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잠 13:20)
본지가 [동행]이란 코너를 통해 믿음의 삶을 소개합니다. 노년의 독자들에게는 추억과 재헌신의 결단을, 다음세대의 독자들은 도전과 권면의 글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그가 나를 데리고(2)
1950. 6. 25. 주일, 오전 10시는 아버지와 우리 사이를 영원히 갈라놓았다.
그 당시 포천 근처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그 일요일이 마침 당직이었는데, 10시에 피난민들을 학교에 모시느라고 동분서주하였고, 어머니는 두 돌이 채 안된 아기인 나와 초등 1학년 8살 오빠를 데리고 할머니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 중이었다. 어머니가 이 일을 마치고 오니 학교는 텅텅 비고 아버지는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가족과 헤어진 아버지는 전쟁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가족을 찾아 헤매다가 “이 한 몸이라도 조국을 위해!” 자원입대하셨다. 전투 중 편지 두 통, 그 후 전쟁이 끝나고야 전사통지 한 장 달랑 받은 것이 끝이었다. 그 전쟁터에서도 쓴 편지 속 부탁은 “교회에 잘 다닐 것과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도시 유학 학창시절에 하숙집 하시는 목사님을 통해(일제 시대에 교회가 다 문 닫자 이분은 남이 안 하고 돈 안 남는 하숙집을 하심)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상태였다. 성경말씀 공부에 빠져들고 비 오는 날은 교회가 머니까 동네 교인들을 모아 예배 인도를 하면서 신학교 가서 목사 되는 것이 소원이었다.
주일이면 아버지는 일찍부터 우리들 목욕시키고 먼저 교회 가서 주일학교를 인도한 후, 교회의 큰 아이들을 보내 우리들을 데려가면 어머니는 마지못해서 예배에 참석하기는 하나 맹숭맹숭하니 있다가 귀가하곤 했다. 그러니 애들과 무엇을 먹고 사냐고 종주목을 대는 부인 말에 기가 눌려 신학교 입학을 서둘지 못하던 차에 전쟁이 터진 것이었다.
그때 어머니는 8살 아들 등에도 한 짐 지우고, 아기인 나를 들쳐 업고 피난 보따리를 이고 들고 아무리 피난을 가고가도 안성까지 가서 더 이상은 갈 수가 없었다.
교회에 찾아가니 목사님이 단칸방에 계신 전도사님께 방 반을 우리 식구들에게 주라고 해서 겨우 거처는 찾았으나 먹고 살길은 막막했다.
어느 날 이북에서 오신 피난민 아주머니가 “새댁 회개해 봤수?”하고 물어왔다. 어머니는 그 말에 “나는 천석꾼 막내딸로 자라서 남의 집밥 한술도 안 먹어본 사람이라 회개할 것 없어요.” 했단다. 그런데 그날 밤부터 여러 가지 죄를 지은 것이 계속 떠올라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피난민이 너무 많아서 학교에 임시교회로 정한 곳을 찾아가니 이미 여러 사람이 와서 기도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날 밤새도록 올케와 가족 사이를 이간질하고 고자질한 것, 특히 아버지를 신학교에 못가게 해서 어머니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여 울고 또 울었다. 그때 신학생들은 이승만 박사가 다 일본으로 옮겨 보호했으니, 남편 죽게 한 죄는 어머니께 있다고 느껴진 것이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오이 서리도 해 먹고 하는 일들을 비난한 것 등 회개하느라 눈물 콧물 쏟으며 잠잘 사이도 없었다.
그 날 이후 어머니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었다.
새벽예배는 물론 모든 예배에 맨 앞자리에 가서 목사님 말씀에 심취하며 신앙이 점점 성장했다. 늘 내가 앞에서 알짱거리니 애기 있는 분은 뒤로 가라고 해서 “주님, 이 아이가 예배 시작하면 자게 해 주세요.” 기도하니 그날부터 예배만 시작하면 나는 어머니 무릎 베고 잠들어 예배 끝나야 깨곤 했단다.
모두가 전쟁 때문에 북한 괴뢰 집단을 미워하는데 그때부터는 기도 용사가 되어 그들도 “회개하고 예수님 믿어 구원받게 해 주세요.” 하며 나라를 위한 기도, 세계 평화를 위한 기도를 쉬지 않으셨다.
어머니가 소금을 도매로 사서 머리에 이고 와서 소매로 팔면 조금 돈이 되었는데 어느 날은 병이 나서 돈을 한 푼도 못 벌었다. 집에 와서 주님께 “주님, 우리 식구 오늘 먹을 것이 없어요.” 기도하고,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서 목사님 댁으로부터 시작해서 여러 집에 물을 가득가득 퍼다 주었다. 물 일을 다하고 집에 와보니 ‘따뜻한 밥 한 상’이 와 있었다.
전도사님이 눈치를 챈 것이다.
아 저 집에 오늘 때 거리가 없구나! 얼른 밥을 하고 반찬이랑 해서 우리 집에 갖다 놓은 것이었다. 전쟁은 상처만 남기지만 ‘어머니의 믿음의 기도’는 항상 기적을 낳고 한 여인과 고아 같은 우리들을 보듬으시는 주님의 날개 아래 품어진 것이었다.
다시 그 먼 길을 걷고 걸어서 남편이 근무하던 지역으로 왔건만 교사직을 하던 남편이 없으니 아버지 친구는 교장이 되었으나 우리의 삶은 말이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 가족은 영양실조로 오빠와 어머니는 염병에 걸리고 나는 앉은뱅이가 되었다.
어느 날 화장실에 갔는데 일어나지 못했다.
아버지 절친 “이 선생님”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분은 전기사고로 한 팔과 한 다리를 못쓰는 분이지만, 신앙은 출중했다. 우리가 병들어 있으니 목발에 의지해 절뚝거리며 이집 저집 다니며 동냥을 해서 우리 식구가 굶어 죽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하루는 이분이 오셔서 앉은뱅이 된 나를 붙들고 간절히 기도했다.
근데 웬일인가! 내가 두 다리로 설 수 있게 멀쩡해졌다. 참 신기한 그 날 일이 지금도 내 기억에 남아 생생하다. 희생의 사랑에 맥 못추시는 하나님! <계속> [복음기도신문]
황선숙 | 강변교회 명예전도사. 서울신학대학교 졸. 강변성결교회 30년 시무전도사 역임.
<저작권자 ⓒ 내 손안의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복음기도신문. 출처를 기재하고 사용하세요.> 제보 및 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