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우리가 교육을 통해 듣는 이야기들은 우리 안에서 나름대로의 논리를 따라 ‘믿음체계’ 즉, 가치관을 형성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가치관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교육이 갖는 엄청난 중요성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제를 하나하나 되짚어 볼 뿐만 아니라, 이 문제를 복음 앞에서 처리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순순한 복음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교육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복음도 왜곡되고 변질되면 곧바로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듯 교육도 마찬가지다. 교육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말 중에 ‘자기주도형 학습’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교육도 성령께서 주도하셔야 할 일이지 내가, 자아가 주도할 일이 아닌 것이다.
성령께서 주도하셔야할 교육
나는 교회도 없는 시골 동네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1학년 때에 삶의 소망을 발견하지 못하고 ‘인생의 결론은 죽음이구나’를 깨닫고 자살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때 친구에게 들었던 ‘창조자 하나님’이라는 분이 기억이 났다. ‘그분이 나를 지었다면 그분에게 해답이 있겠구나’라고 생각하고 음성 나환자촌에 있는 교회까지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 거듭남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 학교생활은 혼란스러워져 갔다. 창조주이고 구원자이시며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실제인 것을 경험한 나로서는 학교에서는 그 하나님을 전혀 만나볼 수 없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국 하나님을 알고 싶어 신학 대학교에 진학했다. 대학을 다니면서 성경적 관점에서 기독교 철학과 세속 철학을 비교하며 고민하는 시기를 보내며 의문들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배(腹)를 신(神)으로 삼는 교육 현실
이후 부르심을 놓고 기도했다. 진리의 반석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지식과 학문을 좇아가기에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분리되어버린 이 나라의 교육의 풍토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 예수 그리스도의 바른 제자를 삼아야겠다는 교육영역에 대한 부르심을 확정했다. 그리고 형편이 어려운 중고등학생을 모아서 말씀대로 가르치는 야학을 시작했다. 그리고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카이스트교회를 개척해 지금까지 섬기게 되었다.
카이스트의 학생들을 섬기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다. 빌립보서에 나오는 말씀처럼 현대 교육이 인간의 배(腹)를 신(神)으로 삼는 것을 향하여 가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중고등학교는 대학에 줄을 서 있다. 대학은 기업에 줄을 서 있다. 또한 기업은 시장(market)에 줄을 서 있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시장은 누구 뒤에 줄을 서 있는가? 바로 인간의 욕망이다. 고상한 말로 ‘니즈’(needs) 즉, ‘사람들의 필요’다. 다시 말하면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들을 향한 끝없는 욕구에 줄을 서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무서운 것은 인간의 욕망을 조정하고 충동질하는 존재가 사탄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것들이 화려하고 좋아 보이지만 실상은 독버섯과 같은 것이다.
좋은 아이디어를 내서 좋은 제품을 생산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시장을 점령하고 사람들의 지갑을 열고 돈을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잘 살자. 배를 신으로 삼자. 인류복지 같은 이름들을 붙이지만 우리의 공교육이 바라보는 작금의 세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흠모할 것이 없고, 볼품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먹어야 한다. 먹어야 산다. 그분만이 진정한 생명의 떡이며, 생명의 음료이다. 생명 자체이며 참된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근거하지 않은 학문은 포도나무에서 떨어진 가지가 말라 비틀어 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쇠락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교육을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자녀를 양육하고 교육하며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결국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알아야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알아야 하는 것은 신학자들만의 몫이 결코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알아야 할 필수사항이다.
하나님 나라의 가장 중요한 핵심요소는 관계에 있다. 가정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집과 풍성한 먹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정말 사랑하는 관계인가에 달려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 나라가 온통 화려한 금은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다는 사실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관계에 있다. 이것은 성경 전체의 주제이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생애는 철저히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삶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것이 아무 것도 없으셨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이셨다. 성령님도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시고 오직 예수님을 증거하는 진리의 영으로 계신다. 즉 삼위 하나님의 관계는 서로 비교하고 경쟁하는 관계가 결코 아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상대방을 위해 존재하는 관계인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핵심 요소이며, 생명의 본질이다. 생명력이 있는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 풍성한 열매를 맺듯, 생명의 본질은 십자가의 원리인 것이다.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 나라
반면 세상은 비교를 통해서 동기부여를 한다. 비교는 두 대상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비교는 ‘자기의식’에서 출발한다.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가 없어지는 순간, 곧바로 자기가 나타나고 비교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경쟁과 시기와 질투와 물고 죽이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울이 자신을 다윗과 비교하기 시작할 때에 그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스스로 망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이와 같다.
세포로 비유하자면, 우리 몸의 세포 중에서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 세포가 정상적인 세포이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고 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서 존재하는 세포가 있다. 바로 암세포다. 암세포가 힘을 얻고, 몸의 어느 세포보다 강력하게 세력을 확장해 나가면 나갈수록 결과는 모두의 죽음이다.
