Ⅵ. 룻 파디야 디부어스트 박사의 메시지
(예수님처럼 보냄받다: 정의를 추구하라!)
(현재 이 설교 영상은 유튜브에서 “Walking Humbly with God”라는 제목으로 방영 중이다.)[1]
…. 나를 이 자리에 보내준 공동체들로부터 여러분께 인사를 전해야겠다. 그들은 곧 코스타리카에 있는 나와 남편이 속한 그리스도인 공동체, 여기에 함께하고 있는 변화하는 선교를 위한 국제 협력회(IFMT), 제가 가르치는 미시간 홀랜드의 웨스턴 신학교,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 학제적 신학 연구 공동체 등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지상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아셨던 그날 저녁, 제자들 앞에 서셨다. 며칠 전, 그들은 예수님이 로마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목격했었고, 살아계신 모습을 보고 놀랐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의 상처 난 손을 펼쳐서 그들을 진정시키시며,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으셨다(요 20:20-21). 복음서 저자 요한에 따르면, 이는 예수님께서 하신 마지막 말씀 중 하나로,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한 말씀이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그렇다면 우리는 물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어떻게 보내심을 받으셨는가? 로마의 화려한 왕좌에 앉은 왕자가 아니라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여인과 노동자의 아들로 보내심을 받으셨다. 산헤드린에서 명예로운 자리에 앉은 대제사장이 아니라 머리 둘 곳 없는 떠돌이 교사로 보내심을 받으셨다. 종교 의식에만 몰두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씀에 따라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맹인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억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눅 4:18-19). 그 은혜의 해는 땅이 본래 주인에게 돌아가고, 노예가 해방되며, 모든 불의가 바로잡히는 희년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정의롭고 생명을 주며 지속시키는 통치의 본질을 선포하고 시연하며, 이를 이어갈 공동체를 양육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으셨다.
예수님의 사명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성령의 영감을 받아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동행해온 예언 전통 속으로 뚜렷이 들어가셨다. 예수님의 태도, 말씀, 행동에서 우리는 미가와 같은 예언자들의 메아리를 보게 되는데, 그의 권고는 미가와 예수님의 시대에 적용된 것만큼 오늘날에도 유효한다.
미가 시대 유대의 농민들은 적군의 침략이 임박했다는 불안뿐 아니라 부패한 지배 엘리트들의 억압에 고통받고 있었다. 그들은 부유한 소수를 위한 도시 건설을 위해 세금을 내고 자신들의 들판을 떠나야 했다. 그들의 땅은 부자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몰수되었고, 그들은 강제로 쫓겨났다. 그들의 젊은 남성들은 군대로 징집되었고, 젊은 여성들은 왕실에서 성 노예로 끌려갔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불의가 종교적 외형으로 가려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종교적 관습, 의식, 희생 제사가 사회적 부패를 덮고 있었다. 거짓 예언자들은 백성의 외침에 귀를 막고 있었고, 제사장들은 부유한 자들과 결탁하여 억압의 무기들을 축복하였다. 이것이 혹시 여러분에게 익숙하게 들리지는 않는가?
좋든 싫든, 오늘날의 세상을 정직하게 바라보면 이러한 불의가 여전히 존재함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커다란 정의의 격차 중 하나는 부의 불평등이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이 번성할 수 있도록 생명으로 충만한 세상을 창조하셨다. 하지만 오늘날, 지구의 가장 부유한 1%가 전 세계 부의 절반을 소유하고 있다.[2] 2020년 이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5명의 재산이 두 배 이상 증가했지만, 약 50억 명의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졌다. 빈곤은 불의의 가장 눈에 띄는 얼굴이다.
