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안에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이아침 칼럼] 우리의 염려를 주님께 맡기면, 주님이 우리를 붙들어주신다

ⓒ 안호성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 27:4)

‘한 가지’라는 말은 오직 그것뿐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집에 평생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라는 것이 많습니다. 바라는 모든 소원이 무너져야 산다고 제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해 드려도 될까요?

그런데 조건이 평생입니다. 만만치 않은 단어입니다. 부담스러운 단어입니다. 평생 제가 여러분을 보고 산다면 어떨까요? 일상에서 승리하는 것이 실력입니다. 목사는 늘 웃고 살까요? 아닙니다. 늘 웃고 살 수는 없습니다. 일상에서 억울함과 어려움이 있지만 그것이 제 마음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소원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일상이 바뀌기를 원하면 안 됩니다. 날씨가 덥다고 비오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환경의 문제가 생긴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면, 국가에 난리가 나도 내 마음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면, 그것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제가 기도하고, 그 기도에 응답받을 때마다 나누고 싶은 기쁨이 있습니다. 세상 난리가 나도 제 마음에 그것이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정, 재정, 자녀, 건강 어려워지면 난리 납니다. 낙오되고 도태될까 봐 난리입니다. 그럼에도 마음은 따로 놀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실제 신앙생활입니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시 27:3)

다윗이 극한의 상황, 전쟁 같은 상황에 처했습니다. 바라고 원하는 것은 따로 있어야 합니다. 보통 군대를 잘 정비하거나 여러 방법을 동원해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상식일 텐데, 다윗은 주님의 집에서 주님을 바라보며 살고 싶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무책임한 것입니다. 가령 여러분의 가정이 난리 나서 경제적으로 무너진 상황인데, 하나님 집에서 하나님을 바라며 살자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런 무책임이 어디 있느냐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열두 정탐꾼에 대해 배웠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은 합리적이었고 객관적인 근거를 갖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군사들에 의해 망하게 될 것이라고 분석한 능력도 있었습니다. 적들에게는 훈련된 군사도 있고 철기 문명이고, 우리는 훈련도 받지 않은 오합지졸이라는 것입니다. 군사력이 없어서 싸우면 질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그런데 두 명의 정탐꾼은 세상 기준으로 볼 때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합니다. 단 하나만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돼!” 여러분은 실감 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춰진 하늘의 지혜와 지식이 열리면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된다는 그 믿음의 실력이 깊이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논리로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전쟁이 나면 백성의 안위를 책임져야 하고, 만일 그럴 수 없다면 주님 앞에 나아가 탄원해야 하는데, 고작 한 것이 평생 여호와의 집에 살며 여호와를 바라보며 사는 것이 꿈이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것이 열려야 합니다. 날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연합해 죽음으로 열려야 합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55:22)

하나님과 관계성에서는 구조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짐을 맡기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구조가 깨져야 합니다. 하나님께 염려를 맡기면, 하나님께서 그 염려를 맡아주신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구조가 깨어져야 합니다.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말씀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맡기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십니다. 짐, 염려를 맡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붙드십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짐에 가 있는 마음, 문제에 가 있는 마음, 운명을 쥐고 있고 목숨줄로 여기는 그것이 깨지기를 원하십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에 묶여 있는 우리의 사슬을 풀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쉬게 한다고 하십니다.

다윗이 전쟁 같은 상황에서 여호와를 바라본다는 것, 다윗은 극적으로 상황과 마음을 분리시키고 있습니다. 세상은 흉흉한데, 마음은 하나님께 가 있다는 것! 그때 주님이 붙드신다는 것! 내 안에서 편히 쉬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주목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주목하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를 보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까? 상황을 봅니까, 하나님을 봅니까? 문제가 문제로 여겨집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느껴집니까? 그것이 구원입니다.

죄 사함을 받아야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깨끗해지고 거룩해져야 할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 자체가 복음이 아닙니다. 의로워지는 것이 복음이 아닙니다.

왜 의로워지고 왜 깨끗해져야 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려고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천국 가려고 예수 믿는 것은 이기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그냥 따라오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 만나려고, 그곳에서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려고! 아버지와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짐이 문제가 되니까 그것을 맡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맡겨라! ‘전쟁 같은 상황에 있는 다윗이 보이니? 전쟁 같은 상황에서도 천국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자 하는 다윗이 보이니? 그것이 구원이란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 27:4)

성전에서 사모합니다. 성전의 지성소를 들어가려면 번제단을 통과해야 합니다. 번제단은 십자가입니다. 번제단의 죽음이 없으면 성소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것이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날마다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면, 육을 통해 들어오는 것을 마음에 담아 두는 한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보고 싶고 갖고 싶고 되고 싶은 것을 마음에 두는 한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번제단을 통과해야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시 27:5)

이것은 비겁하거나 나약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살 길입니다. 삶에는 이런저런 문제가 있습니다. 죽을 것 같은 상황도 생깁니다. 그러나 그것을 푸느라 마음 쓰지 마십시오. 오히려 마음 가운데 계신 주님을 나누십시오. 주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듣습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저는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 전전긍긍하지 않고 그때마다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겠습니다! 마음이 태연하게 주님 바라보는 영광 가운데 있겠습니다! 가정 어렵죠? 사회적으로 어렵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로 달려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하늘의 기쁨이 쏟아져 내리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날마다 익어지도록, 부부가 말씀을 나누고 자녀와 말씀 나눔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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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저서로 <주께서 피워내시는대로>(토브원형출판사, 2020), <예, 주님 제가 순종의 전문가입니다>(토브원형출판사, 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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