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두 번째 편지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고후 12:7)
바울의 몸에 있는 가시는 무엇일까?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누가 주었을까? 그리고 바울은 왜 가시를 자신을 괴롭히고 “교만하지 않게” 하는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불렀을까? 이 글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한 것이다.
바울의 몸에 있는 가시는 무엇이었나?
가시라는 단어는 은유적으로 바울의 몸에 박힌 막대기를 가리킨다. 가시라는 단어가 은유로 기능하기에 주석자들은 그 은유를 설명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머레이 J. 해리스(Murray J. Harris)는 사람들이 흔히 바울의 가시를 식별하는 세 가지 방법을 요약한다(2 Corinthians, 532-3). 어떤 정신적 불안 장애로 보는 사람이 있고 또 사역의 대적자로 보는 이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육체의 질병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다.
주석자들은 갖가지 신체의 질병을 제시한다. 나는 심지어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에 따른 부분적 실명이라는 주장까지 들은 적이 있다(참고. 갈 4:15). 한 가지 일반적인 견해는 바울이 분명하게 “슈퍼 사도들”을 자신의 적대자로 명명했기 때문에 가시가 그들을 가리킬 수 있다는 것이다(Michael Gorman, Apostle, 386). 불안 장애는 사실 너무 추측성이 강하지만, 바울의 사역을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따라서 가시는 불안 장애, 질병, 심지어 특정 상대를 나타낼 수 있다.
다양한 의견에도 불구하고, 주석자들은 바울의 가시에 대해 구체적인 결론을 내리기를 꺼린다. 해리스의 결론이다. “정보의 부족 그리고 바울이 쓰는 언어의 모호함은 이 수수께끼를 해결하려는 모든 시도에 좌절감을 안겨 주었다”(533).
프레드릭 댄커(Frederick Danker)도 여기에 동의하면서 바울의 가시는 “영원한 신비”라고 결론을 내린다(2 Corinthians, 193). 콜린 크루즈(Colin Kruse)도 마찬가지로 “문제를 결정하기에는 데이터가 턱없이 부족하다”라고 지적한다(2 Corinthians, 266). 어느 정도 확실성을 가지고 바울의 가시를 식별할 수 없다는 데에는 현대 주석자들이 하나같이 동의한다.
바울은 가시가 무엇인지 정확히 밝히지 않기에 해석자들이 이런저런 의견을 제시하지만 확신을 가질 수는 없다. 나는 바울이 자신의 몸에 있는 가시에 대한 모든 세부 사항을 말하지 않았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럼에도 그는 가시를 직접적으로 “사탄의 사자/하수인”이라고 식별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려면 세 가지 추가 질문에 답해야 한다. 가시는 무엇을 위한 것이며, 누가 바울에게 주었으며, 사탄의 사자/하수인은 누구 또는 무엇인가?
가시는 무엇을 위한 것이며 누가 주었는가?
바울은 한 구절에서 가시의 목적을 두 번이나 “내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고후 12:7)이라고 밝혔다. 바울은 “계시”를 받았고, 이 가시가 없었다면 그는 교만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 이 가시를 누가 주었는지에 대한 답이 나온다.
사탄이 바울의 교만을 꺾으려고 가시를 줄 이유가 없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친히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라는 이유로 가시를 제거하지 않겠다고 구두로 말씀하셨다.
그리고 해리스가 설명했듯이, 고린도후서 12:2, 4에서 수동 동사의 사용은 하나님을 가리킨다(2 Corinthians, 532). 마찬가지로, 바울이 “내 몸에 가시를 주셨으니”(고후 12:7)라고 말할 때, 그에게 가시를 주는 암묵적 주체는 하나님이다.
그럼 가시를 준 주체가 하나님인데, 어떻게 그 가시를 “사탄의 사자/하수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사탄의 하수인은 무엇인가?
사자/하수인(messenger)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안젤로스(angelos)인데, 바로 여기서 천사(angel)라는 단어가 유래한다. 그리고 바울은 “내 몸에 가시를 주셨으니”라고 말하면서 즉시 그것을 “사탄의 사자/하수인”(a messenger of Satan)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사탄이 보낸 천사가 바울의 가시인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그 가시를 준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런 설명은 천사라는 단어가 (사자/하수인이 되기 위한) 영의 기능을 설명하기는 하지만 영의 본질을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근본적인 관찰을 하기 전까지는 이상하게 들린다(Isidore of Seville, Sententiae, I.10.1).
모든 천사가 영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영이 다 사자 또는 하수인은 아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땅에서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선한 영과 악한 영을 모두 다 사용하신다고 가르친다. 또는 그레고리오 1세(Gregory the Great, AD 540-604)가 말했듯이, “사탄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숨겨진 정의의 목적을 수행한다”(Moralia, 2.20.38).
