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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 칼럼] 사회정의(2): 복음을 지키기 위한 기나긴 고투

사진: Jessica Delp on Unsplash

복음을 지키기 위한 기나긴 고투

사도 시대로부터 시작해 믿음의 성도들은 복음의 진리를 위해 열과 성의를 다해 분투하도록 부름을 받아왔다. 가장 힘든 투쟁은 그리스도에게 충성을 다한다고 주장하는 이들 중 지역교회 안에서 일어났다. 그 이유는 복음의 가장 큰 위협이 무신론자나 명백한 적으로부터가 아니라 항상 교회 안에서 영향력 있는 목소리들이 어그러진 말을 하며 일어났기 때문이다.(행20:30) 바울의 에베소 장로들에게 한 고별 인사에서뿐만 아니라 그가 디모데와 디도에게 보낸 훈계와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의 교회에 보낸 그리스도의 편지가 신약 교회의 가장 초창기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음을 입증한다.

나는 신학교에서 교리와 변증학을 공부하면서 세상으로부터의 강력한 공격에 대한 성경적 진리를 지키는 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신론에 대응하고 세속 문화, 흥행업계, 학계 그리고 교회 밖에서 발생하는 복음에 대한 위협에 맞서는 것을 상상했다.

사역을 시작한 지 얼마 후, 나는 성경적 진리에 대한 최대의 위협은 주로 믿는 성도들 안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깨달았다(나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가차 없이 계속되는 공격이었다. 교회 역사를 돌아보면 항상 그래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거짓 교리, 위험한 방법론, 불건전한 관행, 기묘한 믿음, 유해한 이념 그리고 거짓 교사가 종종 심각한 분열을 초래하거나 영적으로 파괴적인 결과를 동반하며 하나님의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때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최악의 문제는 내부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에 나는 놀랄 필요가 없었다. 나는 목회자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필자의 아버지 또한 목회자의 아들이었다. 그들은 미국 전통 침례교회(ABC)에 속해 있었다.

내가 십 대였을 때 나의 할아버지는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목회자로 섬기다가 천국으로 가셨다. 부친은 쇠약해진 루터파 교회가 매각하려던 교회 건물에 독립 교회를 세우기 위해 세상과 타협하여 비틀거리던 ABC(미국침례교회)를 떠났다.

나의 아버지는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대립에서 보수주의 입장에 섰다. 문제는 성경의 영감과 권위에 대한 것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쓰였다는 사실을 지키기 위해서는 언제나 자비로우면서도 담대하고 거침이 없었다. ABC에 계속 남아 있었던 오랜친구들과 관계가 단절 되었지만, 성경의 참된 교리에 대한 그의 충성은 결코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십 대, 대학생, 신학생으로서 배워야 할 바와 모더니즘과 자유주의의 공격에 맞서 하나님의 말씀을 변증하는데 교리적으로 명백한 증명을 하는데 필요한 모든 지식을 습득하는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는 인자한 목회자였지만 지칠 줄 모르는 성실하고 능력을 갖춘 사려 깊은 성경의 변증가였다.

신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는 성경의 영감과 무오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인 성경에 의거한 증거, 변화시키는 힘, 모든 점검의 대상에 대한 세부적인 정확성, 많은 예언의 확실한 성취, 하나님의 순전한 자기 현시에 의한 확인으로 나의 신념은 성서 자체의 증거에 의해 형성되고 확고하게 고정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10)의 말과 같이 내가 성경을 읽을 때 듣는 것은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이시다.”

나는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성경의 권위에 대한 변증의 논문을 썼으며 풀러 신학교에서 잭 로저와 도널드 맥킴, 두 교수가 제안한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변질한 견해에 맞서 논쟁을 펼친 적도 있다. 성경의 대체적 진리는 하나님의 영감이지만 모든 단어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정확한 말씀 그대로(라틴어ipsissima verba 입시서머 버버-바로 그대로의 어구)가 아니라는 성경의 진리에 대한 그릇된 견해였다. 그들은 성경에 “기술(記述)의 오류”가 있을 가능성을 주장했으나 성경은 하나님이 밝히신 “살아 있는 증거”다. 데이빗 알렌 허바드가 총장이었을 당시 나는 다른 몇몇 복음 지도자들과 함께 풀러 신학교의 행정, 교수진, 위원회에 성경의 영감과 무오에 대한 주제로 강의를 하도록 초대받은 적이 있다. 이것은 풀러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견해가 온전히 전통적이라고 말하는 관리 지도자들을 염려하는 임원들에 의해 요청되었다. 그들은 학생들과 다른 교수진들로부터 강의실에서 정말로 정통을 벗어난 사상들이 공격적으로 강의 되고 있다는 것을 듣고 있었다.

