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높이라 Prize Wisdom 잠 4:8

[원정하 칼럼] 광야의 소리, 슬럼의 소리를 외치다

▲ 사진 : 원정하 제공

며칠전 ‘크리슈나 스틸’ 빈민가에서 어린이 사역을 했습니다. 이곳을 처음 개척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여 년째 방문 중인 곳입니다.

제 무릎 위에 앉아 찬양하고 만화영화를 보던 아이들이 건장한 청년이 되거나 아이를 두셋 안고 있는 엄마가 되어(그래봤자 20대 초반이지만) 지금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 아이들 눈에는 제가 아무런 변화가 없이, 하나의 풍경이겠지요. 또 열다섯 살 이하 아이들 – 이르면 열다섯 살에 애 엄마가 되기도 하지만 – 에게 저는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전부터, 태어나기 전부터 이 마을을 방문하는 사람일 것이고요.

▲ 사진 : 원정하 제공

그런데 이 마을에 ‘제이스리’라는 약간 지능이 모자라는 아이가 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귀여운 여자아이였지요. 언어 능력도 떨어지고, 영상 세팅하느라 바쁜데 악수를 수십 번씩 하자고 하고, 설교 중이거나 기타를 치고 있는 저나 다른 청년들에게 무대까지 나와 악수하자고 하는가 하면, 심지어 만화영화 상영 시에 스크린을 몇 번씩이나 가리며 왔다 갔다 하곤 했지요. 한편으로는 귀엽고, 한편으로는 안쓰러워서 늘 조금 특별히 돌봐주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10여 년이 지나면서 지능은 아직도 어린아이 상태인 제이스리의 몸이 확 커져 버렸습니다. 그리고…지난 몇 달째, 저희가 갈 때마다 그 아이는 소리를 지르거나 울고 있었습니다. 물론 저희가 도착하면 모든 상황은 종료되고, 그 아이를 비롯해 모든 아이와 주민들이 어린이 사역으로 몰려오지만… 저는 늘 안타깝기만 했습니다. 어제도 그랬습니다.

다행히 지능이 아주 아기에서 멎은 것은 아니라, 요즈음에는 단문이나마 말을 조금 합니다. 그리고 우리말도 어느 정도는 알아듣는 듯합니다. 아주 천천히 성숙하기는 할망정, 아예 정신이 안 자라는 상태는 아닌 듯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 말이, 모두가 자기를 때린답니다.

몇 가지 짐작이 가기는 합니다. 먼저, 이 아이가 실제로 빈민가 사람들 보기에 충분히 ‘맞을 짓’을 하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아기 때의 행동이 몸이 클 대로 큰 상태에서 계속된다면, 남의 음식을 집어 먹거나 물건을 어지르거나 그릇을 엎지른다면, 빈민가 부모나 어른들이 할 수 있는 교육 수단은 오직 ‘때리는’ 것뿐이니까요. 마찬가지로 친구나 언니 오빠 레벨에서도 놀이에 껴 달라고 떼를 써서 끼워줬는데, 룰도 다 어기고 마음대로 안 된다고 투정한다면 빈민가 문화 그대로, 가벼운 폭력이 가해졌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 또래 애들이 학교를 가지는 못하더라도, 구걸이든 넝마주이든, 혹은 하녀나 공장 노동자든, 가사든 뭐라도 해서 가난한 살림을 돕는데 혼자 놀고먹는 게 그렇게 예뻐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요.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그토록 가난한 환경에서는 저런 아이들에게 관대하기가 쉽지 않을 듯합니다. 어릴 때는 귀엽고 적게 먹기라도 했지, 이제는 몸도 커서 때리지 않고 컨트롤하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게 옳다는 게 아니라, 빈민가의 문화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정도면 슬퍼도 이해는 가는데, 얼마 전부터 제가 받는 느낌은 조금 다릅니다. 혹시… 이 아이가 남자들에게 여러 가지 나쁜 성추행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자로서 몸이 아주 많이 컸는데도, 헐렁한 잠옷 비슷한 것만 며칠째 입고 있는 아이(예쁜 옷을 입히지는 않겠지요. 금방 더러워질 테니)… 정신상태도 흐리고 무엇을 당해도 그것을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 게다가 이제는 어린이들 무리에 속해있지도 못하고, 또래들이 다 이곳저곳에서 다른 노동(드물게는 공부를)을 하니 주로 혼자 놀게 된 아이… 무엇보다 부모(혹은 친척)도 반쯤 버리다시피 한 아이… 주변의 남자들이 자꾸 건드리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구체적인 증거는 없지만, 제가 도착했을 때 남자들의 뭔가 재미있어하는 태도나, 그 아이의 울음 등에서 받은 느낌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특별히 할 수 있는 게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제이스리가 제가 생각한 만큼 나쁜 일을 겪지 않고 있을지도 모르니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또 경찰도 형사도 아닌 제가 교회 청년들과 함께 마을을 뒤집으며 탐문하고 수사를 벌일 수도 없습니다. 사실 그 마을에서 10년째 말씀을 전하는 것 자체가 특권이니까요. 그런데 반대로, 10년을 어린이 사역을 하면서 말씀을 전했는데도 이토록 변화가 없다니 나와 우리 팀원들을 도대체 뭘 한 건가? 하는 슬픈 마음도 없지 않습니다.