특히 성경은 하나님께서 악령들이 자신의 공의를 집행하는 것을 허락하신다고 가르친다. 열왕기상 22장에서 선지자 미가야는 선한 영과 악한 영에 둘러싸여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본 환상을 전한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보좌에서 “누가 아합을 꾀어 내어서, 그로 길르앗의 라못으로 올라가서 죽게 하겠느냐?’”고 물으신다(왕상 22:20).
영 하나가 자원하고, 여호와께서는 그 영에게 어떤 방법으로 아합을 꾀겠느냐고 물으신다(왕상 22:21-22). 이에 대해 영은 “제가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아합의 모든 예언자들의 입에 들어가서, 그들이 모두 거짓말을 하도록 시키겠습니다”(왕상 22:22)라고 대답한다.
여호와께서 그 계획을 확증하신다. “네가 그를 꾀어라.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다. 가서, 곧 그렇게 하여라”(왕상 22:22). 그리고 선지자 미가야는 다음과 같이 합리적인 결론을 내린다. “주님께서는 임금님께 이미 재앙을 선언하신 것입니다”(왕상 22:23).
더 유명한 것은 욥기에서 하나님께서 사탄이 욥을 괴롭히는 것을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사실 사탄과의 대화에서 먼저 욥을 언급한 건 하나님이었다(욥 1:8). 그건 하나의 암시적인 도전이었고, 그것을 받아들인 사탄은 욥이 하나님의 축복 때문에 하나님을 섬긴다고 비난한다(욥 1:9-11).
욥을 사탄과의 대화에 넣은 여호와는 사탄의 도전을 들으신 후, 그가 욥을 해하도록 허락하신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네게 맡겨 보겠다. 다만,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아라”(욥 1:12; 또 욥 2:6 참조).
하나님은 사탄이 욥을 괴롭히도록 허용하셨지만, 욥은 그의 고통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이해한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라”(욥 1:21). 욥은 아우구스티누스(AD 354-430)가 언급한 것처럼 “주신 이가 여호와시요, 마귀가 빼앗는도다” (Psalm, §28)라고 말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사무엘상에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삼하 24:1)고 말씀하심으로 “다윗을 격동시켜 그들을 치게” 하셨다. 그러나 역대상 21:1은 이렇게 설명한다. “사탄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일어나서, 다윗을 부추겨,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하게 하였다.”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인구 조사를 하게 한 주체가 여호와인가 아니면 사탄인가? 이 점에서 대답은 분명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영들이 그분의 뜻을 성취하도록 허락하신다.
또한 시편 78:49에서 말하는 대로, 재앙이라는 이집트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파괴하는 천사들의 무리”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그분의 진노의 길을 마련하셨다”(시 78:50). “파괴하는 천사들”이라는 문구는 “악한 천사들”(מַלְאֲכֵי רָעִים)을 문자 그대로 번역한 것인데, 헬라어 구약성서(ἀγγέλων πονηρῶν)와 라틴 벌게이트(angelos malos)도 그렇게 번역했다. 더욱이 세 가지 번역본(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은 모두 다 하나님께서 이 악한 사자들을 보내신다고 말한다.
이 시편을 해설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이 악한 세상에서는 악한 천사들을 통하여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라고 설명한다.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최고의 공의는 악한 피조물이라도 선용하신다”(Psalm, §28)라고 말한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선한 영과 악한 영을 모두 다 사용하신다. “사탄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숨겨진 정의의 목적을 수행한다”(Moralia, 2.20.38).
이러한 성경 배경으로 볼 때, 사탄의 천사는 사자, 하수인(문자 그대로는 천사의 의미)의 역할이나 직무를 맡은 악령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 사자/하수인은 악한 영이다
사탄의 천사나 사자/하수인은 사탄에게 속한 악한 영이며, 하나님은 미가야의 환상에서처럼 악령을 보내시기도 하고, 또 사탄이 욥을 해하도록 허락하신 것과 같은 역할도 맡기신다. 이번에도 하나님이 사탄을 사용하여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 조사를 하도록 선동함으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움직이셨다. 또는 시편 78편에서 말하는 것처럼, 출애굽기의 재앙 동안 하나님은 악한 천사들을 통해 진노의 길을 마련하셨다(시 78:49-50).
욥과 마찬가지로 바울도 사탄의 사자/하수인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이것을 내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고후 12:8).
지금 이 글의 목적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오직 선한 일만 행하시고(시 119:68), 악한 영들은 2차 인과율 수준에서 자유 선택에 따라 행동한다고 확증하는 게 기독교 신학이라는 점은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레고리오 1세는 이러한 악령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비록 악령들이 자신의 악의적인 목적을 추구하지만 그분의 결정과 재량에 복종한다”(2.20.38).
이 문제에 대한 성경의 다양한 가르침에 너무 휩쓸리지 않도록, 나는 요점만 지적하고 싶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사탄의 영, 즉 악한 영을 통해서 바울을 괴롭히는 것을 허락하셨다.
어떻게? 정기적으로 우리의 육신에 고통을 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공격하는 악마의 방식 그대로이다.