나는 성경의 변증이란 평생에 걸친 투쟁이라고 언제나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러나 예측은 물론 내가 몰랐던 것은 복음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공격은 세속의 회의론자와 논쟁하기 좋아하는 불신자로부터가 아니라 가차 없이 밀려드는 파도와 같이 교회 안에서 여러 방면에서 거의 일상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목회자로서 사역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율법주의적 근본주의자들에게 나는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행함이 근거가 되는 자기 의(自己義)의 종교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라는 대립에 끼어들게 되었다. 그 후, 이번에는 불신자들에게 회개와 주님 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을 외치는 복음적 설교가 율법주의의 형식이라고 주장하는 반대파의 공격을 받았다. 나는 그 응답으로 ‘주님 없는 복음’(생명의 말씀사, 황을호역)을 썼다. 그리고 그에 따른 논란이 심화되었을 때 나는 두번째 응답으로 ‘구원이란 무엇인가?‘(부흥과 개혁사, 송용자역)를 저술했다.

성령, 영적 은사 그리고 계시의 지속에 관한 오순절 파의 견해를 보수적 복음주의에 받아들이자는 움직임 또한 있었다. 내가 목회자로 사역하던 교회는 은사주의 운동이 시작됐던 캘리포니아 ‘밴 나이스’에 있는 성공회 교회에서 가까이 있다. 나는 어떻게 이 운동이 이단적 견해와 일반 복음주의 안에 존재하는 거짓 교사라는 결과를 초래 했는지에 대해 ‘무질서한 은사주의’(부흥과 개혁사, 이용중역)에서 연대기로 기록했다.

나는 교회 안에 침범한 심리 요법(인간이 고통을 겪는 이유에 대하여 기독교 교리와 하나님을 부인하는 속된 추정에 근거한 이런저런 발상을 통합하려는 시도)에 맞서 성경의 충분성에 대해 고투해 왔다. 잠시 동안 복음주의 운동은 성경적 진리가 인간의 “깊은” 심리적 문제를 다루기에는 단순하고 부족하다며 하찮게 여기는 자기 방식에 능통한 사람들에 의해 들끓었다. 그들은 심리학 입문을 거칠 때까지 성화는 시작조차 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한 기독교’(부흥과 개혁사, 이용중역)는 그러한 움직임에 대한 나의 응답을 글로 쓴 것이다.

또 수년간, 뭔가 포착하기는 어렵지만 대단히 호소력이 있지만 위험한 경향이 복음주의자들 안에서 지속적으로 세력을 늘리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순수 실용주의의 “구도자 중심”의 철학을 가진 교회의 성장이었다. 이러한 양상을 따른 교회들은 성경적 가르침과 교리적 설명에서 멀어져 대개 사람들을 모으기 위한 수단으로 영적인 것처럼 보이는 테마에 오락을 가미했다. 신자들을 훈련하고 가르치는 사역보다 “불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중점이 되었다. 사람들은 배우지 못해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소수의 대형 교회가 이러한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여러 작은 규모의 교회들은 모방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것을 본보기로 하려던 셀 수 없는 작은 교회들은 실패하고 사라지기조차 했다. 그중 몇몇 말주변 좋은 젊은 지도자들은 실용적인 현실적 접근법에 달변으로 전례 없는 크기로 회중이 증가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들 중 일부의 회중은 문자 그대로 수천 수만에 이르러 보는 사람에게 이 새로운 사역은 대규모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교회’(생명의 말씀사)라는 책에서 나는 그 문제를 분석해 정면으로 대응했다.

위의 책들을 언급한 이유는 홍보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나의 가장 잘 알려진 격론들이 한 가지 근본 목표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것들은 확고한 복음의 핵심에 대한 미묘한 내부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쓰여졌다. 사실 이 책들은 나의 전 사역 기간 성서의 권위에 대해 격렬하게 지속되는 무수한 고투를 보여준다. 결코 논쟁가가 되고자 한 것은 아니나 모든 신도가 전해 받은 복음의 근본 원리를 위해 성서에 대한 나의 양심과 그에 온전함을 바치고자 하는 마음이 나를 진지하게 맞서도록 만든다.

현재 복음주의가 집착하고 있는 “사회 정의”가 위에서 다룬 여러 문제와 어떠한 공통점을 지니는가에 대한 설명과 함께 다음 글에 결론을 지으려 한다. 그리고 과다하게 강조되는 최근의 이 문제가 교회가 관여한 최근의 다른 어떤 논란보다 왜 복음의 명확성과 집중성에 대해 임박한 위협을 제기한다고 확신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겠다. [복음기도신문]

출처: https://www.gty.org/library/blog/B180820

존 맥아더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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