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높이라 Prize Wisdom 잠 4:8

“선교는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곳에서 예 배하는 것”“宣教は神様を礼拝しない所で礼拝すること”

순종의 삶을 선택한 신선자 선교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은 나 하나의 기쁨에 제한 될 ‘개인용’이 아니라, 온 인류를 춤추게 할 ‘열방용’이다. “복음을 만나고 나서 내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주님이 정말 빨리 오셨으면 좋겠다’라는 소망이 하나 생겼다는 것이다.”라고 고백하는 신선자 선교사. 인도에서 사역 중 비자 연장을 위해 일시 귀국한 그를 만났다.

– 신앙생활은 언제부터 시작하셨나요?
“언니를 따라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어요. 할머니가 교회 다니는 것을 엄청 싫어하셔서, 할머니 몰래 교회를 다니곤 했죠. 그때는 교회가 그냥 좋았어요.”

– 부모님들은 교회에 다니지 않으셨군요.
“제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아버지께 서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대구에서 살았던 저희 가정은 어머님이 식당에서 일을 하시며 생활했어요. 그런 삶에서 믿음을 갖게 될 기회가 없었던듯해요. 집안일은 주로 저희 자매들의 몫이었죠. 저는 4녀중 둘째예요. 저희들은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이긴 사람 순서로 설거지, 방청소, 빨래 등 집안일을 선택했죠.”

–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었던 것 같은데, 빨리 어른이 됐다는 생각은 들어요. 집안에 걱정거리나 문제가 생기면 초등학생 동생부터 온 가족이 다 함께 알고, 함께 걱정을 하곤 했죠. 그리고 원하는 것이 있더라도 마음속으로 혼자 정리하고, 빨리 포기해버리는 능력(?)이 생기게 된 것 같아요.”

– 신앙생활에서 특별한 변화를 경험하신 적이 있나요?
“중학생이 되고 수련회를 통해 ‘예수님이 나 때문에 돌아가셨다’라는 사실이 믿어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교회에 더욱 열심을 내기 시작했죠. 교회 청소, 주방 일부터 시작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열심히 일을 해도 뭔가 채워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어요. 궁금증과 해결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어요.”

–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었나요?
“2002년에 가까운 지인이 심각한 죄에 넘어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일종의 ‘목마름’이 깊어졌어요. ‘나는 왜 교회를 다니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다는데, 왜 살아있다는 느낌이 안 드는 걸까?’, ‘왜 나를 봐도 주변의 믿는 사람을 봐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을까?’ 뭐 이런 종류의 질문들이 저를 계속 괴롭혔죠. 그 무렵 2-3년 동안 굉장히 답답함을 갖게 됐어요.”

– 그런 의문들이 해소되었나요?
“2007년에 중동지역을 섬기는 선교사님의 소개로 한 선교단체가 주관하는 학교를 통해서 죄에 대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어요. 예전에는 남들이 지은 죄를 보면서 늘 판단하고 정죄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 때 하나님이 저에게 ‘네가 다를 것이 무엇이냐? 행동으로만 드러나지 않았을 뿐 그들과 다를 바 없다’라고 말씀해 주셨죠. 사실 예수님은 살인이라는 행위와 미워하는 마음의 동기를 같은 죄로 규정하시잖아요. 저는 그 진리를 알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거죠.”

– 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있었던 거군요.
“이전에는 사회법을 위반하거나, 도덕에 어긋나는 것을 죄로 인식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세상의 법 안에서 규칙을 잘 지키고 나쁜 짓을 하지 않으려 애썼던 저는 깨끗한 사람이었던 거죠. 마치 저는 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처럼 인식했던 거죠.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 앞에서 제 마음을 바라볼 때, 제가 곧 살인자고 음행자고 죄가 충만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거죠. 그렇게 내가 정말 죄인인 것을 인식하고 나니, 다른 사람의 죄를 향해 비판하는 마음이 아니라, 그 죄가 내게도 있음을 인정하게 되고, 받아들여지게 되었죠. 예수님의 십자가가 진정 저 같은 죄인을 위한 거였어요. 비로소 제 안에 자유함이 오더라구요. 정말로 복음을 만난거죠.”