가시는 바울의 몸에 있는 사탄의 유혹과 관련이 있다. 바울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사자/하수인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고, 나는 이 말을 바울의 몸 속에 있는 악한 영이 그를 괴롭힌다는 뜻으로 직설적으로 받아들인다.
몸에 관해 말할 때 바울은 몸 안에는 욕망과 정욕, 곧 죄를 짓게 하는 것들이 있음을 명확하게 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24에서 “육체와 그 정욕과 욕심”에 대해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쉬지 않고 이러한 육신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죄를 짓는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했듯이 우리는 “육신에 속했기”(롬 7:14) 때문이다. 사람은 육신에 속하였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과 욕망을 품고 있다. 바울은 인격과 육체를 의미하는 자신의 “지체” 안에서 쉬지 않고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고 인정한다. 그는 스스로를 “내 지체 속에 거하는 죄의 법에 사로잡힌 자”(롬 7:23)라고 말한다.
바울이 직면한 이 싸움, 우리 모두가 영광 앞에서 직면하는 이 싸움은 그로 하여금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롬 7:18)라고 인정하게 만든다. 그리고 바울이 지적한 것처럼 우리 또한 “육신 안에” 살고 있으며 “죄의 정욕”을 갖고 있다(롬 7:5). 바울도 말했듯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기”(갈 5:17) 때문에 이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정욕과 욕망은 육신 안에 있다. 그러면 죄가 어떻게 다가오는가? 몸이 금지된 욕망으로 유혹을 받거나, 또는 방종에 가까운 식욕으로 폭식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육체에 뿌리를 둔 열정과 욕망이 뜻대로 활개를 펼치도록 고삐를 푸는 것이다.
흔히 그렇듯이, 과거의 신학적 사고방식은 우리가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지금 다루는 부분과 관련해서는 세비야의 이시도르(AD 560-636)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는 바울의 육체의 가시를 육체의 욕망 및 정욕과 연관시켜 그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사탄의 사자가 일으킨 도발로 인해서 바울에게 임한 육체의 자극(참조, 고후 12:7)은 인간의 몸이라는 지체 속 죄의 법에서 나온 것이다(참조, 롬 7:19-23). 왜냐하면 그건 음란한 욕망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 안에 거하면서 저항하는 이런 충동을 쫓아낼 때, 그는 온전해지고 비로소 음란한 기쁨이라는 약점에서 해방되어 영광스러운 싸움을 싸웠다는 미덕을 받는다(참조, 고후 12:9)”(Sententiae, II.39.11).
이시도르의 요점은 사탄의 사자가 시각, 후각, 그리고 촉각 등 신체의 감각을 통해 바울을 유혹했다는 것이다. 정욕은 육신에 있다. 마귀는 육체의 감각과 욕망을 통해 사람을 유혹한다. 비록 육체를 입은 사탄의 사자/하수인이 육체의 욕망과 정욕을 어떤 식으로 공격했는지에 관해서 이시도르가 정확하게 밝히지는 않고 있지만, 그는 다름 아니라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가시라고 결론지었다.
결론
바울은 몸의 가시를 자신이 교만하지 않게 하려고 사탄이 보낸 사자/하수인임을 밝혔다. 나는 이 가시가 육체적인 질병이나 불안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믿지 않는다. 여기에는 몸 안에서, 즉 육체의 욕망을 통해 바울을 유혹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악령이 포함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시련은 바울이 교만하지 않도록 막아 주었다. 중요한 것은 그를 겸손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고린도에 있는 슈퍼 사도들이 전체 그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주석가들이 지적하듯이 바울은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더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다. 더 오래된 기독교 주석가인 세비야의 이시도르의 해석처럼, 육체를 입은 사탄의 사자/하수인이 바울을 유혹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 악령의 공격으로 인해 바울은 교만해지지 않게 되었다. 권력과 명성에 대한 바울의 욕망, 즉 그의 교만은 가시, 즉 사탄의 사자/하수인이 악용하려는 특별한 욕망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본문은 정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시는 육체를 입고 있는 사탄의 사자/하수인 또는 그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다는 점을 알려준다.
바울이 육신에 대해 말하는 것과 악령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는 성경 말씀을 고려하면, 우리는 바울이 겪은 어려움을 어느 정도 종합할 수 있다. 악한 영이 그의 육체의 욕망을 자극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은혜로 끝끝내 저항했다.
이러한 연약함을 통하여 예수님은 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고후 12:9-10).
악한 목적으로 사탄이 심은 몸의 가시가 예수님을 통해서 선이 되었다. 약함을 통해 바울은 강해졌다. 우리도 약함을 통해, 예수님의 은혜로 강해질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의 가시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다. [복음기도신문]
원제: What was Paul’s Thorn in the Flesh?
와이어트 그라함 Wyatt Graham | 와이어트 그라함(PhD.,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은 TGC Canada의 이사(Executive Director)로 섬기고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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