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은혜로 가능한 순종의 삶
“내가 건축하고자 하는 성전은 크니 우리 하나님은 모든 신들보다 크심이라 누가 능히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요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내가 누구이기에 어찌 능히 그를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요 그 앞에 분향하려 할 따름이니이다”(역대하 2장 5, 6절)
누가 감히 하나님의 일을 하겠는가? 어떤 인간이 크고 위대하신 그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지도 알지 못한 채 내 한 몫의 인생도 감당할 수 없어서 허둥대는 내가 어찌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엄청난 감격이나 대단한 충격도 그것이 반복되고 익숙해지면 어느 새 일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 복음 선포자로 10년, 20년 지나고 관록이 붙다보니 어느 새 첫 번째 메시지를 전할 때의 그 긴장과 감동이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나 내가 도대체 누군가? 나 하나도 감당하지 못해 위태롭게 살아가던 인생이 감히 이런 엄청난 복음을 믿고, 살고, 선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감동 없이 내가 주의 일을 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솔로몬. 그는 자신이 왕이 되려고 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확률로 보면 가장 불가능한 위치에 있던, 죄로 말미암은 출생의 배경을 가졌던 그가 왕이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으로 가능했던 것이었다.
우리 인생의 대부분은 우리가 선택한 것, 달음박질해서 얻은 것이 아니다. 국적, 혈통, 성, 운명 등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들은 대부분 주어진 것들이다.
여기 솔로몬은 그가 행하는 수많은 일 가운데 그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일이 바로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었다. 성전 건축은 단순히 집을 짓는 일이 아니다. 화려함이나 규모면에서 성전보다 더 나은 건축물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 솔로몬이 깨달은 것이 나타난다. 성전건축을 맡고 나서 받은 충격과 감동. ‘누가 감히 이 어마어마한 일을 할 수 있으리요.’ 경외심으로 일어난 두려움과 감격. ‘내가 건축하고자 하는 성전은 크니 우리 하나님은 모든 신들보다 크심이라.’
건물 자체의 어떠함이 아니라, 누구를 위한 집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모든 신 중에 뛰어난 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분, 그 완전하신 하나님의 집을 지으라는 사명. 솔로몬은 “도대체 내가 이 일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이 고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우리가 십자가복음을 받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이 사실은 맨 정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일이다. ‘하나님이 너를 이처럼 사랑하사 그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너 대신 잡았다.’라는 말이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받아들여진다면 우리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주의 일을 하다가도 이런 충격이 갑작스럽게 올 때 가 있다.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지?’
성전을 짓는다. 예배를 한다. 교회 봉사를 한다. 복음을 위해 수고한다. 우리가 흔히 하는 이 말을 정신 차리고 생각해보라. 유한한 인간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는 것 자체가 심장이 터질 충격이고 감동이 아니겠는가?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자가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입는다는 말. 이러한 감당 못할 은혜가 솔로몬에게 깨달음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 편에서는 왕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버러지 같은 죄인일 뿐이요, 지극히 미말에 처한 먼지같은 유한한 육체를 입은 인생밖에는 안 되는 제가 어떻게 거룩하신 영광의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겠습니까? 다만 분향할 따름이니이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013. 2)
<계속>
[GNPNEWS]
순회선교단 대표 녹취 메시지 지상 중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