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준기 목사는 ‘교회와 선교는 하나’라는 주장을 이론만이 아닌, 선교적 교회 개척 실행의 순종을 통해 확인하고 있다. 그동안 그같은 생각과 순종의 여정을 저서 <끝까지 가라> 등 10권의 책에 담아냈다. 이 칼럼은 그의 저서 발췌와 집필을 통해 선교적 교회의 다양한 모습을 소개한다. <편집자>
자유
세상에는 자유가 없다. 한 번도 없었다. 역사를 살펴보면 자유를 위한 어떤 투쟁도 진정한 자유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그 싸움의 과정에서조차 자유는 억압되기 일쑤였다. 한 작가는 자유를 위한 역사적 투쟁에서 자유를 얻지 못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세상이 자유로워졌다 해도 내가 자유로워질지는 분명치 않다. 거대 악으로 여겨지는 외부의 적에 몰두하다 보면 오늘 당장 침해되는 나의 자유는 좋은 세상이 오고 난 뒤로 미뤄진다. 그런 인식이 당연시되면 설혹 좋은 세상이 온다 하더라도 개인의 자유는 보류될 수밖에 없다.
아거, 《불온한 독서》, 새물결플러스, 2017, 40쪽
인간은 어떤 자유든 그것을 얻게 되더라도 보존하지는 못했다. 한 철학자는 인간이란 ‘자유를 얻어도 그것을 다시 다른 권력자에게 애써 헌납해버리는 존재’로 묘사했다.
누군가의 자유는 다른 이의 자유에 방해가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누군가의 억압적 권력을 인정해버린다는 것이다(에리히 프롬 Erich Fromm, 《자유로부터의 도피》, 휴머니스트, 2012, 145-157쪽).
교회를 살펴봐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자유를 주셨음에도(고후 3:17), 우리는 그것을 죄 짓는 데 탕진해버린다(갈 5:1). 자유를 소진해버리는 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는 자주 인간 권력을 그리스도보다 높여왔다. 처음부터 그랬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시기했고, 자신들의 선생인 요한을 그리스도보다 더 높이고자 했다(요 3:25-30).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누가 세례를 주었는가에 따라 사분오열(四分五裂)하여 싸우며, 자신의 세례자들을 높이고자 했다(고전 1:11-13).
사역의 현장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를 전할 때조차 투기와 분쟁으로 했고(빌 1:15),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혜를 자신의 것인 양 자랑했다(고전 4:7). 이들은 예수님에게서 권력을 훔쳐 오려고 했다.
자유의 출처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역사는 교회의 시작부터 권력 싸움으로 얼룩졌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로 그분을 섬기는 대신에 다른 사람을 높이며 교인들을 낮추어 억압했다. 그런 일은 오늘날도 반복된다.
권력의 탄생
똑같이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더라도 저마다 부르심이 다르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는 사·선·복·목·교(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의 다섯 가지 다양한 소명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서로 누가 높거나 낮지 않다. 모두 소명자들이며 한 몸을 이룬 다양한 지체들이다. 다만 모두의 머리가 같을 뿐이다. 그에 빗대어 예를 들어보겠다.
만약 한 교회에서 ‘사도’적인 리더가 “교회 개척을 위해 함께 떠나자”라고 제안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때 옆에 있던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가 각각 말한다.
선지자: 잠깐만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함께 성경을 읽으며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인지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일단 광야로 나가서 3년 6개월 동안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음식을 먹으며 부르짖읍시다.
복음 전하는 자: 광야기도를 할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당장 복음을 들어야 할 영혼들이 가까이에 허다합니다. 어서 전도하러 나갑시다.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어찌 모르십니까? 이 대화를 하는 중에도 3초에 한 명씩 지옥에 떨어지고 있단 말입니다!
목사: 저는 모두의 의견에 반대합니다. 떠나는 것도, 광야기도도, 복음 전하기도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교회에 하나님의 양떼가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칭의를 받아 성화의 과정에 들어섰는데, 우리가 천국 문 앞까지 잘 인도해줘야 할 것 아닙니까? 상처 받은 성도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신앙이 연약한 성도들을 심방하며 말씀으로 더 잘 보살핍시다!
교사: 아, 저는 “떠나자”에 찬성입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다만 교회 개척을 하려면 먼저 충분히 알아야 합니다.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을 통해 교회론을 두루 살펴야 합니다. 그러니 일단 제게 3년만 주십시오. 그러면 교회론의 개요 정도는 미흡하나마 잡아드릴 수 있습니다.
