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안에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이아침 칼럼] 육적인 것 처리하고

사진: ⓒ Dev Benjamin on Unsplash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열왕기상 19:1~8)

성경이 말하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분명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대언자가 말씀을 선포하더라도 성경적인 관점에서 그 말씀을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보통 내가 욕구하는 것과 선포되는 말씀의 내용이 맞아떨어질 때, 은혜 받았다고 좋아합니다. 성경적 세계관이 열려야, 내가 욕구하는 것과 선포되는 말씀이 다를 때에도 ‘주님 말씀이 옳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사역자들이 탐방 오셔서 질문하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리더들을 어떻게 교육하고, 제자훈련은 어떻게 하고, 프로그램의 특징은 무엇이고, 식당사역 하면서 싸우지는 않는지 묻습니다. 특별한 훈련 프로그램도 없고, 식당은 마음씨로 밥 짓는 곳이라 그런 일 없다고 설명하면 못 믿는 것 같습니다. 나중에는 교인들이 목사님을 싫어하지 않느냐고 묻기까지 합니다. 말씀을 말씀대로 전하면 싫어할 것이라고 말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럴 때는 그분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리는 분인지 근심이 듭니다.

제자는 스승이 있습니다. 스승의 가르침과 생각과 의도와 사상을 받았다면 그대로 흘려보내는 것이 제자입니다. 주님의 제자라면 주님의 말씀과 뜻과 생각과 의지를 흘려보내며 살아야 합니다. 제자는 훈련이 아니라 삶으로 됩니다. 그래서 삶에서 부부가, 부모와 자녀가, 교회 공동체가 선포된 설교 말씀을 나누는 것입니다. 같은 본문 말씀이라도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열 번 설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는 말씀을 흘려 보내기에 변화됩니다. 말씀을 흘려 보내기에 나의 의지대로 행하지 않습니다. 변화는 말과 행동과 마음 씀씀이가 바뀌는 것입니다. 변화가 없는 하나님의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이끌어가는 것이 있습니다. 상처가 크면 상처가, 염려가 크면 염려가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세상에서 하는 심리치유는 내가 운전대를 잡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탄에게 나를 내어주는 것이기에 위험합니다. 성경은 운전대를 주님께서 잡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은 사랑과 공의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좋았더라’ 하십니다. 사람을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고 정복하고 충만하라는 복을 주셨습니다. 창조된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 하십니다. 우리는 복이 있는, 복을 받은 존재입니다.(창 1:28) 그러나 그 복은 인간이 타락하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타락한 뒤에는 저주를 받았고 하나님의 진노만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어떻게 해보려고 했지만 길이 없고 회복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 십자가에만 나타나는 까닭입니다. 십자가 예수님 이전까지는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고, 복이 있는 존재도 없었습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연합해 죽었을 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방주 안과 밖은 다릅니다. 에덴 안과 밖은 다릅니다. 예수 안과 밖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아무 때나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만 있습니다. 예수님과 연합해 죽은 존재들이 다시 복이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오셔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설교하신 것입니다. 저주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다시 복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합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 복음에 대한 이해, 교회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인간 이해! 로마서 6장을 보면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복음 이해! 희망없는 인간이 주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교회 이해! 주님과 연합하는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되어 교회로 살아갑니다.

잠언 23장 26절을 토브원형학교 개강예배 때 주셨습니다. 잠언을 100번을 넘게 읽었는데도 처음 보는 말씀처럼 한 구절이 마음에 확 다가왔습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잠 23:26)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달라고 하십니다. 친근함이 느껴졌습니다. 한편 하나님의 자녀가 아버지께 마음을 주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얼마나 마음을 주지 않았으면 이렇게 말씀하실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마음을 다 드리고 싶어하는데, 마음을 드리지 못합니다. 우리 마음에 채우고 싶은 다른 것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육적인 것입니다. 마음에 이미 담겨진 계획이 있고, 담아야 좋다고 여기는 생각과 의지도 있습니다. 주님께 드려야지 하는 마음보다 훨씬 더 큰 것이 이미 마음에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육신은 헬라어로 ‘사르크스’입니다. 거칠게 말하면 ‘고깃덩어리’입니다. 육체는 오감에 육감까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좋은 것을 보면, 본 것이 마음에 쑥 자리잡습니다. 그것이 바로 육적인 것입니다.

