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안에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이아침 칼럼]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 현승혁

성령께서 함께하셔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면 희망을 갖게 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없다면 절망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마음에 실제로 있는지 선명하게 보셔야 합니다. 만일 있다면 겸손하게 더 주님을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소망하는 기쁨을 더욱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마음에 없다면 애통한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눅 17:20)

바리새인들의 질문이니 질문 자체가 잘못됐을 것이라고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악한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 질문이 왜 악한 질문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보셔야 합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시기’를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때’를 이야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대답하십니다. 

너희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때를 물었습니다. 이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것이라는 전제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갖고 있는 그 전제를 깨뜨리십니다. 바리새인이 이해하고 있고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그 생각을 깨뜨리십니다.

우리는 믿음과 거룩, 거듭남과 성령을 말할 때 자기 확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반을 두지 않은 자기 확신일 때가 많습니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자기 확신은 결국 망합니다. 천국의 도래 시기에 대한 바리새인의 질문은 악한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악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세미나와 교육 프로그램이 없습니다. 별도의 성경 공부도 없습니다. 유일하게 고수하고 있는 프로그램은 ‘그리스도의 몸 교회 세미나’ 하나밖에 없습니다. 교회 세미나를 통해 신앙의 연륜이 깊은 사람조차도 근거 없는 자기 확신이 많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교회 세미나에서는 네 가지를 묻고 토론하면서 교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봅니다. 

첫째, ‘내가 경험한 교회’를 묻습니다. 부정적인 관점의 이야기는 주로 상처받은 이야기, 나에게 아픔을 줬던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긍정적인 관점에서는 좋은 추억들을 이야기합니다. 크리스마스 이야기, 사랑받았던 이야기를 주로 나눕니다. 

둘째, ‘내가 원하는 교회’를 적어보라고 합니다. 대부분 자기 상처를 기반으로 서술합니다. 내가 경험한 것을 토대로 이야기하고 내가 좋았던 것을 발전시키는 쪽으로 서술합니다. 

셋째, 내가 생각할 때 예수님이라면 어떤 교회를 원할까? 이것을 토론하게 합니다. 예수님이라면, 하는 전제가 있으니 의견이 조금 수정되고 앞에 두 토론 내용보다는 진일보하게 됩니다. 

넷째,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는 무엇일까? 네 번째 토론에서 깜짝 놀랍니다. 자신이 얼마나 근거 없는 자기 확신을 갖고 교회를 생각하고 있었는지, 또 교회에 바라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세미나 

빌립이 예수님을 만나 인생이 바뀝니다(요 1: 43-51).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 모세5경에 나오는 선지자 메시아를 만났으니 와보라고 합니다. 나다나엘은 친구의 강권으로 따라가기는 하는데,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보시고,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부터 그를 알았다고 하십니다. 나다나엘은 직접 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어떻게 자기를 아시느냐며 놀라 반문합니다.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에 있다’는 말씀에는 특별한 뜻이 있습니다. 사회문화적 배경을 알면 도움이 됩니다. 유대사회에서 무화과나무는 생명을 뜻합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서는 주로 토라(율법)를 토의하고 이야기합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묵상할 때에도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로 갑니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경건을 훈련하고, 마음 중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는 시간을 보내신 것을 예수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또 나다나엘의 속에 간사(奸詐)함이 없다고 하십니다. ‘간’ 자는 ‘범할 간(M)’, 사’ 자는 ‘속일 사(詐)’ 자입니다. 속여서 범했다는 뜻으로 로마서 1장 29절에 똑같은 단어가 나오는데 우리말로는 ‘사기’로 번역됐습니다. 사기와 간사는 같은 말입니다. 근본적으로 진리를 뒤바꾸는 행위입니다. 탐심이 있어서 진리를 외면하고 뒤바꿔버리는 마음이 간사함입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의 마음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부터 반듯했습니다. 살살 거짓말하는 우리를 봐야 합니다. 유머에 거짓말이 많은 것도 경계하셔야 합니다. 간사함을 경계하셔야 합니다. 

그런 나다나엘에게도 한 번도 잘못됐다고 생각해보지 않은 ‘자기 확신’이 있었습니다.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나다나엘에게 형성된 세계관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은 이렇게 흘러가, 세상은 이렇게 살아야 해, 이것이 성공이고 이것이 유익이고 이것이 가치 있는 삶이야!’ 이런 세계관이 나다나엘에게도 있었습니다. 바로 나사렛에서는 선한 것이 나오지 못한다는 생각입니다.