사도는 사도의 일을 할 자유가 있고, 선지자는 선지자의 사역을 할 자유가 있다. 모두에게 각자의 고유한 자유가 있다. 그러나 앞의 회의에서 단 하나의 의견만 선택하면 리더십 권력이 탄생한다.
만약 다섯 가지가 아닌 한 가지의 소명만 존재한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위의 다섯 가지 중 어느 하나를 수렴하는 순간, 다른 네 가지는 거절을 당한다. 그러면 교회를 떠나지 않는 한 다른 네 명은 자신에게 걸맞지 않은 일을 해야 한다. 자유의 억압이 다수결을 통해 인정되는 셈이다.
그러면 권력이 생긴다. 만약 사·선·복·목·교 중 “목사”직을 모두 수행하기로 결의했다고 가정해보자. 그 순간 사도는 떠날 수 없고, 선지자는 광야로 들어갈 수 없고, 복음 전하는 자와 교사 또한 자신의 소명을 수행할 자유를 침해 당한다. 목사직을 함께 수행하기로 동의하는 사람들만 남을 것이고, 그 이후에 권력은 남는 사람들의 숫자만큼 주어지게 된다.
따르는 자의 수가 많아질수록 그의 권력도 커진다. 그러면 그를 따르는 자들의 자유가 더욱 보장되고, 그럴수록 다음 결의에서 더 많은 표를 받게 된다. 그러면 다시 권력이 커진다. 목사직이 아닌 다른 누구의 의견에 수렴하든 마찬가지다. 권력의 생성은 자유를 얼마나 보장해주느냐, 혹은 억압할 수 있느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이 의장이라면 어떻게 회의를 인도하겠는가?
교회 권력의 거부
누군가의 소명이 다른 제자들의 소명 실행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예수께 있다. 예수님이 머리이시다. 교회의 권력 구조는 그분께 집중되어야 한다. 사·선·복·목·교, 누구도 다른 누군가를 거쳐 그분께 도달하지 않는다. 소명은 각자에게 있고, 예수님에게서 왔다.
모든 소명의 출처가 예수님이라면 그것을 실행하는 것과 관련해 누구의 자유도 훼방 받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다. 만약 그 자유를 빼앗길 때가 있다면, 그리스도께 그것을 헌납할 때뿐이어야 한다.
소명 실행의 고유한 자유가 각자에게 있다고 하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교회의 권력자들이다. 성경은 교회권력을 철저히 예수께 집중시키고 있다. 이를 위해 신앙 선배들은 권력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을 심각하게 거절해왔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자신에게 권력을 주려는 제자들의 제안을 거절하며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28,30)라고 선언했다.
사도 바울도 여러 번 권력을 거부했다. 그는 교회권력이 예수님 외의 다른 이들에게 나뉘는 세태를 지적하며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고전 1:13)라고 호통을 쳤다. 그는 리더십에게 영광을 돌리거나 경외하지 말고, 다만 사랑 안에서 귀히 여기라고 했다(살전 5:12,13).
카펫파 vs 온돌파
공동체 안에서 함께 예수님을 따르지만 그분을 ‘어떻게’ 따를지 의견이 서로 맞지 않을 때가 많다. 그때 인간 리더십의 권력을 키우는 대신에 예수께 집중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내가 어렸을 때, 교회 바닥의 카펫 색깔은 붉었다. 교회 건물 리모델링을 하면서 실행위원회의 젊은 집사님들이 붉은 카펫 대신 온돌을 깔자는 의견을 냈다. 그러자 장로님 그룹이 거세게 반대했다. 붉은색 카펫이 성경적이라는 이유였다.
온돌파는 붉은 카펫이 성경적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카펫파가 “붉은색은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합니다. 저는 젊은 시절에 이 카펫을 깔기 위해 헌금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성경적이 아니라 경험적이다. 붉은 카펫이 보혈을 상징한다고 보는 것은 멋진 관점이지만 그들은 그것이 논의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혼동했다. 다시 말해서 카펫파는 ‘형태’를 ‘기능’으로 혼동했다. 슬프게도 의견이 모아지지 않아 이 싸움은 2년 가까이 진행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젊은 그룹은 교회를 떠났고, 선배 그룹은 성경적이라는 오해 가운데 계속 붉은 카펫을 지켜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하다. 기능과 형태를 구분하기만 했어도 싸움은 없었을 것이다. 기능이란 변하지 않는 영속적인 영역이며, 성경이 말하는 것이다. 반면 형태는 비영속적이며, 타협이 가능한 영역으로써 문화적이다.