제가 다른 것에는 별 욕심이 없는데 스피커에는 욕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루악, 톨보이 스피커로 낭만주의 음악을 들으면 정말 좋습니다. 가격이 보통 수백만 원이 넘고 천만 원 넘는 것도 많습니다. 작곡가들의 삶은 엉망진창이었지만, 듣기에는 정말 좋습니다. 음표가 마음에 들어온다는 말이 과장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렇게 우리 몸을 통해 보고 들은 것으로, 우리 몸에는 가치가 형성되고, 그 가치가 마음에 들어와 있는 것이 육적인 것입니다. 육적인 것을 끝내 해결하지 못하면 빚을 얻어서라도 스피커를 살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이 육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좋은 포부라 할지라도, 나를 정말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육적인 것입니다. 우리 감각을 통해 마음에 채워져 있는 것이 육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육적인 것을 어떻게 끊어낼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엘리야가 이세벨이 자기를 죽이겠다고 하는 말을 듣고 도망갑니다. 이 말씀 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엘리야가 기도하니까 비가 내리지 않았다가, 엘리야가 다시 기도하니까 비가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불이 내려오고, 혈혈단신으로 바알선지자 450명을 죽입니다. 그런데 아합과 이세벨이 북이스라엘 선지자들을 다 죽였습니다. 최종 목표는 엘리야입니다. 엘리야가 3년 6개월 동안 비가 안 내릴 것이라고 아합 왕에게 말하고, 바알 선지자들 450명에게 갈멜산으로 오라고 하고 전투에서 다 죽입니다. 손바닥만한 구름을 보고 비가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합 왕이 마차를 타고 가는데 엘리야는 마차 앞으로 뛰어갔습니다. 그런 엘리야가 어떻게 이세벨의 말을 듣고 이렇게 도망갈 수 있을까요?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왕상 19:3)

엘리야는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갔습니다. 그가 본 것은 ‘이 형편’이었습니다. 세상의 우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바알’ 신은 남자, 태양을 섬김, 물권, 재물 신입니다. 바알은 풍요를 의미합니다. ‘아세라’ 신은 여성, 달을 섬김, 다산을 뜻합니다. 아세라 역시 풍요를 상징합니다. 즉, 세상의 우상은 ‘풍요와 행복’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을 바알로 만들고 아세라로 만들려고 합니다.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왕상 17:1~3)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왕상 17:8~9)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왕상 17:12)

엘리야가 살아왔던 방식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려움에서 숨겨 주십니다. 어려움을 막아 주시지 않고 숨겨 주십니다. 어려움은 역사의 흐름이기 때문입니다. 나뭇가지를 먹어야 할 정도로 심한 기근이 생겼습니다. 사르밧 과부에게도 심한 기근이 왔습니다. 기근은 보통 전염병 이후에 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통 네 가지 방법 ‘거짓 평화, 전쟁, 기근, 전염병’으로 치십니다.

엘리야가 육체를 통해 상황과 여건을 봤습니다. 본 그것이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그것이 육적인 것입니다. 육적인 것이 우리 안에 채워질 때는 하나님의 마음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도 예상하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 분위기가 이런데, 시대가 이렇게 돌아가는데, 가정 분위기가 이런데, 하고 예상하고 느끼고 그립니다. 계속 내가 판단하고 예상하기 때문에, 처방도 결국 내가 합니다. 엘리야가 ‘내 생명을 지키려고’ 도망간 것은 그런 것입니다. 어제 받은 은혜로 오늘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은혜 받아야 하고, 오늘 주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죽어도, 넘어져도, ‘오늘!’ 주님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의 중심을 확인해야 합니다.

엘리야가 갈멜산 전투에서도 승리했습니다. 소문이 퍼지면 분위기가 반전되어야 합니다. 엘리야가 생각할 때 이세벨이 꼬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예상이 빗나갑니다. 이세벨이 오히려 자기를 죽이려고 더 난리를 피웁니다. 이렇게 자기의 예상이 빗나갈 때 반드시 위기가 옵니다. ‘여기만 취업하면! 이 정도만 벌면! 저 정도 위치에 오르면!’ 그런 예상과 계획은 반드시 위기가 옵니다. 자기 목숨에 위협을 느끼는 것이 육적인 것입니다. 이 육적인 것이 마음에서 떠나갈 때 내 눈이 주의 길을 기뻐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에는 ‘말생토생’, ‘말생나생’이라는 줄임말이 있습니다. 말생토생은, 말씀으로 생각하고 토론하고 생활하라는 말입니다. 말생나생은, 말씀으로 생각하고 나누고 생활하라는 말입니다.

육신을 통해, 감각을 통해 가치가 형성됩니다. 가치가 마음에 달라붙게 되면 육적인 것이 됩니다. 그것이 그 사람입니다. 그때에도 마음에 말씀이 들어오게 하는 것이 영적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하나님의 것이 새겨져야 합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에는 오직 복음에서만 의가 드러납니다. 그것이 깨달아질 때 결국 안타까워서 무릎꿇고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에필로그

속을 잘 포장해 목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육적인 것을 먼저 인정하는 태도가 하나님의 긍휼함을 입습니다. 형성된 가치는 그냥 사라지지 않습니다. 주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생명이고 은혜이기에 엎드릴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십니다. 복음으로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복이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해 십자가에서 죽을 때만 하나님 마음에 드는 의가 드러납니다. 마음에 형성된 육적인 것이 곧 나입니다. 그것을 돌이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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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저서로 주께서 피워내시는대로(토브원형출판사, 2020), 예, 주님 제가 순종의 전문가입니다(토브원형출판사, 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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