한편,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인종차별과 민족 차별로 인해 기회가 줄어들고 소외의 불의를 겪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백인 가정은 흑인 가정보다 8배, 히스패닉 가정보다 5배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3] 인종차별은 환경 불의와도 연결된다. 기후 변화와 종의 멸종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동안, 유색 인종 공동체가 공기, 토양, 물의 오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 없이 가장 큰 피해를 겪고 있다. 폐기물은 세계 남반구에 버려지고 있으며, 기후 변화로 인해 불, 홍수, 격렬해진 태풍, 척박한 사막 지대를 피해 수백만 명이 이주하고 있지만, 그들에 대한 책임이 있는 부유한 북반구는 이들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 다른 심각한 불의는 성별 불평등이다.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같은 일을 하면서도 남성보다 적은 임금을 받고 있으며, 비숙련직과 “저평가된” 직종에 과잉 대표되며, 성희롱과 학대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 기독교 공동체에서도 여성들은 활동적인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남성이 대부분의 지도자 자리를 차지하며, 여성들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령께서 주신 은사를 사용하는 데 제한을 받고 있다.
차별은 또한 신체적, 정신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많은 삶의 영역에서 그들의 임금과 기회를 제한한다. 또한, 디지털 격차 — 인터넷, 컴퓨터, 스마트폰과 같은 디지털 도구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차이 — 는 전 세계 인구의 거의 3분의 1이 가상 세계에서 단절되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기회에서 배제되는 것을 의미한다. AI 산업은 앞에서 언급한 5명의 부자들에 의해 소유되고, 그들의 알고리즘에 의해 형성된다. 마지막으로, 산업 전쟁 기계는 종종 종교적 이념의 신학에 의해 힘입어, 하나님의 형상이 깃든 각 개인을 상대적으로 평가절하하며 사람들과 장소를 파괴해 나간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의한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부르심을 받았는가? 종교적 외형으로 감추어진 불의한 삶의 방식 속에서 하나님께서 미가를 통해 그의 시대의 권력자들에게 주신 메시지는 무엇이었는가? 미가는 먼저 유대인들에게 역사 전반에 걸친 하나님의 은혜로운 개입을 상기시키고, 그들이 기억하고, 듣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성품에 따라 행동하도록 촉구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미가서 6장 8절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질문으로 하나님의 기대를 요약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비밀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처음부터 분명했으며, 성경 전체를 통해 그들에게나 우리에게나 명확히 드러난다. 미가 시대 훨씬 이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대해 “내가 그로 그 자손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려”고 말씀하셨다(창 18:19).
수 세기 후, 법을 통해 새로운 백성으로 형성된 해방된 노예 무리에게 모세는 이렇게 권면한다. “이스라엘아, 이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켜 네 행복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냐” (신명기 10:12-13).
예언자들은 일관되게 이 부름을 되풀이한다. 예수님께서도 초기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은 종교 의식이나 종교 축제, 선교 활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순종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백성을 특징짓는 것은 피상적인 신앙 행위, “기독교 용어”, 찬양 노래, 또는 일부 세대주의 종말론의 탈을 쓴 식민주의적 신학이 억압을 정당화하고 자금을 지원하는 식민주의 신학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을 구별 짓는 표지는 무엇인가? 미가 선지자는 세 가지 상호 연결된 부름으로 요약한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기대되는 자세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과 함께 겸손히 걷는 것”을 요구받는다. 이는 창조주에 대한 깊은 경외심으로 우리의 연약함과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의존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자세는 하나님의 정의가 모든 이에게 적용됨을 깨닫고, 민족적 혹은 국가적 요구가 하나님의 정의의 다스림보다 우선하지 않음을 상기하게 한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은 우리를 성령의 역사에 열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게 하며, 자기만족과 불의의 뿌리인 우상 숭배에서 벗어나 예수님처럼, 고난받는 종으로서 세상에 보내심을 받을 수 있게 한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따라 기억하고, 듣고, 회개하고, 겸손히 행동하라는 부름을 받는다.