기능이 원리에 관한 것이라면 형태는 방법론에 관한 것이다. 기능은 목적을, 형태는 수단을 말한다. 카펫이나 온돌이나 둘 다 형태에 불과하다. 다만 그것이 예배라는 기능에 도움이 된다면 채택하고, 방해가 된다면 바꾸면 된다. 누구든 자신에게 더 익숙한 형태가 있다. 그러나 어떤 형태든 기능에 위배되거나 방해되면 버리거나 바꿔야 한다.
기능과 형태
기능과 형태를 설명하기 위해 교회 사역을 예로 들어보자. 교회는 전도한다. 이것은 기능이다. 하지만 교회에 따라 전도 타깃과 방법이 다르다. 이것은 형태다. 전도라는 기능은 하나인데, 학교 전도, 거리 전도, 사영리 전도, 팔찌 전도, 커피 전도 등 형태는 다양하다.
휴대폰을 생각해보면 더 쉽다. 삼성폰, 노키아폰, 애플폰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어떤 것은 사진이 잘 찍히고, 어떤 것은 인터넷이 잘 연결된다. 각각 강점과 약점이 있다. 형태가 다양하다. 하지만 모두에게 없어서는 안 될 기능이 있다. 그것은 ‘통화 하기’다. 아무리 많은 장점을 갖고 있더라도 통화가 안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휴대폰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교회도 그렇다. 다양한 교단과 사역 형태가 있다. 어느 교회는 복음을 잘 전하고, 어느 교회는 기도를 잘한다. 어느 교단은 학교를 잘 세우고, 어느 교단은 기도원을 잘 세운다. 각자 강점과 약점이 있다. 형태가 다양하다. 하지만 모두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하나의 기능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다.
교회가 아무리 훌륭한 사역들을 많이 하더라도 예수님을 그 중심에 모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교회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 교회이시고, 교회는 예수님의 것이다. 만약 그분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교회라고 부를 수 없다.
신학자 한스 큉은 기능과 형태를 구별해서 설명했다. 그에 의하면 교회의 본질은 교회의 변화상 가운데 다뤄져야 한다. 왜냐면 교회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옷을 갈아입어 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교회의 외형적 변화만을 뜻하지 않는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교회론도 함께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한스 큉, 《교회》, 한들, 2007, 3-49쪽).
신학자뿐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랬다. 요한복음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기능이 같았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따를지에 대한 형태는 달랐다(요 21:18-23). 소명이 다르니 형태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사도 바울도 기능과 형태를 구별했다. 그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기능)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으로” 접근(형태)했다(고전 9:22).
기능–형태–자유
카펫 색깔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 즉 형태를 기능으로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권력자다. 하지만 다양성을 형태가 아닌 기능의 범주로 혼동하는 권력에는 늘 오류가 생긴다.
같은 논리가 교회 사역의 현장에서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카펫 색깔이 문제였던 것처럼 또 다른 이들에게는 ‘기도를 크게 소리내어 할 것인가, 작게 할 것인가’나 ‘세례 때 온 몸을 물에 잠기도록 할 것인가, 일부만 담글 것인가’나 ‘거리 전도를 할 것인가, 관계 전도를 할 것인가’나 ‘주일예배를 11시에 드릴 것인가, 12시에 드릴 것인가’ 등이 문제가 된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늘 형태와 관련 있다. 이단이 아니고서야 기능의 의견 차이 때문에 싸우는 교회는 없다. 대부분 형태를 기능으로 착각해서 생기는 분쟁이다. 형태에 관한 차이라면 어떤 쪽으로 결정하든 괜찮다. 기능의 자유는 거부해야 하지만 형태의 자유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기능과 형태를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종교개혁 시기에 가장 치열했다. 가톨릭의 논점은 “교회는 하나다. 그런데 개혁을 한다니 개혁파는 교회 분열자다”라는 것이었다. 반면에 개혁파의 논점은 “교회는 하나가 맞다. 그런데 너희는 교회가 맞는가?”였다.
가톨릭의 논점은 형태의 차이에 대한 것이었고, 개혁자들의 반문은 기능의 부재에 관한 것이었다. 개혁가들은 교회의 기능인 성경 말씀이 가톨릭에 있는지 반문했다. 기능에 있어서 불일치한다면 개혁은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개혁가들은 어거스틴(Augustine)을 인용해서 “기능에서의 통일, 형태에서의 자유!”를 주장했다(츠빙글리 Zwingli). 이것은 오늘날 흔히 3F로 요약된다. 기능Function, 형태Form, 자유Freedom가 그것이다(오브리 맬퍼스 Aubrey Malphurs, 《A New Kind of Church》, Baker Books, 2007, 7-56쪽).