만일 10년 전부터 그 슬럼 안에 십자가를 앞세워 교회를 세우고, 매주 서너 번씩 그곳만 가면서 아이들 하나하나 이름 다 외우고 기도하면서 집중적인 목회를 했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뭄바이의 슬럼들 자체가 반유목 상태라 같은 곳을 늘 가도 계속 인원 변동이 있고, 또 때로는 몇 달씩 사람들이 다 사라졌다가 어느새 돌아오기도 하는 유동적인 현장입니다. 이 ‘크리슈나 스틸’ 슬럼만 해도, 지난 십 년간 몇 번이나 사라졌다가 다시 세워졌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식의 사역은 박해의 표적이 되기도 너무 쉬웠을 것입니다.

또한 선교사가 열 가정도 안 되는 이 도시 뭄바이에 슬럼 인구만 1000만 명 가까이 되니, 한 곳을 집중으로 하기보다는 순회 전도를 해 나가는 쪽으로 사역의 방향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비정기적으로라도 10년을 지켜보면 눈에 밟히는 아이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 ‘크리슈나스틸’ 슬럼에서는 제이스리가 그렇습니다.

그 아픔 속에 귀가하여 집에 누워 있을 때, 10여 년 전 수라지 목사님과 빈민가 순회 선교를 처음으로 갔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곳은 ‘마페’라는 곳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왜 교단 일이나 신학교, 더 큰 사역에 집중하지 않고 일개 빈민가를 가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라지 목사님께서는 저를 데리고 그곳들을 다니시며(당시에는 함께 자전거로) ‘우리, 이제 진짜 사역을 시작하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빈민가의 지붕 위를 보며 ‘이런 곳 수천여 곳을 다닌다 해도 소망이 없지 않을까?’라는 마음에 괴로웠던 생각도 납니다. 저희 사역의 형태는 존 웨슬리의 순회 사역과 비슷한데, 열매는 그렇지 못한 상황이 답답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각각의 빈민가에 말씀이 충분히 전해진 후, 언젠가 일시에 성령님께서 부흥을 주실 것에 대한 소망이 임했습니다.

사실 웨슬리 목사님 시절의 영국인들이나 예수님 시절의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성경, 진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이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의 문맹 힌두교인들, 무슬림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화 전도 책자와 성경 애니메이션, 그리고 짧은 설교 등으로 죽도록 심고 있는 게 바로 그 전이해, 부흥의 토대인 것이지요. 바울 사도께서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15)’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저희는 주 예수님도, 성령님이 아닙니다. 다만 오실 분을 위해 외치는 광야의 소리, 슬럼의 소리입니다. 저희는 겨우 물로 세례를 줄 뿐이지만, 저희 뒤에 오시는 분은 너무나 크셔서, 우리는 그 신발끈도 묶어드릴 자격이 없습니다. 다만 저희는 오실 그분의 길을 예비하며 (만화) 복음을 들고 산을 넘는 이들입니다. 어깨를 짓누르는 빔프로젝터와 스피커 세트, 그리고 기타와 전도팩을 들고 땅끝 – 슬럼의 가장 깊숙한 곳들 – 까지 기꺼이 가는 이들입니다. 그 정신으로 살아가려 합니다. 비록 생전에 열매를 보지 못하더라도, 지치지 않으려 합니다.

