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충돌했던 사람들은 주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엄한 법을 만들어놓고 사람들에게 무서운 칼질을 하며 가르치는 것에만 하나님의 진리를 이용하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진리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기에 철저히 외식하는 자들이었다. 사두개인들은 또 어떠했는가?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아예 무신론적인 태도를 가졌다. 어차피 진리대로 살 수 없다고 말하는 자들이었다.
예수님께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명했다. 특히 중풍병자 한 사람의 병만 고치시지 않고 ‘죄 사함’을 선언하시자 충돌은 본격화 되었다.
주님의 공생애는 ‘회개하라’는 메시지로 시작되었다. 시작부터 핵심을 찌르셨다. 평범한 인간의 정서로는 그대로 받기에는 어려웠다. 주님의 사역은 갈릴리의 첫 사역부터 갈보리에서 죽으시기까지 대단히 과격했다. 이것이 기독교의 시작이었다.
기독교는 시작부터 사람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그래서 인간 수준의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 수준의 신적 부름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정서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인간의 이성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 이를 받아들이는데 필요한 것은 오직 믿음밖에 없다.
죄인의 본성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다. 말씀에 대한 순종 역시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하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역사하셔야만 한다.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 10:26~27)”
찬송가 486장의 가사처럼 하나님을 떠난 세상, 죄악 된 세상은 죽을 일이 쌓였다. 전도서 기자의 선언처럼 세상은 죽을 일이 쌓이기만 할 뿐 해결할 능력이 없어서 더 답답하다(전 1:14~18). 사사시대, 죄 짓고 얻어터질 때는 불쌍해서 주님이 또 살려주신다. 그러나 배부르면 다시 타락한다. 없으면 없어서 망하고 있으면 있어서 망하는 것이다.
수용에 필요한 것은 오직 믿음
한국의 상황도 총체적인 난국이다. 성도들이 문제인가? 그렇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지도자에게 있다. 도덕적인 추락,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은 결국 멸망으로 이어지는데 지금 우리나라가 이 형국이다. 사회의 기둥이 되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의 ‘염려꺼리’가 되었고, 세상의 코치를 받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7,80년대의 우리나라 교회의 관심은 온통 번영, 성공, 치유였다. 산업화와 민주화 시대를 지나 이제 먹고 살만해 지니까 사사시대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다. 복음의 황금어장으로 불렸던 캠퍼스마저 선교자원자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 이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부흥과 선교완성은 가능한가?!
유대인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모태신앙은 모태신앙이기 때문에 변화되기 어렵다. 본질적인 이야기는 부담스러워한다. 어떤 희생과 대가를 치러야 되는 줄 아는 한 책임감만으로는 절대로 헌신할 수 없다.
모태 신앙이 아닌 사람은 너무 몰라서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사람이 변화되려면 시간이 참 많이 걸린다. 바른 복음을 들을 수 없어서 변할 수가 없다.
그런데 복음을 알면 알수록 사람이 변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지 알게 된다. 사방을 둘러 봐도 죽을 일이 쌓였다. 유대인이어서, 이방인이이서, 바리새인이어서, 사두개인이어서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얼핏 보면 이들에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공생애는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사방을 둘러보면 사랑할 일이 쌓였다. 낙심되고 안 될 일만 쌓여 있는 것 같지만 주님의 사랑의 눈으로 보면 사랑할 일이 쌓였다.(2014.11 메시지 정리) <계속> [GNPNEWS]
<순회선교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