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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선 칼럼] 부르신 그 길에서 내 전부를 드리는 삶

ⓒ 안호성

공군 목사 이야기(7)

1. 목자(牧者)는 양을 위하여 죽는다

목사는 자기가 말씀을 깨닫는 것일까? 아니면 주님이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것일까? 하루는 요한복음 10장 11-15절 말씀이 눈에 확 들어왔다.

(요 10:11, 개역)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0:12, 개역)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요 10:13, 개역)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요 10:14, 개역)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요 10:15, 개역)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 10:11, NKJV) “I am the good shepherd. The good shepherd gives His life for the sheep.
(요 10:12, NKJV) “But a hireling, he who is not the shepherd, one who does not own the sheep, sees the wolf coming and leaves the sheep and flees; and the wolf catches the sheep and scatters them.
(요 10:13, NKJV) “The hireling flees because he is a hireling and does not care about the sheep.
(요 10:14, NKJV) “I am the good shepherd; and I know My sheep, and am known by My own.
(요 10:15, NKJV) “As the Father knows Me, even so I know the Father; and I lay down My life for the sheep.

11.我是好牧人,好牧人为羊舍命。12.若是雇工,不是牧人,羊也不是他自己的,他看见狼来,就撇下羊逃走。狼抓住羊,赶散了羊群。13.雇工逃走,因为他是雇工,并不顾念羊。14.我是好牧人。我认识我的羊,我的羊也认识我。15.正如父认识我,我也认识父一样。并且我为羊舍命。

나는 이 말씀을 읽고 곰곰이 생각했다. 나는 현재 군목인데 이 말씀대로라면 비행단 교인들을 위해서 죽을 수 있나? 답은 ‘죽을 수 없다’ 였다. 왜 죽을 수 없나? 죽는 것이 두려워서 이기도 하지만 죽을 수 있을 만큼 정(情)이 안 들었다. 이제 겨우 2년 째 사귀고 있는데 이들을 위해 죽을 수 있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난 이것을 주일 오전 예배 때에 설교했다.

공군의 신자들도 “아니 목사님, 우리를 위하여 죽을 수 없다니요? 그럴 수 있습니까?” 라고 하지 않았다. 당연히 안 죽을 줄 아는 것 같았다. 나는 혼자서 꽤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설교한 것인데 신자들은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다.

그런데 얼마 후에 사고가 하나 터졌다. 부서 회식에 참여했던 준위 김ㅇㅇ 집사님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집사님은 예천읍 병원으로 옮겨졌는데 상태가 너무 안 좋아 작은 병원에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 대구의 군병원으로 옮겨갔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그 정도에서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정도로 나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대구로 따라갔다. 그런데 군병원에서도 감당할 수 없어 경북대 병원 중환자실로 옮겼다. 나는 다시 따라갔다. 한 밤중에 교회 집사님들은 내게 예천으로 돌아가자고 권유했다. 나는 잠시 생각한 후에 남기로 했다. 그 때의 생각은 교인을 위해 죽을 수 없지만 교인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목사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은 병원 중환자실 옆에 남는 것이었다. 나는 3일 동안 병원 중환자실 옆에서 김 집사님의 가족들과 함께 거의 밤을 새우며 지냈다. 고통스러웠다. 하루하루 ‘그만 돌아가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끝까지 있었다. 집사님 생명에 지장이 없는 정도가 되었다. 나는 부대 관사로 돌아왔다.

중국 선교 현장에서 깨닫다

군목으로서 이 정도 하면 된 것일까? 그러나 만족할 수 없었다. 이 질문은 내가 중국으로 선교를 가서 2018년이 되어서야 대답할 수 있었다. 나는 2000년에 중국에 들어가 18년의 세월을 보냈다. 30대에 들어가서 50대가 되어 나온 것이다. 중국인 지도자들이 내게 고맙다고 하면서 당신은 청춘을 중국 기독교를 위해 바쳤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정말 그랬다. 검은 머리로 들어와 나는 흰 머리가 되었다. 내가 큰 선교를 하지는 못했지만 중국 지도자를 양성하는 일은 했다. 그리고 그 지도자들을 순교에 이르도록 가르쳤다. 즉 절대로 주님의 말씀을 부인하거나 배반하지 않는 사람으로 양성한 것이다. 제자들을 그렇게 가르치려면 우선 내 마음이 그러해야 했다. 그러니까 나는 순교를 각오한다고 막연하게나마 늘 생각했다. 나는 두려움에 떠는 가냘픈 마음이 있기는 하지만 교활하게 계산하지는 않은듯 하다. 왜냐하면 교활할 만큼 지능이 따라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잘 아니까 교활 하려고도 하지 않고 머리 굴릴 생각도 안 한다.

