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우시는 하나님(2)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23-24)”
총체적 복음 앞에 서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원대하고 웅장한 계획을 보았습니다. 2000년 전 십자가 복음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깨달았을 때, 복음은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신비하고 놀라운 능력이었습니다.
죄 곧 나, 나 곧 죄라는 끊을 수 없던 죄와의 운명을 끝내고 결코 불가능했던 의에 이르는 길, 이 일을 하나님 친히 이루셨습니다. 사탄의 권세에 붙잡혀 종노릇하던 비천한 존재, 아무리 애를 써도 헤어날 수 없던 사망의 몸에서 구원을 얻은 것은 하늘의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기억해 주셨기에 가능했습니다.
거룩하신 주님이 나를 기억하십니다. 어떤 누군가가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주는 것만으로도 감동이 됩니다. 그런데 소망 없이 영혼의 빛을 잃고 지옥으로 떨어져야 할 우리를 기억하사 아들을 내어 주셨다니!
나도 나를 지워버리고 싶은 그때, 주님이 우리를 기억해 주셨습니다. 전적인 은혜의 복음 앞에 뼈 속 깊은 감사를 올려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행위로도, 율법으로도, 선행으로도 안 됩니다. 오직 전적인 은혜여야만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을만한 근거가 1% 정도는 있어야할까요?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마저도 채울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온전한 믿음의 근거가 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는 믿음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복음이 이토록 완전한 것이 사실인데 하나님의 교회가 이 복음을 버린다면…!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결론돼야 합니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생명의 진리가 변질되고 뒤섞여 버린다면 더 이상 다른 소망이 없습니다.
중세 가톨릭은 어디서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까. 성경을 빼앗겼을 때부터입니다. 신부들은 주기도문, 사도신경조차 외우지 못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마틴 루터를 통해 성경의 진리를 들고 외치게 하셨습니다. 알고도 외치지 않은 것을 그의 양심은 허락지 않았습니다. 골리앗 앞에 선 다윗처럼 말입니다.
이 일로 인해 세상은 빛을 보았고, 어둠이 물러가는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생명을 잃고 죽어가던 자들이 말씀의 빛 앞에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마침내 개혁자들은 5대 신앙강령을 세웠습니다. 오직 말씀!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의 소명이 임하고 진리 편에 선 자가 되면 그 중심에 불이 붙어 결코 이전처럼 평범하게 살 수 없습니다.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존재의 목마름이 찾아오면 복음 앞에 반응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인생은 대변혁을 맞게 됩니다.
다윗은 평범한 소년으로 들판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골리앗을 상대하러 나가 싸우고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의 모습을 한 컷의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우리는 현재 무엇 앞에 서 있으며 어떤 모습입니까.
떠들기는 거창하게 떠드나 병든 자아로부터 발목을 빼지 않고 말만 흉내 내진 않습니까. 이런 꼴로 복음을 노래하면 세상에게도, 귀신에게도 비웃음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폼은 잡고 있는데 머리카락 잘린 삼손처럼, 능력을 나타낼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은 우리 편에 서 계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붙들어 사용하신 다윗은 이처럼 고백했습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막막한 현실, 보이는 상황이 아무리 거대해 보인다고 해도, 더 이상 숨죽이고 있을 수 없습니다. 다시 복음 앞에, 오직 성경으로! 외치며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교회를 회복시키고 변화시킬 유일한 통로는, 전부를 걸어 그의 이름을 의지하여 주님께로 나아가는 길 뿐입니다. <계속>
<순회선교단 대표> 메시지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