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가듯 하늘나라로 떠난 이복순 어머니 (2.끝)
오늘 국립의료원 장례식장을 다녀왔습니다. 장례식장 사무직원이 이복순 어머님은 지난주 금요일(22일)에 장례식장에 오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상주가 조문객이 없다기에 빈소 없이 장례를 치르고 벽제 승화장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저는 종로쪽방촌으로 이동하여 어머님의 방을 한 번 더 살피고 방 도배를 하고 있는 분과 집주인을 만나 어머님의 죽음과 죽음을 알린 막내아들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막내아들이 맞아. 본인이 그렇게 얘기했어.”
“이곳에서 어머니와 함께 산 적도 있는걸.”
쪽방촌에 사는 다른 주민들도 똑같이 말했습니다. 그리고 쪽방촌을 나와서 이복순 어머님의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막내아들에게 한 번 더 전화를 했습니다.
“어제 전화 드린 목사입니다. 죄송한데 이해가 되질 않아 다시 연락드립니다. 제가 어머니에게 듣기로 자녀분들이 모두 전문직과 대기업의 이사로 잘 살고 있다고 들었는데 어찌 막내아드님은 어머님의 장례를 빈소도 차리지 않고 바로 추모공원에서 납골당으로 모셨으며 그 납골당의 위치도 모른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어머님을 이렇게 보내드리는 게 도저히 아닌 것 같아 다시 한 번 연락드립니다. 제발 솔직하게 말씀 좀 해주세요.”
막내아들이 어렵게 답을 주셨습니다.
“저는 막내아들이 아니라 이복순 어머님 조카입니다. 저도 세상살이가 힘이 들 때가 있어 염치없이 어머님의 쪽방에서 함께 생활을 했었고 지금은 춘천에 살면서 가끔 연락하고 찾아뵙곤 합니다. 지난주에 어머님이 돌아가셨고 국립의료원 장례식장으로 옮겼다는 얘기를 듣고 어머님의 자녀들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답이 그것도 어머님의 운명이 아니겠냐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빈소 없이 벽제 승화장으로 가서 무연고자로 처리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이복순 어머님의 남편분이 돌아가셨을 때 자녀들끼리 재산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큰딸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때도 상당한 재력가라서 소송을 하면서 대형 로펌에 의뢰했습니다. 그러자 대그룹의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큰아들이 사회적인 위치로 인해 로펌에 맡기지 못하고 국선변호사를 통해서 소송을 했고 패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연락이 끊어졌고 자녀들은 그 누구도 어머니를 찾질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어머님은 쪽방촌을 전전하며 지내셨습니다. 어머님의 가족 중에는 이미 말씀드린 대그룹의 이사와 현직 검사, 그리고 카이스트 교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게 참 안타깝습니다.”
외로운 죽음을 바라보는 세 시선
* 쪽방촌 주민
무려 20년 이상을 그 좁디좁은 골목에서 함께 살았지만 93세 이복순 어머님의 죽음이 어느 한 분에게도 이웃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옆방에 20년간 함께 살았던 주인 집 어머니도 이틀간 방문하여 이복순 어머님에 대해 물어보니 “왜 죽은 사람을 계속 물어보냐?”면서 신경질을 내셨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분 주인집이 많은 뒷이야기를 알고 있는 듯 보였으나 답을 안 하시니 어찌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웃한 쪽방 사람들도 어머님의 죽음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대화를 통해 알게 된 이유는 매일 보는 이웃의 죽음이 그들에겐 너무 흔한 일이었고 본인도 마음의 여유가 없이 생의 마지막을 힘겹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연이 없는 죽음이 어디 있겠냐마는 한 번씩 쪽방촌에 찾아오는 막내아들의 행색도 그리 초라한데 어머님의 아들이 대기업의 이사요, 박사요, 검사라는 말은 어느 노친네의 횡설수설로 치부해버렸습니다. 사실은 막내아들이 아니라 알콜중독으로 힘들어하는 조카인데 20년도 더 전에 어머님의 쪽방에서 신세를 질 때 막내아들로 부르기로 했다고 합니다.