2019년 2월 28일 아침 8시 30분, 중국 안전부에서 내 휴대폰에 전화를 했다. 그리고 “너의 문건(文件)에 대해서는 마지막으로 통지한다.”고 두 번 경고한 후에 끊었다. 몸에서 더운 피가 다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두려움은 나의 온 몸을 차갑게 만들었다. 중국 안전부가 내게 전화를 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나는 2018년 1월 18일, 중국 안전부에 의해 선교활동으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나는 한국에서도 중국을 향해 계속 선교하고 특히 인터넷에 중국 선교하는 전략 등을 올렸다. 중국 선교를 꿈꾸는 선교사 후보생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중국 안전부가 모두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수위가 올라가자 그들은 나에게 마지막 경고를 한 것이다. 두려움이 한참동안 나를 잡았다. 그런데 마음속에서 슬슬 오기(傲氣)가 났다. 나는 대한민국의 군인이다. 뭐 제대한 지 이미 20년이 되었지만 사실 내 마음 속에는 군인 기질이 여전히 있다. 싸운다! 나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결심했다. 중국 공산당원이 8500만 명 정도 된다. 사도 바울이 로마제국 전체와 영적인 싸움을 하듯이 나도 중국 공산당 전체와 영적인 싸움을 할 각오를 했다. 이 마음이 요한복음 10장의 말씀에 대한 응답일 지는 좀 더 두고 보아야 하겠다. 그러나 나는 1995년 예천 비행단에서 읽었던 요한복음 10장에 대해 지금은 대답을 할 수 있다. 목사는 주님이 맡기신 신자를 위해 죽는다. 의무로라도 죽는다. 그것이 목사다.

2. 목사가 죽어야 신자가 산다

내가 어느 날 주일에 예천 비행단에서 예배를 마친 후였다. 어느 병사가 내게 드릴 말씀이 있다고 했다. 약간의 교회 행정 일을 마치고 그 병사와 마주했다. 나는 이 병사가 상담할 것이 있다고 예상했다. 그래서 무슨 어려움이 있는가? 들으려고 했다. 그 병사는 내게 한 마디를 했다. “목사님 설교는 영적이지 않습니다.”

무방비로 있다가 총 한방 맞은 기분이었다. ‘아니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순간 화도 나고 기분이 몹시 나빴다. 그러나 이 일은 계급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었다. 신자가 목사의 설교를 듣고 영적이지 않다는데 ‘아냐, 나의 설교는 영적이야.’ 라고 말할 것인가? “알겠다. 영적인 설교가 되도록 노력하마.” 하고 그 병사를 돌려보냈다.

그 병사의 말은 계속 나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나는 그동안 설교를 잘 한다는 소리를 들어왔다. 전도사 때는 설교가 ‘샤프’(sharp) 하다는 소리도 들었다. 나는 전도사 시절 상당히 정열적이어서 어느 금요일 밤에는 청년들 성경공부 때에 강의를 6시간 동안 계속 한 적도 있었다. 그 청년들은 지금 대개 장로, 전도사, 권사가 되어 여전히 연락하고 지낸다. 그런데 그런 나를 보고 설교가 영적이지 않다니. 참 생각할수록 기분 나쁜 소리였다. 나는 그 병사 뒷조사를 했다. 그랬더니 이단(異端)에 속해 있었다. ‘그럼 그렇지. 그 병사 놈의 말을 무시하자.’ 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가 영적이지 않다는 소리에 대해서는 자꾸 신경이 쓰였다. 나는 생각해보았다. 나의 설교는 ‘잘한다.’ ‘날카롭다.’ ‘정열적이다.’ 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은혜 받았습니다.’ 하는 말도 들어보기는 했지만 정말 은혜 받았다고 여겨지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돌아봄 이후, 나는 나의 설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정말 영적인 설교를 하고 있는가? 이 설교를 듣고 사람의 심령이 변화되고 있는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나는 나에게 ‘목사님 설교는 영적이지 않아요.’라고 말해준 이단 병사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했다. 아마도 일반 신자들이나 병사들은 군목인 나에게 그런 말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친구는 이단(異端)이니까 겁 없이 나에게 그 말을 했던 것이다. 설교가 영적이지 않은 목사님들은 이단이랑 한 번 이야기 해보기를 권한다. 아주 기분 나쁜 소리를 듣고 영적인 설교를 하는 목사로 변할 수 있다.