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있어

– 그 복음을 깨닫고 난 이후 삶의 변화가 있었나요?
“십자가복음을 경험하면서 복음과 선교는 무관하지 않다는 얘기를 처음 듣게 됐어요. 그러나 그 선교라는 영역이 저의 삶과는 무관한 먼 나라의 얘기인 줄로 여겼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저는 집 떠나는 것을 싫어해요. 집 밖에서는 잠도 잘 못자고, 다른 환경에서 고생하는 것도 싫어했죠. 새로운 것에 적응하는 것 보다, 차라리 불편해도 익숙해진 삶이 더 좋다고 생각해왔어요.”

– 그런데 어떻게 선교사가 될 생각을 하셨나요?
“복음선교관학교라는 과정을 통해 스리랑카로 비전트립을 갔을 때였어요. 야생동물이 들어올 것 같은 허술한 장소에서 거적때기를 깔고 자야하는 불편한 상황이었어요. 그때 현지 선교사님에게 “이런 데서 자고 먹고 하는 것이 좋으세요?”라고 물었어요. 그런데 예상밖으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신선한 충격이었죠. 그 부분에서는 저와 다를 바 없잖아요. 그런데 그분의 순종하는 삶의 태도를 봤어요. 억지로 하시는 것이 아니었죠. 그분의 기쁜 순종을 보면서 ‘하나님이 내게도 저렇게 순종하는 마음을 주실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나님이 부르시면 순종할 수 있겠다.’라는 한 줄기 빛이 비춰진 거죠. 그렇게 한 걸음씩 인도하셨어요.”

– 인도를 사역지로 결정하게 된 과정이 있었나요?
“2010년 어느 날이었는데, 매일 한 시간씩 열방을 품고 기도하는 기도24365 시간에 ‘주님 다시 오실 날이 10년도 남지 않았다.’라는 기사를 보게 되었어요. 그때 이 10년이라는 숫자가 단순한 수의 개념이 아니라 ‘시급한’ 하나님의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2010년을 그냥 보내지 않기로 다짐을 했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주일 설교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지금 나를 부르고 계신다’는 확신을 갖게 됐어요. 그래서 어느 곳이든지 순종하기로 하고, 결정하게 된 곳이 인도였죠.”

– 인도로 처음 발걸음을 내딛을 때가 기억나세요?
“생생하죠. 2011년 2월 24일에 인도 델리 공항에 도착했어요. 마중 나오기로 한 분이 나오지 않았어요. 당황했죠.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더군요. 출발 전에 주님이 ‘나만 신뢰하라고 하셨는데, 실습을 시키시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여하튼 우여곡절 끝에 목적지까지 도착했어요. ‘어떤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교훈을 얻었죠. 어쨌든 그 일 이후로 대책 없는 자매라는 소문이 돌았어요(웃음).”

– 처음 2년 간 현지인들을 대하면서 느낀점이 있다면요?
“인도에 대한 편견이 있었어요. 그리고 언제든지 현지인에게 사기를 당하거나 도둑맞을 수 있다는 강박관념이 있었죠. 그래서 릭샤(인력거)를 탈 때에도 몇 푼 손해 보지 않으려고 흥정하고, 시장에서도 가격을 속지 않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곤 했죠. 인도와 인도 사람들을 사랑하기는커녕 그들을 판단하고, 무시하는 제 모습을 하나님이 보여주셨어요. 그리고 저의 왜곡된 관점을 버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이들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관점을 믿음으로 취해야 한다는 중요한 원리를 배웠죠.”

하나님의 관점으로 현지인들을 보게 돼

– 자매 선교사로 홀로 살면서 위험을 느끼신 일은 없었나요?
“저는 처음부터 혼자 다녔어요. 특별한 위험은 못 느꼈죠. 그런데 작년 10월 혼자 델리에서 바라나시로 가는 기차 안에서 이동 중에 한 남자가 제 몸을 더듬고 지나가는 일이 있었어요.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경찰을 불렀죠. 잘 마무리되긴 했지만, 한바탕 소동을 치룬 경험이 있어요. 사실 최근 인도에서 한 여대생이 집단 성폭행으로 살해된 사건이 국제적인 이슈가 되었죠. 그런데 한국에 와서 뉴스를 보니까 한국이 인도보다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던데요(웃음).”