경찰이 와서 유가족에게 전화했고, 조카도 유가족에게 연락했음에도 이복순 어머님은 무연고 시신으로 처리되었기 때문에 유가족의 시선은 굳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 교회 사람들
이복순 어머님은 수십년간 출석한 영락교회를 떠나 돌아가시기 전까지 부천산성교회에 등록하여 출석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교회가 어머님의 죽음에 대해 알까 싶어 교회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쪽방촌에 산다는 것을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고 몇 번을 제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부천산성교회 부목사님을 통해 사실을 알리니 어머님의 부고는 조카를 통해 들어서 아는데 장례는 간소하게 치르기에 방문할 필요가 없다는 조카의 말을 듣고 너무 의아해하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어 그냥 안타까워 했다고 전했습니다. 얼마 뒤 담임목사님께서 전화를 주셔서 이복순 어머님이 오랜기간 교회에 출석하시며 예배드리고 신앙생활하는 모습에 참 감동을 많이 받았는데 어떻게 지내는지는 한 번도 자세하게 알지 못했다며 조카가 전화로 이복순 권사님의 부고를 전했을 때는 너무나 놀랐고 그 뒤에 이어지는 조카의 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소외계층 사역을 해줘서 참 고맙다고 전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은 그 누구도 소외받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가 알기 싫어하고 보기 싫어하는 이 사회의 음지를 향해 있고 그곳에서 사는 분들을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계십니다. 또 우리가 그분들을 직접 찾아가 돕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은 모든 이의 눈에서 눈물이 더 이상 없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바로 여기 바로 지금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모든 행동을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변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복순 어머님 소천, 그 이후
어머님이 떠나신지 20여일 다 되어가지만 아직 쪽방촌을 방문할 때마다 어두운 쪽방 골목 어딘가에서 불쑥 나타나실 것만 같습니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그 다음 주일에 이복순 어머님의 장남의 운전기사에게 연락이 와서 추모예배를 드린다는 소식을 듣고 장남이 암암리에 알아보라고 해서 전화를 줬다고 합니다. 암암리에 알아보려면 전화를 주지 말았어야지요!
그리고 하는 말이 추모예배의 규모가 어떻게 되며 몇 사람이나 모이고 뷔페식사는 드시는지 알아보고 지원할게 있으면 지원하라고 지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머님의 소식을 지금까지 알려준 조카에게는 트럭 두어 대를 사주는 것을 본인이 맡았다고 전했습니다.
빈소도 차려지지 않고 무연고로 세상을 떠나신 어머님의 죽음 후에 자녀들이 추모예배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난 토요일에는 종로쪽방촌에서 어머님의 죽음을 처음 발견한 돈의동 사랑의 쉼터 간호사님을 만나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어머님이 돌아가시는 날 집주인에게 요청하여 지금까지 한 번도 쓴 적이 없는 월세계약서를 전해 받았다고 했습니다. 사실 어머님은 그 계약서를 품에 안고 돌아가신 것이 다음 날 발견됐습니다. 그 이유는 어머님이 한 평짜리 쪽방촌에 살아도 자녀들이 모두 잘 살고 있기에 정부에서 지원을 받지 못했는데, 최근에 법이 바뀌어 자녀들이 있어도 지원을 못받는 고령자는 거주비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주거 급여를 신청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참 슬퍼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대기업의 이사 아들, 현직 검사, 대학 교수, 재력가 딸을 두었고 평생을 자녀와 시부모를 위해 사셨던 어머님은 주거 급여를 받기 위해 월세 계약서를 쓴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아무튼 어머님의 죽음은 현실이고 점점 사람의 뇌리에서 잊혀져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네 삶과 인생은 하루하루 숨 가쁘게 돌아가니까요.
바라건데 이복순 어머님의 죽음이 이 사회에서 홀로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수 많은 소외계층이 본래는 우리의 가족이었음을 깨닫게 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복음기도신문]
손은식 목사 | 2013년 말부터 서울 시내의 노숙자와 홀로 사는 어르신을 돕고 기도하는 프레이포유 사역으로 이 땅을 섬기고 있다. 이 칼럼은 손은식 목사와 프레이포유 사역을 섬기는 사역자들의 사역일기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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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가듯 하늘나라로 떠난 이복순 어머니 (1) -“하나님 만나러 가는 길이 이렇게 멀고 슬프고 안타까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