목사가 살만하면 신자가 죽는다

내가 정말 영적으로 변한 때가 있었다. 지금은 그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공군에서 제대를 몇 달 앞두고 나는 거의 슬픔에 빠져있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웃지만 혼자 있으면 거의 울면서 지냈다. 딱 죽고 싶었다. 하고 싶은 일을 못할 때, 아니 해야만 할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 ‘나’라는 사람의 의미는 없었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을 경험했다. 나는 그때 알았다. 사람이 죽을 때에 머릿속이 하얘진다.

이 하얘짐은 제대를 한 후의 경험이고 제대를 앞두고 몇 달은 앞서 말한 것처럼 혼자 있으면 울었는데 이때에 준비하여 하는 설교들이 정말 영적이었다. 마음이 통하는 군목들이 내가 제대하게 되니까 마지막으로 비행단에 불러서 설교하게 했다. 나는 불을 뿜듯이 설교했다. 어떤 교인들은 예배를 마친 후에도 돌아가지 않고 울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병원 위문을 가서 예배를 했을 때에 옆 침상에 있던 사람들마저 이상한 영적인 기운에 사로잡히는 일들이 있었다. 그 때에 내가 깨달은 것이 있었다. ‘목사가 죽어야 신자가 산다.’ 였다. 목사가 살만하다고 하면 신자가 죽어간다. 나의 스승이신 최창업 목사님은 목회가 하루 8시간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7시간은 어둡고 칙칙한 곳에 있는 것이고 1시간 햇빛아래 있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3. 군인정신

이런 일이 육군에서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공군에서는 공군의 어떤 행사 때문에 비행단의 많은 병사들이 모여 단장님 훈시를 받을 때가 있었다. 그런데 조금 길게 서있는 동안 어떤 병사가 더위를 먹은 것인지 쓰러졌다. 그 병사를 부축하여 의무실로 옮겼다. 그런데 바로 내 앞에 있던 병사가 더위로 쓰러지는 것도 아닌데 쉬고 싶어서 거짓으로 더위 먹은 척하려다가 나한테 바로 딱 걸렸다. 이럴 때 나는 목사가 아니다. 군종장교에서 군종이란 단어는 거의 안 보이고 장교가 강조된다.

군산 비행단에 있을 때에 주변에 소규모의 방공포 부대가 있었다. 방공포 소속 군목이 오기 어려운 지역이라 비행단 군목이 그 지역까지 관할하여 주일에 예배를 드렸다. 그러니까 오전 예배를 비행단에서 드리고 식사 후에 그 부대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돌아왔다. 그 부대의 군종병이 아주 신실했다. 사실 오후에 예배를 드릴 때에 축 처질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 군종병이 노래를 하면 은근히 힘이 났다. 나는 그것이 그 군종병의 경건함 때문인 것을 안다. 그래서 그 친구를 좋아했다. 그런데 한 번은 이야기를 하다가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말이 나왔다. 나는 병사들에게 솔직히 말해보라고 했다. 나는 병사들의 솔직한 마음을 알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병사가 ‘생각해보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전쟁이 났는데 군인이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했다. 무슨 말이냐면 싸울 것인지 기회를 보아 도망갈 것인지 생각해보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비록 비전투요원인 군목이지만 이런 대답은 정말 화가 났다. 그래서 내가 그랬다. ‘솔직히 말해보라고 했으니까 다른 말은 안하겠지만 군인이 전쟁이 났을 때에 생각해보겠습니다. 라는 대답이 나오면 안 된다. 싸우는 거다. 적이 쳐들어왔으면 물리치는 것이다. 그것이 군인이다.’ 라고 말했다.

