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 맺게 되리라 (2)
포도나무와 가지는 둘로 나누어 말할 수 없다. 포도나무가 있어야 가지가 존재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성도를 이야기할 때 예수님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성도의 생명은 예수님께 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가지된 성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매 맺게 하시기 위함이다. 성도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충만히 드러날 때 하나님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태어나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연합되었다. 이 생명의 연합은 우리와 합의해서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우리는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되었다(엡 1:3~4).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주님 없는 우리, 우리 없는 주님에 대한 이야기는 불가능하다. 주님께서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도 이 때문이다.
가지가 먼저인가, 나무가 먼저인가? 물론 나무가 먼저다. 가지인 우리가 포도나무인 예수님을 선택해서 붙어 있는 게 아니다. 주님이 우리를 만들어내셨고, 붙들고 계시고, 책임지신다. 원래 우리는 주님과 영원히 분리된 채 태어났다.
‘한 번 태어나면 두 번 죽고, 두 번 태어나면 한 번 죽는다.’는 말이 있다.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거듭나지 못하면 영적인 의미로도 죽고 육체로도 죽는다. 그러나 영적으로 거듭나면 육체로 한 번만 죽으면 된다. 육신의 출생도 내 의지와는 상관이 없었다. 하물며 거룩한 주님에게서 다시 태어나는 일을 어떻게 우리의 의지로 얻을 수 있겠는가. 전적인 주님의 주권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얼마나 안전한 조치인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이 영광에 이르게 하신 것은 우리의 의지나, 어떠함이나, 혈통으로 된 것이 아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하나님의 선택이었다.
우리의 어떠함에 운명이 좌지우지 된다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다. 하나님의 수준에 도달할 인간은 없다. 우리의 구원은 행위가 아닌 은혜로 된 것이다. 우리 편에서 자랑할 게 아무것도 없다.
“내 아버지는 농부라(요 15:1)” ‘농부’이신 하나님 아버지가 씨 뿌리시고 가꾸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다면 우리의 모든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이 생명은 그 누구도 끊을 수 없고, 허물 수 없고, 무효화시킬 수 없다. 천지가 다 없어진다 해도 복음은 영원하다. 이 복음을 믿는 자는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 15:2)”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옛 자아의 습성들, 우리의 노력으로 도무지 없앨 수 없는 옛사람의 잔재들, 틈만 나면 끊임없이 올라오는 우리의 옛 성품들을 주님이 제거하신다.
주님은 지치지 않으신다. 진리 안에서 열매 맺는 가지는 견고한 가지가 되어 어떤 시련과 환란에도 흔들리지 않게 만들어 가신다. 진리가 생명이 되어 우리 안에 나타나도록 성령께서 이 일을 이루신다.
(2015.1 메시지 정리) <계속> [GNPNEWS]
김용의 선교사(순회선교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