장갑덕 목사 (카이스트교회)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우리가 교육을 통해 듣는 이야기들은 우리 안에서 나름대로의 논리를 따라 ‘믿음체계’ 즉, 가치관을 형성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가치관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교육이 갖는 엄청난 중요성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제를 하나하나 되짚어 볼 뿐만 아니라, 이 문제를 복음 앞에서 처리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순순한 복음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교육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복음도 왜곡되고 변질되면 곧바로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듯 교육도 마찬가지다. 교육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말 중에 ‘자기주도형 학습’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교육도 성령께서 주도하셔야 할 일이지 내가, 자아가 주도할 일이 아닌 것이다.
성령께서 주도하셔야할 교육
나는 교회도 없는 시골 동네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1학년 때에 삶의 소망을 발견하지 못하고 ‘인생의 결론은 죽음이구나’를 깨닫고 자살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때 친구에게 들었던 ‘창조자 하나님’이라는 분이 기억이 났다. ‘그분이 나를 지었다면 그분에게 해답이 있겠구나’라고 생각하고 음성 나환자촌에 있는 교회까지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 거듭남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 학교생활은 혼란스러워져 갔다. 창조주이고 구원자이시며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실제인 것을 경험한 나로서는 학교에서는 그 하나님을 전혀 만나볼 수 없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결국 하나님을 알고 싶어 신학 대학교에 진학했다. 대학을 다니면서 성경적 관점에서 기독교 철학과 세속 철학을 비교하며 고민하는 시기를 보내며 의문들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배(腹)를 신(神)으로 삼는 교육 현실
이후 부르심을 놓고 기도했다. 진리의 반석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지식과 학문을 좇아가기에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분리되어버린 이 나라의 교육의 풍토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 예수 그리스도의 바른 제자를 삼아야겠다는 교육영역에 대한 부르심을 확정했다. 그리고 형편이 어려운 중고등학생을 모아서 말씀대로 가르치는 야학을 시작했다. 그리고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카이스트교회를 개척해 지금까지 섬기게 되었다.
카이스트의 학생들을 섬기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다. 빌립보서에 나오는 말씀처럼 현대 교육이 인간의 배(腹)를 신(神)으로 삼는 것을 향하여 가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중고등학교는 대학에 줄을 서 있다. 대학은 기업에 줄을 서 있다. 또한 기업은 시장(market)에 줄을 서 있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시장은 누구 뒤에 줄을 서 있는가? 바로 인간의 욕망이다. 고상한 말로 ‘니즈'(needs) 즉, ‘사람들의 필요’다. 다시 말하면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들을 향한 끝없는 욕구에 줄을 서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무서운 것은 인간의 욕망을 조정하고 충동질하는 존재가 사탄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것들이 화려하고 좋아 보이지만 실상은 독버섯과 같은 것이다.
좋은 아이디어를 내서 좋은 제품을 생산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시장을 점령하고 사람들의 지갑을 열고 돈을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잘 살자. 배를 신으로 삼자. 인류복지 같은 이름들을 붙이지만 우리의 공교육이 바라보는 작금의 세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흠모할 것이 없고, 볼품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먹어야 한다. 먹어야 산다. 그분만이 진정한 생명의 떡이며, 생명의 음료이다. 생명 자체이며 참된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근거하지 않은 학문은 포도나무에서 떨어진 가지가 말라 비틀어 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쇠락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교육을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자녀를 양육하고 교육하며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결국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알아야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알아야 하는 것은 신학자들만의 몫이 결코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알아야 할 필수사항이다.
하나님 나라의 가장 중요한 핵심요소는 관계에 있다. 가정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집과 풍성한 먹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정말 사랑하는 관계인가에 달려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 나라가 온통 화려한 금은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다는 사실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관계에 있다. 이것은 성경 전체의 주제이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생애는 철저히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삶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것이 아무 것도 없으셨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이셨다. 성령님도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시고 오직 예수님을 증거하는 진리의 영으로 계신다. 즉 삼위 하나님의 관계는 서로 비교하고 경쟁하는 관계가 결코 아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상대방을 위해 존재하는 관계인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핵심 요소이며, 생명의 본질이다. 생명력이 있는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 풍성한 열매를 맺듯, 생명의 본질은 십자가의 원리인 것이다.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 나라
반면 세상은 비교를 통해서 동기부여를 한다. 비교는 두 대상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비교는 ‘자기의식’에서 출발한다.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가 없어지는 순간, 곧바로 자기가 나타나고 비교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경쟁과 시기와 질투와 물고 죽이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울이 자신을 다윗과 비교하기 시작할 때에 그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스스로 망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이와 같다.
세포로 비유하자면, 우리 몸의 세포 중에서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 세포가 정상적인 세포이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고 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서 존재하는 세포가 있다. 바로 암세포다. 암세포가 힘을 얻고, 몸의 어느 세포보다 강력하게 세력을 확장해 나가면 나갈수록 결과는 모두의 죽음이다.
복음기도동맹 세미나 강의내용 요약
[복음기도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