그러니 더위 먹은 척 쓰러지는 그 병사는 나한테 잘못 걸린 것이다. 나는 그 병사를 처음에는 아주 괘씸하게 여겨서 혼을 내려고 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약해졌다. 내 맘이 장교에서 군종장교로, 그리고 목사로 돌아왔다. 나는 그 병사를 군종실로 오게 하여 이것저것 이야기하고 돌려보냈다. 주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라는 말을 더했는데 그 병사가 주일에 예배에 참석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교육의 효과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 병사도 나의 말을 명령으로 받은 것 같고 그래서 예배에 참석했었던 것 같다.

4. 달란트 비유와 공군 사관학교

공군 목사로서 공군사관학교에서 생도에게 설교하고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은 영광이다. 왜냐하면 공군의 핵심인 장래 조종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장기 군목이 되지 못해서 아쉽게도 그 기회를 갖지 못했다. 공군 군목이 가장 힘써야 할 곳이 바로 이 공군사관학교와 교육사령부이다. 교육사령부에서는 매번 새로 들어오는 공군 병사들을 훈련시킨다. 비행단, 레이더 부대, 방공포 부대 등 각 근무처로 흩어지기 전에 군사 훈련을 시키는 곳이 교육사령부인데 나는 육군 3사관학교에서 기초 군사훈련 12주를 받고 공군 특기 훈련만 교육사령부에서 받았다. 그래서 실제 공군 군사훈련의 강도가 어떤지를 잘 모른다. 다만 특기 훈련을 받을 때에 연병장에서 훈련 받는 병사들을 보았을 뿐이다.

군목 장기를 꿈꾸던 나는 언제인가는 이런 곳을 다 거치면서 병사들을 복음화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군사관학교에서 어떤 행사가 있어서 육해공군 사관생도들이 다 모이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삼군사관생도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하게 되었는데 내가 그들에게 설교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나로서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공군사관생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도 중요한데 삼군사관생도들 가운데 기독교인 전체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기회이니 얼마나 좋은가?

몇 달란트의 사람인가?

나는 당시로서는 ‘단 한번뿐인 그 기회에 무엇을 전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많은 생각 끝에 정한 것이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이다. 이것은 나 자신의 삶에서도 큰 영향을 끼친 말씀이고 또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직업군인들의 의식에서도 꼭 필요한 말씀이라고 여긴다.

내가 중학생시절에는 나름 똑똑했다. 성적도 괜찮았다. 나의 어머니가 선생님을 만날 때에 촌지(寸志)를 드리니까 선생님이 서울대 갈 놈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지금도 그 선생님 성함을 기억한다. 뭐 돈 좀 받고 기분 좋은 소리 해 주시는 것도 그만한 값어치가 있을 수 있겠다. 다만 나의 가정은 부모가 시장에서 배추장사를 하면서 아주 어렵게 살았다. 그런데 선생님은 가정환경을 다 파악하고 있었을 텐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 촌지를 받고 싶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교사라면 가난한 집안에서 주는 촌지는 받지 않았을 것 같다.

그 이후 여러 가지 상황들이 발생하고 나는 예수님을 믿게 되면서 신학대학에 갔다. 그런데 가끔 길에서 중학교 때 동창들을 만났는데 함께 놀던 애들이 서울대, 연대, 고대, 성균관대 등등을 갔다고 했다. 나는 하루는 산에 올라가서 2시간을 울었다. 그리고 신학대학 그만두고 다시 공부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대학 1학년 봄에 보았던 군종장교시험에 합격했다는 통지가 왔다. 이것은 대학과 대학원까지 7년을 공부하고 군종장교로 임관하는 것이었다. 인생을 어떻게 가야 하나?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주님이 나를 불러주셨던 그 길을 가기로 최종 결정했다.