– 2년 간 어떤 사역을 하셨나요?
“한 마디로 예배와 기도였어요. 지난 2년 동안 제가 배운 선교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땅에서 예배하고, 하나님을 스스로 찾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홀로 또는 기도모임에서 기도하는 것이었어요. 물론 ‘뭔가 눈에 드러나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이 들기도 했지만, 먼저는 본질을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썼죠.”

– 좀 더 구체적으로 나눠주신다면?
“제 경우에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경건과 믿음을 지켜야 하는 것. 그것이 가장 큰 싸움이었어요. 가정이 있거나, 함께 하는 공동체가 있으면 서로 지켜주고 경계가 되어주는 유익이 있어요. 그러나 저는 혼자니깐 이 부분에 더 많이 애를 써야 했던 것 같아요.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일이나, 모든 일상에서도 철저하게 홀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하죠. 안팎으로 크고 작은 고민들이 밀려올 때, 염려하고 근심하기도 하지만, 때마다 주님이 말씀으로 인도해주시고 밝히 가르쳐주시면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죠. 그때가 가장 기쁜 때인 것 같아요.”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이 사역

– 선교지에서 홀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시간이었겠군요.
“사실 스스로 대견스럽다라는 생각이 든적도 있었어요. 나름 성실하게 말씀과 기도로 믿음을 잘 지켰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한 사건을 통해서 믿음은 경력이 쌓이는 것이 아니라, 계속 오직 믿음이라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있었죠.”

– 어떤 사건이었나요?
“인도에서 처음 1년간은 세탁기가 없어서 손빨래를 했어요. 그래서 세탁기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주변에서도 세탁기는 있어야 한다고 했죠. 그래서 기도를 했는데, 우연히 동생이 재정을 보내겠다고 연락이 온 거에요. 그런데 그때부터 세탁기를 허락해 주시는 주님보다, ‘동생이 얼마나 많은 재정을 보낼까’ 하는데 더 관심을 두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부끄러웠죠. 그래서 얼른 회개하고 ‘세탁기 사기에 모자란 재정이 와도 상관없어요. 괜찮아요.’라고 고백했죠.”

– 다시 인도에 들어갈 계획을 갖고 계시죠?
“지금 제게 허락된 삶의 터전은 한국이 아니라, 인도에요. 한국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아요. 지금 비자 상황을 고려할 때 적어도 5개월은 있어야 하는데, 인도를 오래 비워두는 것 같아서 마음이 어려웠어요. 한국에서 지내는 시간도 하나님이 허락하셨으니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아야 겠다는 생각도 있지만, 빨리 인도로 가고 싶어요.”[GNPNEWS]

J.S

従順の道を選択したシン・センジャ宣教師

イェス・キリストの十字架の福音は、私一人の喜びに制限される‘個人用’ではなく、全人類を躍らせる‘世界用’である。‘福音にであってから私に怒った一番大きな変化は、’神様が本当に早く来てほしい‘という希望が一つできたのです’と告白するシン・センジャ宣教師。インドで働く中、ビザ延長のために一時帰国した彼女に会った。

-信仰生活はいつから始めましたか。
“お姉さんについて小学校4年の時、教会に行きました。おばあさんが教会に通うのをすごくいやがっていて、おばあさんには隠して教会に通いました。その時は教会がただ好きでした。”

– ご両親は教会に通ってなかったですね。
“私が小学校に入る前に、お父さんがガンでなくなりました。デグで住んでいた私たちの家族は、お母さんが食堂で働いて生活していました。そんな人生で信仰に会う機会がなかったようです。家事は主に私たち姉妹がやりました。私は4姉妹中次女です。私たちはじゃんけんで勝った順で、皿洗い、部屋掃除、洗濯など家事を選択していました。”