당시 일반 평민은 예루살렘에서 살지 못합니다. 제사장 그룹과 같은 주류세력이 삽니다. 평민은 변방에 삽니다. 이방인과 세리, 나병 환자들은 또 다른 곳에서 살아야 합니다. 계급사회라는 말입니다. 때문에 나다나엘은 변방에서 메시아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자기 확신을 경계해야 합니다. 믿음의 열심 있는 분들의 자기 확신은 아주 무섭습니다. 성경에 기초하지 않은 자기 확신들은 주변을 망치고 자신도 해롭게 합니다. 나다나엘에게는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날 수 없다는 자기 확신이 있었고, 바리새인은 천국에 대한 자기 확신이 있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주님을 만난 뒤 자기 확신이 깨집니다. 그때 나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세상은 이렇게 살아야 해, 이게 성공이야’하는 그 세계관을 주님이 깨뜨리신 것입니다.

세계관을 깨뜨리시는 주님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기대했습니다. 어려운 재정문제가 생겨서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을 부릅니다. 부른 뒤 우리는 변화를 원합니다. 어떤 변화일까요? 돈이 채워지는 변화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패턴입니다. 건강에 문제가 생겼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해지려고 주님을 부릅니다.

예수님을 부르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면, 간절함의 이유가 무엇인지 스스로 정직하게 물어봐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 있어야 유리하고, 그것 있어야 행복하다’고 끊임없이 이 땅에서의 변화를 꾀하지만, 주님께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책이 많습니다. 쪽수도 많고 어려운 책도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렵지 않습니다. 나라의 세 가지 요소는 국민, 영토, 주권입니다. 주권은 통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다스림을 받는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스림을 받는 백성입니다. 백성이 있어야 하나님의 뜻이 스며듭니다.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신 말씀은 다스리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시편 95편부터 시편 100편까지를 신정(神政)시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97편은 하나님의 나라가 특히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시 97:1)

일제식민시대,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가 있습니다. 일제로부터 해방되면 산천초목이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시편 97편도 그렇게 말합니다. 주님이 다스리면 땅이 즐거워하고 허다한 섬이 기뻐한다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때문에 기뻐하지 않을 곳이 없다고 합니다. 방방곡곡 기뻐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기 때문에 모든 곳이 다 기쁩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 일제 치하 때처럼 억압당하고 핍박 받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경험한다면 우리 마음에는 평강이 있습니다. 건강이 여의치 않고, 돈 때문에 너무 힘들어도, 그때 주님의 다스림을 경험한다면 마음에 평강이 깃듭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빨리 그 신앙을 되찾으셔야 합니다.

SNS에 한 선교사님의 어머니 암 투병 사진이 을라왔습니다. 바싹 마른 얼굴로 웃고 계셨습니다. 참 아름다웠습니다. 투병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우실 텐데, 링거를 맞은 채 환하게 웃고 계셨습니다. 어렵고 힘든 투병 과정에서도 손을 들고 흔들고 계셨는데 선교사님이 물어보시니 ‘주님께서 오셨다’고 하셨답니다. 10분쯤 그렇게 손을 흔들다가 기력을 상실하고 혼절하셨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너무 감동이 되어서 제가 짧게 댓글로 한 마디를 썼습니다. ‘네, 주님 계시면 됩니다!’

감동으로만 듣지 말고, 삶에서 주님이 다스리시면 산들도 땅들도 섬들도 기뻐하는 것, 주님이 다스리면 재정이 어렵고 건강이 어려워도 마음은 주님으로 평강을 누린다는 것, 그 신앙을 빨리 되찾기를 축복합니다.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렀고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 (시 97:2) 