나는 그 때 나라는 사람이 몇 달란트의 사람인가를 생각했다. 중학교 때에 나는 5달란트의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대학생 때의 나는 세상 평가에서 볼 때에 1달란트의 사람이었다. 내가 그렇게 된 것에 대해서는 핑계 될 것이 많다. 그러나 여하튼 나는 1달란트의 사람으로 여겨지고 또 나 자신이 보아도 그러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비록 내가 1달란트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1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지 말자.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은 그 1달란트를 활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학부 때는 신학을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문학과 철학과 역사학을 공부했다. 실제 작곡도 하고 복음성가 대회도 나가고 연극 대본을 써서 연출도 하고 여러 가지를 했다. 대학을 졸업할 때에 학부 어떤 여자 애가 나보고 ‘나는 네가 기숙사 사는 줄 알았다.’고 한다. 맨날 체육복하고 교련복 입은 것만 보았다고 했다. 일반 옷도 입은 것 같은데 그렇게 말을 하니 눈물이 났다.

신학대학원에 가서는 교수 한 분이 박윤선 박사가 말하기를 ‘자투리 시간을 잘 이용하라.’고 했다고 한다. 나는 쉬는 시간에 화장실을 다녀오는 것 이외에는 남은 시간 몇 분(分)이라도 성경을 읽었다. 이것이 3년이 쌓이니까 마치 무공 고수가 되듯이 어느 정도 성경 실력이 붙는 것 같았다. 그리고 군목 8년을 하는 동안 5-6시간 정도 자는 것 외에는 부대 일과 책 읽는 것을 했다. 나는 1달란트 받은 사람으로 그 1달란트를 결코 땅에 묻어 두지 않은 사람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사관생도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재능이 얼마가 되었든 그것을 최선, 그리고 최대로 활용하는 사람이 되라고 했다. 그리고 군대 문화가 진급과 거의 동일시 될 정도로 묶여 있는데 기독교인은 하나님께서 어디까지 사용하시든 그 사용하시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고 감사하라고 했다. 진급에 있어서 동기들이 나중에는 결국 경쟁자가 되는데 진급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고 뜻을 하늘에 맡기고 정직하고 정당하게 말하고 행동하라고 했다.

감사의 조건

여기까지 내가 당시에 깨달은 것이고 후에 군인들에 대해서는 더 깨달은 것이 기독군인은 여하튼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공군은 더욱 그러하다. 왜냐하면 공군은 하늘이라는 3차원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육군이나 해군은 모두 2차원 평면의 사람들이다. 하늘을 비행한다는 것은 특권이다. 앞서 이야기 했지만 공군 조종사는 95년 당시 4억 5천만 원 정도의 돈을 들여 한 사람을 만들어 낸다. 똑똑하고 용기 있고 또 나라의 선택을 받아 하늘을 나는 것이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은혜까지 주셨다. 공군 기독교인은 최고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 주님께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공군의 사람들이 어디까지 쓰임을 받든 그 자체에 감사하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공군 목사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내가 공군에 한해서 말하지만 사실은 이 깨달음의 대상 범위는 모든 기독교인이다.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것이지만 신자는 이 말씀이 생활에 적용되어 정말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음을 깨닫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여하튼 진급이 안 되어 공군을 떠나게 된 나는, 당시에는 정말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그 시기까지 나를 공군의 목사로 사용하신 것이다. 그리고 내게는 다른 일을 맡기셨다. 내가 내 삶을 맘대로 하는 것이라면 나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주님이시다. 주인이신 그분이 나를 사용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결정하시고 인도하는 것은 언제나 나의 삶을 최고로 인도하심을 믿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선교사가 되었기 때문에 중국어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외국어를 하게 되니까 두 언어를 통해 문화를 비교하며 내가 상상하지도 못하던 깊은 영적인 세계에 이르렀다. 지성이 영성에 이르러 진리에 이르는 길을 본 것이다.

공군 기독교인들이여, 감사해라. 주님이 당신을 어디까지 사용하시든 그 사용하심에 감사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마라. 정직하고 정당하며 바른 말과 바른 행동으로 살아라. 그것이 군인에 맞는 정신이며 태도며 삶이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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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선 선교사 | GMS(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선교회) 소속으로 중국에서 사역 중 추방된 이후 인터넷을 활용한 중국 선교를 계속 감당하고 있으며 세계선교신학원에서 신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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