 예산의 20%를 배정했던 교육 정책, 원자력 산업의 초석 등 1950년대에 숱한 업적을 이뤘다. 3.15 부정선거는 단독후보였던 대통령 이승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장면과 경쟁하던 부통령 이기붕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책임을 지고 담담히 하야하였다. 4·19 주역 중 한 사람인 이영일 전 국회의원은 오히려 ‘건국전쟁’이 놓친 부분을 다음같이 지적했다: “국민이 물러나라고 해서 물러나는 지도자는 세계 정치사에서도 찾기 힘들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북한의 대남 전략에 우리 정부가 휘둘리면서 이승만 혐오를 방치했다.”

7. 19604대 대통령선거 당선 왜곡 부정선거 원흉이었다? 그의 경쟁자 조병옥이 미국에서 심장마비로 죽자 단독후보였다. 부정선거는 부통령 선거에서 조직적으로 행해졌다.

1960년 4대 대통령 선거 당시 민주당 후보 조병옥의 서거로 인해 이승만의 당선은 확정적이었다. 3·15 부정선거는 이승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 공작으로, 이승만과는 무관했다. 4.19혁명의 시발점이 된 사건은 3.15 부정선거였는데, 당시 대통령 선거 후보자는 이승만과 조병옥 둘뿐이었다. 그러나 조병옥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했기에, 결론적으로 단일후보였던 이승만은 부정선거를 할 필요가 없었다.

비민주적 속임수로 우매한 대중을 기만하여 독재 권력을 연장했다는 586세대 좌편향 학자들의 전형적인 논법은 “대부분은 문맹이어서 누구든 기호 1번을 달고 나오면 당선되는 게 당연하다”고 왜곡하였다. 그런데 실제 자료를 보면 전쟁시였으나 1952년 전국 투표율은 88.09%에 달했다. 사상 처음 치러지는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 국민 다수는 적극적으로 참여했음을 증명하는 놀라운 수치다. 그 결과 74.61%라는 실로 무서운 득표율을 과시하며 기호 2번 이승만은 기호 1번인 조봉암(득표율 11.35%)을 제치고 제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8. 이승만은 4.19가 나자 스스로 하야하고, 부상당한 학생들을 위문 격려하였다.

4·19가 일어나고 나흘 뒤, 85세의 이승만이 부상당한 학생들을 찾아가 위문하고 북받치는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내가 맞아야 할 총을 우리 귀한 아이들이 맞았다”며 울었고, 스스로 하야하는 용단을 내렸다. 서울대 1학년생으로 4·19 시위대에 있었던 현승일 전 국민대 총장은 이 장면을 증언하면서 피력한다: “이 대통령이 울먹이는 장면은 당시 모든 언론에 보도됐다. 장례식에 수백만 인파가 몰렸듯이 이 박사에 대한 국민 반감도 크지 않았다. 이승만에 대한 증오는 이승만 시대를 살지 않은 586 종북 세력이 80년대에 만들어낸 것이다.”

9. 하야(下野)후 가난한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거할 곳이 없어 교포가 마련한 집에서 지냈다.

이승만은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쿠스처럼 비자금을 비축하지 않았다. 그가 하와이에서 기거한 곳은 교포들이 제공해 준 것이었다. 이승만은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비싼 음식을 만드는 것조차 만류하고 모아서 비행기표를 구입하여 귀국하려했다. 하지만 고령에 건강이 나빠져서 하와이에서 90세 나이로 별세했다.

10. 오늘을 사는 우리는 낭설(浪說)에서 벗어나 참 애국자를 바로 알아 후대에 남기자.

오늘날 대한민국은 2차 대전 후 유일하게 자유와 경제 번영을 당대에 이룬 자랑스러운 나라다. 그 선두에 이승만이 있다. 오늘날 젊은 세대는 더 이상 낡은 좌파이념에 빠지지 말라!

이승만의 삶, 그리고 그가 내렸던 선택의 근간 중 가장 중요했던 것은 국가와 국민에 대한 그의 사랑이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 어느 누구도 이승만보다 뛰어난 애국정신, 독립운동, 경력, 학력, 외교적 식견, 국제적 네트워크를 갖춘 자가 없다. 국제사회에서 시대를 앞섰던 이승만 대통령의 별명은 ‘독립에 미친 늙은이’에서 ‘예언자’로 바뀌었고, 그의 앞선 각종 정책과 외교는 그가 세우고 봉사한 자유대한민국이 그 어느 나라와도 비교될 수 없는 ‘기적의 나라’로 불리게 된 초석이 됐다. 말년의 장기 집권에 따른 실정은 그를 모신 측근들의 실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과오와 공적을 바로 저울질하여 그를 건국 대통령으로 바른 자리에 세우는 것은 우리들의 역사적 사명이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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