생명의 특징
기능은 바꿀 수도 없고, 바뀌지도 않는다. 그리고 기능에 위배되지 않는 한 형태는 변화무쌍하다. 소나무 잎 두 장만 가져다가 서로 비교해보라. 똑같은 잎이 있는가? 떡갈나무 잎 두 장, 장미 꽃잎 두 장을 비교해보면 어떤가? 완벽히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생명의 특징이다.
사람들도 그렇다. 전 세계 74억 인구가 다 다르다. 쌍둥이조차 다르다.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 말투, 목소리, 생각하는 방식, 경험 등이 다르다. 생명이라는 ‘기능’에는 삶의 방식의 다양한 ‘형태’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기능과 형태는 서로 구별되고, 형태는 무한하다. 이것이 생명의 특징이다.
우리의 창조주는 우리를 서로 다르게 지으셨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는 다양한 교회를 인정하신다. 교회의 기능은 변하지 않지만 형태는 바뀐다. 기능이 몸이라면 형태는 옷과 같다. 제때 제 옷을 입어줘야 멋지다. 교회도 그렇다.
교회의 기능은 불변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곳은 교회로 볼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따른다. 하지만 순종의 방법에는 다양성이 존재한다. 예수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다. 우리는 저마다의 소명 가운데 자유롭게 주님을 섬기며 공존한다.
형태보다 크신 예수님
예수님과 여행 중일 때 제자들이 풍랑을 만났다. 넘실대는 검은 파도 위에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러나 눈앞에 닥친 죽음의 위기 속에서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다(막 4:35-38).
그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소리쳤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막 4:38) 그러자 예수님이 일어나셨다. 그러고는 바람과 바다에게 명령하셨다. “잠잠하라”(막 4:39). 그러자 폭풍이 멈추고 물결이 잔잔해졌다. 자연도 그분의 말씀에 순종했다. 그제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 4:40).
혼란에 빠졌던 제자들은 예수께 혼났다. 믿음의 문제였다. 풍랑이 무서운 이유는 믿음의 부재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풍랑보다 크시다는 믿음이 없어서였다. 그들은 예수님이 얼마나 크신지 몰랐다.
함께 계신 예수님이 풍랑보다, 검은 물결보다, 심지어 죽음보다 크신 분임을 그들은 믿지 못했다. 잔잔해진 물결을 망연자실 바라보던 제자들이 수군거렸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막 4:41).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다(골 1:17). 어떤 피조물이 그분보다 크겠는가? 하물며 어떤 형태인들 예수님보다 크겠는가? 그분을 따르는 한 다양성이 공존할 수 있다.
예수님의 크심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사·선·복·목·교는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하지만 예수님을 진정한 권력자로 인정한다면 누구의 사명 실행이든 함께할 수 있다. 예수님이 주신 사·선·복·목·교라고 인정할 때 서로를 위해 복종하며 사역할 수 있다.
떠나자고 한 사도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확인되면 선지자는 떠남의 실행을 위해 외쳐 기도하고, 복음 전하는 자는 새로운 사역지를 분석하며, 목사는 회중을 설득해서 팀을 꾸리고, 교사는 보조를 맞춰서 지식을 정리할 수 있다.
나는 20세기 사람이다. 모더니즘 사회, 획일화된 틀 안에서 자랐다. 그래서 형태를 기능에 흡수해서 주장하는 사람들의 권력을 인정하는 일에 익숙하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21세기를 살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사회, 획일화된 틀에 화를 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시대에 산다.
상상해보라. 만약 우리가 교회 권력의 기준을 예수 그리스도로 삼아 그분을 따르는 기능으로 하나가 되며, 다양한 소명 형태로 자유롭게 공존하게 된다면 10년 뒤, 20년 뒤에 한국교회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각의 방식을 바꾸는 일은 절대 선택사항이 아니다_닐 콜(Neil Cole)
[복음기도신문]
이 칼럼은 필자의 저서 <끝까지 가라(도서출판 규장)>에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발췌, 게재합니다.
송준기 | 총신신대원 졸. 웨이처치 담임 목사. ‘교회와 선교는 하나’라는 주장을 이론만이 아닌, 선교적 교회 개척 실행을 통해 순종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저서 <끝까지 가라> 등 10권의 책에 그동안의 생각과 순종의 여정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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