-大変な時はなかったですか。
“特に大変なことはなかったですが、早く大人になりたかったです。家族に心配ことや問題が生じると、小学生の妹から全家族が一緒に知っていて、一緒に心配をしていました。そして望む事があっても、心の中で一人で整理して、早く諦める能力が出来たと思います。”

-信仰生活で特別な変化を経験したことがありますか。
“中学生になって、集会を通して‘イェス様が私のためになくなった’という事実が信じられました。それで教会にもっと熱心を出しました。教会の掃除、台所での働きからできることは全てやりました。しかし一所懸命行っても、何かが足りないと思っていました。気になるところと解決できない部分がありました。”

-具体的にどんな部分でしたか。
“2002年に親しい知人が、深刻な罪に陥るのを見て、‘渇き’が酷くなりました。‘私はなぜ教会に通っているのか’、‘神様のみ言葉は生きているのに、なぜ生きている感じがしないのか’、‘なぜ私をみても周囲の信じる人を見ても、神様のみ言葉の通りに生きる人はいないのか’、こんな質問が私を苦しめました。そのころの2-3年間、とてももどかしさを感じました。”

-そんな疑問は解決されましたか。
“2007年に中東地域で仕えている宣教師さんの紹介で、ある宣教団体が主管する学校を通して、罪に対しての真理を学びました。以前には他人が犯す罪を見て、いつも判断して裁きました。しかしその時、神様が私に‘貴方は何が違うのか。行動で現されてないだけで、彼らと違わない’と言ってくださいました。事実イェス様は殺人という行為と、嫌う心の動機を同じ罪として思っていました。私はその真理を知ってはいたが、まだ信仰として受け入れてなかったです。”

-罪に対しての認識の転換があったんですね。
“以前には社会法を違反して、道徳から外れることを罪として認識していました。それなので自分なりに最善をつくして、世の法の中で規則をまもって、悪いことをしないよう努めた私はきれいな人でした。まるで私は罪から自由な人のように認識したんですね。しかし神様の基準で、私の心を見つめた時、私が殺人者であり、淫行者で、罪に満たされた存在であると気付きました。私が本当に罪人であることを認識して、他の人の罪に対しての批判する心ではなく、その罪が私にもあると認めて、受け入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イェス様の十字架が本当に私のような罪人のためのものでした。やっと私の中に自由をいだくようになりました。本当の福音に出会いました。”

罪に対しての認識の転換があって

-その福音に気付いてからの人生の変化がありましたか。
“十字架の福音を経験しながら、福音と宣教は無関係ではないとの話を始めて聞きました。しかしその宣教と言う領域が、私の人生とは無関係の話として考えていました。大部分の人たちがそうだと思いますが、私はお家を離れるのを嫌っていました。お家の外では寝むれないし、他の環境で苦労することも嫌でした。新しいところで慣れるより、不便でも慣れた人生がもっとよいと思っていました。”

-しかしどのように宣教師になろうと思いましたか。
“福音宣教館学校という過程を通して、スリランカへビジョントリップに行った時でした。野生動物が入ってこられるような、みすぼらしい場所で寝ないといけない状況でした。その時現地の宣教師に、‘こんなところで寝て食べるのが好きですか’と聞きました。しかし予想外に好きではないとおっしゃいました。新鮮な衝撃でした。その部分では私と違ってなかったです。しかしその方の従順する人生の態度を見ました。わざとできることではなかったです。彼の喜びの従順を見て、‘神様は私にもそんな従順する心をくださるだろう’と思いました。‘神様が呼んでくださると、従える’という日差しを感じました。そのようにして一歩ずつ導かれました。”

-インドを働き場として決定した過程がありましたか
“2010年ある日でした。毎日一時間ずつ世のために祈っている祈祷24365時間に、‘主が訪れる日が10年も残ってない’という記事を見ました。その時、この10年という数字が、単純な数の概念ではなく、‘急ぐ’神様のみ心として受け入れました。それで2010年を普通に過ごさないと決めました。そして何日かたって、日曜日の説教と通して、‘神様がいま私を呼んでいる’という確信をいだくようになりました。それでどこでも従うことにして、決められたのがインドでした。”