둘째 표지는 “자비와 인애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는 모든 행동의 핵심 동기, 깊은 연대와 사랑을 의미한다. 우리의 이기적이고 자기방어적인 본성을 벗겨내고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를 선지자적 평화의 메신저로 움직이도록 요구한다. 어떠한 이념, 종교, 인종도 하나님의 형상이 그분이 사랑하시는 피조물로부터 훼손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없음을 외쳐야 한다. 전쟁과 폭력이 세계 곳곳에 만연하는 현실 속에서, 고통받는 모든 이들, 특히 가자 지구에서 내쫓기고 억압받는 사람들, 이스라엘과 하마스에 억류된 인질들과 그들의 가족들, 그리고 위협받는 팔레스타인인들의 고통을 우리도 함께 나누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따라 사랑과 연민으로 기억하고, 듣고, 회개하며 행동하라는 부름을 받는다.
하나님의 백성을 구별 짓는 세 번째 표지는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공동의 선을 위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행동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공동체 전체의 선을 위해 안락하고 이기적인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 본보기는 다름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신명기 10장 17-19절에서 말씀하시듯,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이시며,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느니라. 너희도 나그네를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이 그림 안에선 집과 땅, 생계와 생명 자체가 약탈당할 때 침묵할 여지가 없다. 미가 시대의 유대에서 그랬듯이, 오늘날 어디에서나 그렇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진실하게 고백하는 이들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억압에 대한 종교적 정당화를 벗겨내고, 고통을 인정하고 애도하며 모든 방법으로 저항해야 한다. 예레미야의 말씀을 들어 보자: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3-24).
‘정의’는 어떤 정치적 경향에서 나온 단순한 이념적 구성물이 아니다. 정의는 하나님의 심장부에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 존재하고 행하는 모든 일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기억하고, 듣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성품에 따라 정의를 추구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물론, 우리 중 일부는 정의를 위한 작업, 정책 옹호, 설계 및 실행에 특별히 재능을 부여받아 그 분야로 보내질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역에 축복하시길 바란다! 하지만 모세의 율법, 미가와 예언자들, 그리고 예수님 자체가 전하는 메시지는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단순히 몇몇 전문가에게 맡겨질 선택적 활동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제자에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고 도전하셨다(마 6:33). 하나님의 나라 사전에서 ‘정의’는 모든 잘못된 것을 회복하는 구속적 복원의 의미이다. 정의는 상황을 올바르게 설정하고, 피해자를 위로하며 옹호하는 것이다. 이 정의의 의미는 잘못된 이들을 억제하고 벌하는 시스템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사용법과 대조된다. 하나님의 정의는 생명을 주는 것이며, 사랑의 표현이다. 정의는 사랑의 가시적 얼굴로서 사람과 하나님, 사람과 사람, 사람과 창조 세계 간에 올바른 관계를 설정하여 생명의 충만함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실현케 한다. 이러한 정의 없이는 진정하고 지속적인 평화는 없다.
우리는 예수님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것처럼 보냄을 받았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따라 정의를 구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정의를 추구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셔서 주님이 다시 오시고, 정의와 평화가 마침내 하나되는 그날까지 겸손하고 자비로운 하나님의 정의의 통로로서 간절히 추구하고 기도하게 되기를 바란다.
Ⅶ. 나가는 말
이번 로잔대회에서 룻 파디야 디부어스트 박사의 메시지로 촉발된 사과 논의는 복음주의 공동체가 정의와 평화에 대해 깊이 고민할 필요성을 보여주었다. 디부어스트 박사는 세대주의 종말론과 기독교 시온주의 신학이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억압받는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억압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될 수 있음을 비판했다. 이에 대해 일부 이스라엘 지지자들이 반발하였고, 로잔 지도부는 유대인의 고통을 충분히 다루지 못했다는 이유로 공식 사과를 발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중동 교회와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의 목소리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는 비판이 나왔다.
