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가 원하는 것을 하며 그 자아의 종으로 살아가는 삶은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선 맥을 못 춘다. 고작 ‘균형’ 타령이다.
십자가 복음이 놀랍기는 하지만 균형을 찾아야 한다는 식이다. 이렇게 밥그릇 하나가 두려운 사람들은 대부분 운명에 맞설 용기가 없다. 밥을 굶어본 적도 없으면서 노예근성을 가지고 지레 겁부터 먹는다. 복음을 그렇게 듣고도 적당하게 타협하고, 고민만 잔뜩 하다가 이상한 괴물 같은 모습을 한 채 털썩 주저앉는다.
만만하지 않은 이 세상은 우리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준비되지 않은 채 휩쓸려 다니다보면 역사의 톱니바퀴에 끼어들게 마련이다. 역사의 톱니바퀴에 끼어 죽을 것인가, 아니면 어차피 죽을 목숨, 죽을 각오를 하고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며 목숨 걸고 믿음의 길을 가겠는가.
고작 12척의 배로, 그것도 잔뜩 겁에 질린 군사들을 이끌고 300척이 넘는 일본 함대와 맞서 싸워야 했던 이순신 장군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정신으로 부하들을 독려했다. “사즉생 생즉사(死則生 生則死)”.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탈영하다 붙잡힌 부하의 목을 치고, 진영을 불태웠다.
종노릇인가 승리 편인가?
죽음이 우리를 협박할 때, 운명에 굴복한 채 역사의 톱니바퀴에 끼어 죽을 것인가? 아니면 그 죽음을 각오하고 역사를 바꾸는 주인공이 될 것인가? 아니, 죽을 각오를 하고 믿음으로 주님 앞에 반응할 것인가? 다니엘이 그 길을 갔다. 다니엘은 멋있는 실력 쌓아서 높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뜻을 확고히 했다.
자유의지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주신 선물이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두려움에 계속 종노릇하다 죽을 것인가, 아니면 죽기를 각오하고 오히려 믿음으로 죽음을 삼켜버리는 승리를 택할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 또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을 믿는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권능은 하나님께 생명을 걸고 뜻을 정하여 진리의 편에 서는 믿음의 사람을 통해 나타난다. 종으로 살 것인가, 자유인으로 살 것인가. 영원히 살기 위해 자유인으로 죽음을 맞이하라. 하루를 살다 죽어도 이제는 육에서 영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순간에서 영원을 선택하라. 이 암담하고 도전적인 어둠 앞에서 주님의 소명(召命)을 받은 자들이여 뜻을 정하라!
수 만 가지 이유, 핑계, 합리화와 불순종으로 죽은 조상들의 비참한 종말과 망한 조국의 역사를 청소년기에 그 누구보다 생생하게 경험했던 다니엘. 원수들에게 목 베임을 당하고, 유린당하며 울부짖던 동족들의 절규를 어찌 잊을 수 있었을까. 무엇보다 성전이 무너지던 기가 막힌 고통을 어떻게 지울 수 있었을까.
“하루를 살다 죽어도 다시는 이런 미친 짓 하지 말아야지, 아무리 화려하고 강한 유혹이 와도 뜻을 정하여 이젠 다시 저 미친 길 가지 않겠노라. 하루를 살다 죽어도 거룩한 이 길 가겠노라. 내겐 다른 선택이 없노라.” 주님은 이런 단심(丹心)으로 자신의 뜻을 정한 사람을 지금도 찾고 계신다! (2014.8 메시지 정리)<계속> [GNPNEWS]
김용의 선교사(순회선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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