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된 진리.
진리를 만난 사람은 진리 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고 물러서거나 무엇으로도 희석시킬 수가 없다. 진리가 아닌 것은, 아닌 것일 뿐이다. 불이 되어 타는 진리!
부인해서 없애거나 지워버릴 수 없는 그것. 예레미야는 불이 되어버린 그 진리를 경험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백성 중 누구도 귀 기울여 듣지않았다. 오히려 조롱과 멸시, 핍박과 대적함으로 그를 괴롭혔다. 그가 외치는 하나님의 진리는 아무런 열매를 얻지 못한 채 허공을 치듯 공허한 외침이 되고 말았다. ‘이제 외치지 아니하리라’ 말해도 소용없는 진리를 왜 수고로이 애쓴단 말인가?
물러서고 싶고 애써 외면해 보려고 발버둥 치고, 냉담한 침묵으로 버텨보지만, 그의 가슴속에 이미 불이 되어버린 진리를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해봐야 소용없으니까.’, ‘나만 괴로우니까.’ 그 어떤 이유로든 피하거나 포기하려고 하면 불이 활활 타오르듯 진리가 그 속에서 소리쳤다. 골수를 흔들어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몰아가는 바람이 잠잠히 무반응으로 있을 수 없도록 만들고야 말았다.
예레미야와 불이 된 진리!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에 가시나무에 붙은 꺼지지 않는 불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분의 공의는 결코 쇠하지 않는 맹렬한 불이다. ‘너희의 악행을 인하여 내 노가 불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능히 끌 자가 없으리라(렘21:12).’
그분의 긍휼 또한 그의 백성들을 향하여 잠잠히 바라보거나 포기할 수 없는 타는 불이다.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히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8).’
우리의 구주 예수그리스도는 불을 주러 이 땅에 오셨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 12:49).’
세례요한은 그를 가리켜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줄 것이요(마3:11).’라고 증언했다.
성령께서 약속대로 그의 백성들에게 임하시던 날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행 2:3).’
주의 복음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불같이 하나님의 가슴에서 타오르고 불같이 우리 영에 부어졌다. 끌 수도 부인할 수도 없는 불길로!
내가 받은 진리는 과연 어떠한가? 내가 고백하는 신앙은 내게 얼마만큼의 것인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하셨다.
얼마나 현란한 논리로 교리를 말하느냐에 있는 게 아니다. 그 교리가 내 속에서 불이 되어 타는지를 묻는 것이다. 스스로가 자신의 고백을 행위로 부인해도 전혀 갈등도 없고 반응할 수도 없는 교리는 자신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 복음을 부인하려고 하면 내 속에서 불이 되어 도저히 그럴 수가 없게 된 복음인가?
내가 살아 육으로 가려고 하면 불이 되어 나를 소멸시켜 십자가의 죽음에 넘겨버리고야 마는, 그런 실제가 되었는가를 묻는 말이다.
대적이 와서 수없는 정죄로 나를 무너뜨리려 할 때, 내 실상을 보며 절망 가운데 떨어질 때에라도 내 안에 불이 되어 소리 지르는 ‘나는 피 값으로 산 내 안에 그리스도’인가 말이다.
대강 그슬려 넘어간 진리, 내 안에 어떤 것도 되지 못한 진리, 그것은 내게 생명도 아니며 복음도 아니다. 십자가? 주님의 죽으심에 진정 참여했는가? 아니면 구경만 했는가? 그 앞에서 잠깐씩 감동 받는가? 거의 기절까지 했는가?
아니다! 주님과 함께 죽음에 넘겨져야만 한다. 그렇게 십자가에 참여된 자는 십자가가 불이 되어 정과 욕심에 설 때마다 소멸의 능력으로 타오른다. 부활의 생명력이 되어 소망의 불꽃을 태우는 것이다. [GNPNEWS]
<순회선교단 대표>
「그날이 오기까지」에서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