앤 자키 박사는 로잔 지도부에 대해 가자-이스라엘 전쟁 속에서 중동 교회의 오랜 고통을 외면한 점에 대해 회개를 촉구했다. 자키 박사는 로잔 지도부가 가자 지구와 중동 기독교인들이 겪는 비극과 고통을 침묵으로 일관하며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의 목소리를 묵살했다고 지적했다. 그녀는 로잔 운동이 다양한 신학적인 관점을 포용하고, 중동과 서구 복음주의 공동체 간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침묵과 무시의 태도에 대해 진정성 있는 회개와 반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팔레스타인 기독교 젊은 신학자 토니 다익도 디부어스트 박사의 메시지를 지지하며, 기독교 시온주의가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게 만드는 신학적 왜곡을 일으킨다고 경고했다. 다익은 복음주의 공동체가 이스라엘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에서 벗어나,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억압받는 이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 논의는 복음주의 공동체가 서로의 고통을 공감하고, 다양한 시각을 겸손히 경청하며, 예수님의 사명을 따라 참된 정의와 평화를 실현해야 할 과제를 남겼다. 디부어스트, 자키, 그리고 다익의 예언자적 목소리는 복음이 특정 민족이나 정치적 편향을 넘어서, 억압받는 모든 사람을 위한 공의와 사랑을 담아야 한다고 촉구한다. 로잔 공동체가 이러한 도전과 과제를 받아들여 중동과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기대를 남긴다.
디부어스트 박사가 제4차 로잔대회에서 논의를 촉발시킨 자신의 메시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페북에 남긴 메모(10.31) 일부를 소개함으로써 이 글을 마무리한다.
“We’re not ‘pro-Palestines’. We’re pro: justice, kindness, truth, human rights, peace, freedom, and dignity”. 우리는 ‘친-팔레스타인’이 아니다. 우리는 친-정의, 친절, 진실, 인권, 평화, 자유, 존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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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 파디야 디부어스트(Ruth Padilla DeBorst) 박사는 콜롬비아에서 에콰도르 신학자인 아버지 르네 파디야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대학까지 마쳤다. 미국 Wheaton College와 Boston University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라틴 아메리카 신학자 협의회 전 회장이다. 현재 남편 제임스 파디야 디보르스트와 함께 “학제적 신학 연구 공동체(CETI)”를 이끌고 있으며, 2022년 웨스턴 신학교 세계 기독교 부교수로 합류했다. 로잔 2010과 2024에서 각각 기조연설을 했다.
앤 자키(Anne Zaki) 교수는 카이로에서 목회자 가정에서 자랐으며 16세에 이집트 정부에 선택되어 캐나다 Pearson College에서 공부하였고, 미국 Calvin University를 졸업했다. 미국 칼빈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 미국 Fuller Seminary에서 설교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카이로복음주의신학교(ETSC) 교수로 설교학과 심리학을 가르치며, 남편과 함께 교회를 섬기고 있다. 로잔 2024에서 성경 강해를 담당하였다.
토니 딕(Tony Deik)은 베들레헴 성경대학의 성경 연구 강사이자, 영국의 성경과 폭력 연구 센터 연구원이다. 그는 지난 13년 동안 필리핀, 홍콩, 영국, 팔레스타인, 볼리비아 등 여러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며 사역했다. 현재 스코틀랜드 애버딘 대학교 PhD 후보생으로서 성경과 그리스 로마의 정의 개념을 연구 중이다. 그는 또한 이번 글이 발표된 INFEMIT(국제 선교 변혁을 위한 펠로우십)의 이사로도 재직 중이다. [복음기도신문]
[1] https://www.youtube.com/watch?v=DrMvOT7m6r4
[2] Inequality.org https://inequality.org/facts/global-inequality/
[3] “The 2019 Survey of Consumer Finances—which examined assets such as savings,
investments, retirement, pensions, and especially homeownership—Mollenkamp, Daniel
Thomas. What is the racial wealth gap? Definition, Statistics and Impact. Updated October 30, 2023 https://www.investopedia.com/the-racial-wealth-gap-5105010
정형남 | 전 아신대학교(ACTS) 선교대학원 교수 및 GMS 아랍권 선교사(천안장로교회 파송. since 1989). 그의 책으로 『이슬람과 메시아 왕국』CLC, 2009)과 아랍권 및 이슬람권 선교와 관련된 여러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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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잔대회에서 제기된 현대 세계의 불의와 교회의 책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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