-インドに始めて到着した時を覚えていますか。
“生々しいです。2011年2月24日にインドのデリ空港に到着しました。迎えに来るはずの方が来なかったです。戸惑いました。本当に何もできなかったです。出発前に神様が、‘私だけを信頼して、とおっしゃっていたのに、訓練をさせているのだろう’と思いました。とにかく紆余曲折の末に目的地まで到着しました。‘どんな状況が与えられても、恐れず神様を信頼しなさい’という教訓を得ました。その時以来、無茶な人だという噂がありました(笑)。”

-初めての2年間、現地人たちと向き合いながら感じたことがありますか。
“インドに対しての偏見がありました。そしていつでも現地人に裏切られて、盗まれるかもしれないと思っていました。それでリクシャ(人力車)に乗る時には、一銭も損害されないよう交渉して、市場でも価格を騙されないよう、神経をたっていました。インドとインド人を愛するのではなく、彼らを判断して、無視する自分の姿を神様が見せてくださいました。そして私のまがった観点を捨て、イェス様を通して、彼らを愛の目で見つめている神様の観点を信仰で取らないといけない大事な原理を学びました。”

神様の観点で現地人を思うようになる

-女子宣教師として一人で住んで、危険を感じたことはありませんか。
“私は始めから一人で出回りました。特別な危険は感じてないです。しかし去年10月一人でデリからバラナシへ行くバスで、一人の男性が私の体を触ったことがありました。とても驚いて、すこし戸惑いましたが、警察を呼びました。  よくまとまりましたが、ひと時の騒ぎを経験しました。事実最近インドである女子大学生が集団性暴行で殺害された事件が、国際的にイッシューになりましたね。しかし韓国に来て見ると、韓国がインドより危ないと思います(笑)。”

– 2年間どんな働きをしましたか。
“一語でいうと礼拝と祈祷でした。2年間私が学んだ宣教は他ではなく、神様を礼拝しない地で礼拝して、神様をみずから求めない人たちのために、一人でまたは祈祷の集まりで祈ることでした。勿論、‘何か目に見える事をしないといけないのか’という質問が浮かびましたが、まずは本質を見つめようと努めました。”

-もっと具体的に分かち合ってください。
“私の場合には誰も見ないところで、ただ神様の前で敬虔と信仰を守ること。それが一番大きな戦いでした。家庭があるとか、共にいる共同体があれば、互いに守ってくれる有益があります。しかし私は一人なので、この部分でもっと多く努めないといけないです。み言葉を黙想して、祈ることや、全ての日常でも徹底に一人で神様の前に立たないといけないです。いろんな沢山の悩みが押し寄せると、悩んで心配もしますが、時ごとに神様がみ言葉で導いてくださり、教えてくださるので、全ての悩みと心配がなくなります。その時が一番うれしい時です。”

神様を礼拝して祈ることが働き

-宣教地で一人で神様を経験する時間でしたね。
“実は自分でもよくやったと思いました。誠実に、み言葉と祈祷で信仰をよく守っていたと思いました。しかしある事件を通して、信仰は経歴を積むことではなく、続く信仰であることに気付きました。”

-どんな事件でしたか
“インドで始めの1年間は洗濯機がなくて、手で洗っていました。それで洗濯機があればと思っていて、周囲からも洗濯機はあるべきだと言われました。それで祈っていると、偶然妹がお金を送るとの連絡が来ました。しかしその時から洗濯機を下さった神様より、‘妹がいくらを送ってくれるか’というのにもっと関心をおく自分を発見できました。恥ずかしかったです。それで早く悔い改めて、‘洗濯機を買うには足りないお金が来ても関係ありません。大丈夫です’と告白しました。”

-再びインドへ帰る計画を持っていますか。
“いま私にゆるされた人生の台は韓国ではなく、インドです。韓国に長く留まりたくないです。いまビザの状況を考慮すると、少なくとも5カ月は待たないといけないですが、インドを長く空きそうで、気持ち的に辛いですね。韓国で過ごす時間も神様が導いてくださったので、み言葉で主の導きを受けたいですが、早くインドへ帰りたいです。”[GNP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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