당장 눈앞에 구하고 싶은 이들이 있는데 여력이 닿지 않습니다. 가능하다면 제이스리를 좋은 기독 시설 같은데 아이를 넣어주고 싶은데, 그게 꼭 그 아이(법적으로는 성인이 다 되어가는)를 위하는 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어찌 되었든 가족과 지인들 옆에서 사는 게 더 행복할 수도 있지요. 마찬가지로 만나는 아이들마다 매일 맛있는 것을 배부르게 먹이고, 좋은 학교에 보내고, 한국도 미국도 보내주고 싶지만, 이 역시 절제해야 할 정서의 낭비(오지랖)입니다. 일관성을 지키지 못하는 관대함처럼 사역에 해를 끼치는 것은 없으니까요.

▲ 사진 : 원정하 제공

‘안타까움’이라는 정서는 아껴야 합니다. 이것도 무한한 게 아니라, 자동차의 휘발유처럼 자주 소진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정된 정서가 ‘저 아이들에게 모두 아이스크림을 먹이지 못해 슬프다.’ 같은 식으로 낭비되다 보면, 나중에는 우울증에 걸리거나 실망과 냉소의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저는 차라리 “모든 어린이들에게 최소한 한 권의 만화전도책자가 주어졌으면…”, “모든 전도자의 손에 만화 전도책자가 원 없이 주어졌으면…”, “모든 인도 아이들이 유튜브에서 최소한 한 번은 힌디어로 된 주일학교 프로그램(히즈쇼 등)을 접할 수 있었으면…” 하는 안타까움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의 기회가 없음에 대한 안타까움은, 오직 성령님과 우리만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늘 우리 주변에 있지만, 복음의 기회는 늘 있지 않습니다.

장학사역도, 국제교류프로그램도, 스포츠 사역도 하고 있지만, 그 모든 사역은 결국 ‘때’를 얻어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해야 합니다. 저에게 주어진 최우선의 사역은 복음 전파입니다.

소방관이 불난 집 아기의 성품을 걱정하거나, 의사가 중환자의 성적을 걱정하는 게 당장 필요한 일이 아니듯, 저는 이들의 지옥행을 막는 데 먼저 최선을 다해야 할 목사, 선교사입니다. 의료사역도, 빈민 식당과 고아원, 난민캠프 사역도 결국 ‘만화전도책자와 기드온 성경 공급의 기회’가 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이 복음의 사역으로 인해 각 사람의 마음에, 그리고 각 마을에, 각 나라들에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임할 것입니다. 그날에 제이스리의 입은 복음을 명료하게 읽을 것이고, 뻔뻔한 얼굴로 속이고 구걸하던 아이들은 자기를 안아주시는 예수님께 달려갈 것입니다. 강간범과 창녀들도 마음의 변화를 입어, 눈을 들어 그들의 창조주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비로소 철없는 선교사의 얼굴에는 웃음이 돌아오고, 인도는 소망의 땅이 되겠지요.

그 날이 오기까지 달려가겠습니다. 그때까지 피곤치 아니하여, 거두는 축복을 누리도록 기도해 주세요. 그리고, 그래도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은, ‘크리슈나 슬럼’의 소녀, ‘제이스리’를 위해 짧게라도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복음기도신문]

원정하 | 기독교 대한감리회 소속 목사. 인도 선교사. 블로그 [원정하 목사 이야기]를 통해 복음의 진리를 전하며 열방을 섬기는 다양한 현장을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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