보좌는 왕권을 말합니다. 하나님 통치의 기초는 의와 공평입니다. 그의 앞에 구름과 흑암이 둘렀습니다. 곧 비밀이라는 뜻입니다. 의와 공평이 통치의 기초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의’에 대한 기독교 서적도 방대한데 모두 어렵습니다. ‘의’를 쉽게 설명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토브’입니다. 더 쉽게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저를 보고 ‘아침 목사야, 네가 마음에 든단다’ 하시는 것이 ‘의’입니다. 의로 다스리신다는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 마음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네가 마음에 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까닭입니다. 제가 설교 준비하느라고 이번 일주일도 열심히 말씀을 묵상한 것을 보고, 그래서 내 마음이 좋구나,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싫어하시는 것은 외식, 위선입니다. 외식이란, 입술로는 경건을 이야기 하지만 마음엔 문제가 가득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것입니다. 제 마음에도 설교가 아니라 주님이 가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중심을 보고 마음에 드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을 보고 주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마음이 다른 곳에 있으면 주님의 다스림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외식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도 임하지 않게 됩니다. 마음이 주님께 가 있을 때만 하나님의 통치를 받습니다. ‘나를 따르라’ 하셨을 때 마음이 하나님께 가 있을 때만 실제로 따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은 마음이 하나님께 가 있는 우리 중심을 보시고 좋아하시는 하나님이 실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에게 ‘공평’은 너무 어려웠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판단이 잘 되고 옳고 그름이 잘 보이는지, 그것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릴 때 우리가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면 모두 공평하게 여김 받는다는 말씀일 텐데, 저는 이것이 마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김 집사를 부를 때 ‘교회 오빠’라고 부릅니다. 잘 생기고 키도 크고 반듯하고 점잖고 피부도 좋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를 부를 때는 ‘교회 산적’ 스타일이라고 말하면 공평하게 느껴집니까? 왜 또 누구는 돈을 잘 벌고 누구는 돈을 못 법니까? 왜 누구의 자녀는 명문 대학 가는데 우리 집 아이들은 좋은 대학 못 갑니까? 왜 박 집사는 몇 년째 주차 봉사사역을 하는데, 김 집사는 대표기도만 합니까? 이것이 공평합니까? 공평하지 않게 보입니다.

그때까지 주님께서 다루어가십니다. 이것이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다스림이 무엇인지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의로운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우리를 통해 일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이것은 공평하지 않아, 저분이 저렇게 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해’ 이렇게 여기면, 하나님의 일하심이 중단됩니다. 다스림이 임하지 못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공평함을 경험할 때까지 저를 다루어가십니다. 주차 사역을 하든 대표 기도를 하든 공평하다는 것이 인정될 때 주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빈부의 격차와 관계없이 똑같이 대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영향력과 관계없이 똑같이 대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무조건 균등하게 대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내 안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인정합니다. 주님! 하나님을 깊이 신뢰합니다. 주님!” 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를 통해 주님이 역사하시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 속에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 속에 주님이 계실 때 주님의 다스림을 받을 수 있습니다. 따르라 하실 때 따라갈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 따라갑니까? 주님께서 가신 길 따라갑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하늘 보좌까지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원합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무엇을 하기 위해 갈까요?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주님을 온전히 기뻐하기 위해 갑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우리는 그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의 공평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져 하나님 뜻이 흘러가는 광야의 시간이 곧 세상의 시간입니다. 바리새인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 있으면 행복할 것 같고, 저것 있으면 행복할 것 같고 해방이 되면 다 될 것 같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으로부터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보이기 시작하면 많은 불만과 많은 억울함과 많은 바람들이 주님 안에서 녹아내리고 새롭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이제 주님으로 삽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주님과 함께 죽습니다. 그때 주님의 공평과 의가 인정되어 주님께서 우리를 사용하는 선순환이 이루어집니다.

의로운 사람은 주님의 공평을  

자기 확신에 대해 꼭 살펴보셔야 합니다. 믿음의 근거가 무엇인지 살펴보셔야 합니다. 교회 열심히 출석하는 것을 근거 삼지 말고, 말씀으로 근거 삼아야 합니다. 자기 확신을 버려야 주님 따라갈 수 있는 기초가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폴 워셔 목사님이 “휴대폰 30분은 주님을 근심하게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이 바닥으로 떨어지는데 30분이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주일, 2주일은요? 우리 신앙이 온전하다고 확신하면 큰일 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은 삶은 날마다 주님을 상고합니다. 오늘! 지금! 주님 앞에 있습니다.

우리 교회 전도사님이 군대에 입대하기 전, 제가 이야기한 것이 있습니다. 남들은 공평하지 않다고 주장할 때, 상관하지 말고 화장실 청소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휴가 나와서 이런 말을 합니다. “제대하면 화장실 청소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요새 군대에서는 동기끼리 같은 내무반을 쓴다고 합니다. 나이는 가장 어린데 부대 안에서는 영향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화장실을 청소해서 그렇습니다. 마음을 쓰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의 세계관으로 바라보며 불공평하다고 여기지 마시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우기지 마시고, 주님께서 공평하다고 말씀하시는 의미가 깨달아져서 주님의 통치함을 받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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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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