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이 있습니까(4·끝)
모든 소망을 잃은 탕자가 거지꼴로 돌아왔다. 회개의 눈물을 쏟으며 품꾼의 하나로 받아들여주실까 조바심하며 찾아왔다. 염치없지만 끊어지지 않는 목숨 때문에 집에 돌아온 순간, 벗은 발로 뛰쳐나오는 아버지를 만났다. 분명 집 떠날 때 작별했던 그 아버지였다.
그러나 탕자에게 그 분은 이전에 그가 알던 아버지가 아니었다. 십자가를 통과하고 부르는 아버지. 더 이상 교리적으로 알고 지식적으로 동의하는 그런 아버지가 아니다.
적당히 타협하고 주저앉던 야곱이 다시 벧엘로 올라갔다. 아마도 그 야곱이 하나님을 예배했다면 부를 찬송과 고백은 이랬을 것이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주님 이름을 부를 염치도 없지만 주님 품으로 돌아갑니다. 벧엘로 다시 돌아갑니다.”
완전한 절망을 맛본 그 자리에서, 모든 의지가 산산조각 난 그 때에 고개를 들고 주님을 바라본다. 그러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주님을 보게 된다.
주님 이름을 부를 염치도 없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참여하려면 완전한 죽음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변명도 미련도 자존심도 내려놓는, 문자 그대로 죽음의 자리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덧없는 세상의 수치를 보게 될 것이다.
십자가의 자리는 이처럼 여전히 내 자아에 끈적끈적하게 붙어있는 수치를 보게 되는 곳이다. 내가 얼마나 반역의 자리에 서 있는 자였는가. 자기 의에 똘똘 뭉쳤던 내 존재가 얼마나 소망이 없는 자인지 존재의 절망을 깨닫게 되는 자리인 것이다.
자아의 수건이 벗겨지고 주님 앞에 나아간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죽음을 통과하고 나면 비로소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과 부활의 승리의 십자가를 경험하게 된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을 믿는 믿음의 삶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 때부터 우리가 보지 못했던 우리의 구원자, 창조자, 피난처 되신 주님을 보게 된다.
십자가의 자리, 사랑과 부활의 자리
주님을 알아가기 시작하면 절망 앞에 선 나의 실상이 십자가에서 종결지어진다.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삶이 시작된다. 주님이 오직 나의 마지막 소망이 되기 때문이다. 절망의 터에서 주님을 만난 사람, 부활의 주님으로 사는 사람은 시편 기자와 같은 고백을 토해낸다.
“주의 은혜를 위하여 나를 기억하소서. 주께서 세우신 언약에 기초하여 나를 붙드소서. 그것밖에는 붙들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부활을 안겨주소서.”
주님의 은혜밖에 없다. 주님만이 정말 우리에게 완전한 소망이 되신다. 절망 가운데 빠져있는 이 세상에 교회가, 우리가 산 소망을 가진 증인이 되어 복음의 실체를 드러낼 때가 되었다.
복음만이 소망인 사람은 흥정하지 않는다. 생명을 걸 수밖에 없으며, 나를 불쌍히 여겨주실 주님을 의뢰할 수밖에 없다. 세상의 어떤 소리에도 굴하지 않는다. 주님이 내게 마지막 소망이라면 주위 눈치를 살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젖먹이 아이가 엄마 손을 떠나면 죽는 것처럼 주님만 남은 자는 주님 떠나면 죽는 줄 안다.
모든 상황 앞에서 주님을 찾는다. 그 주님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산 소망이 되어주셨다.(2014.4) [GNPNEWS]
<순회선교단 대표>메시지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