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과 같이 역사의 무대 위에 우뚝 서 있는 사람을 보면 대체로 ‘특별한 기회를 부여받은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다니엘처럼 혹독하고 외롭고 모진 길을 걸어간 사람도 많지 않다. 다니엘은 신흥 바벨론 제국이 강한 힘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았다.
다니엘의 조국 이스라엘은 이미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천 수백 년 동안 주님의 그 놀라운 기적과 끊임없는 사랑을 받으면서도 이스라엘은 악착스럽게 반역했다. 결국 주님의 이름을 짓밟으며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히다가 인간이 얼마나 소망 없는 존재라는 것을 역사에 길이길이 남기며 무서운 징계를 받아 망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돼지 피가 뿌려졌고, 성전에 있던 하나님의 성물(聖物)은 원수들의 전리품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에스겔에게 환상으로 보여 주셨던 대로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을 떠나셨다. 예루살렘은 저주받은 땅이라는 상징으로 전락해 버렸다.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 있었던 그 자리, 하나님의 선민(選民) 이스라엘은 이름 자체가 없어져 버렸다. 다 끝장난 그곳에서 길모퉁이에 버려진 젖먹이의 혀가 입천장에 붙어서 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아이의 죽음을 본 예레미야 선지자는 가슴이 녹아내리는 고통으로 인해 눈이 눈물에 상해 버렸다.
그때 끔찍하고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 포로가 되어 끌려간 소년들 중에 다니엘과 세 친구가 선택을 받아 바벨론 제국의 왕실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다. 동포들이 죽어가는 마당에 살아서 끌려간 그들의 운명을 행운으로 보아야할까? 차라리 죽은 사람이 행복하다고 할 만큼 그들은 목숨이 늘 남의 손에 달려 있는 노예에 불과했다. 그들은 실력을 쌓는다 해도 정상에 갈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다해봐야 포로 출신 노예였다. 아침마다 살아있다는 걸 늘 확인해야 할 정도로 피 말리는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던 그들이었다. 누구보다 뛰어난 생존본능을 갖추고, 살아남는 일을 인생 최고의 가치로 여겼을 수 있다. 믿음의 삶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제국의 특별 교육을 받았지만 언제든지 버림받을 수 있는 그들에겐 오늘 하루가 그냥 지나가는 게 기적이었다.
포로가 되어 끌려간 다니엘
이런 상황에서 역사를 뚫어내었던 그의 고백을 들어 보자!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단 1:8)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이 오게 하는 통로로 쓰임 받을 사람에게 주님이 무엇을 기대하는지, 보이는가?
오늘 하루를 더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동물농장의 짐승과 같은 처지에 있으면서도 다니엘은 ‘주제 파악’을 못한 채 뜻을 정했다. 포로에겐 ‘자기 뜻’이 있으면 안 된다. 자기 뜻과 상관없이 강제로 끌려 온 포로가 자기 뜻을 정했다니! 이게 무슨 의미인가? “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야. 하늘에 속한 사람답게 난 이 거룩함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 비록 포로로 끌려와 있지만 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고고하게 살아가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 음란하고 사악하고 반(反)도덕적이며 진리를 대적하는 캠퍼스 한복판에서 십자가 자랑하고, 올곧은 믿음으로 ‘왕따’를 당하고, 사람대접 못 받고 병신 취급당해도 주님의 복음에 합당한 사람으로 당당히 걸어 나가지 않겠는가? 비록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더러운 사상이나 철학, 대세의 유행에 더럽히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고고하게 살아보지 않겠는가? 다해봤자 ‘왕따’ 좀 당하는 것 밖에 없지 않은가?
다니엘의 고백은 연습 삼아 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환관장이 허락하지 않으면 곧바로 목숨을 내놔야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뜻을 정했다.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로.
(2014.8 메시지 정리)<계속> [GNPNEWS]
김용의 선교사(순회선교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