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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선 칼럼] 나라를 지키는 군인 정신과 조국 통일

▲ 백마고지 군사들을 격려하는 김종오 장군. 사진: 네이버 블로그 부용이야기 캡처

공군 목사 이야기(14)

1. 교련과 문무대(文武臺)의 기억

시간을 거슬러 기억을 말하게 된다. 1980년대 한국 고등학교에는 교련이란 수업이 있었다. 학생이 기초 군사훈련을 받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지금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에서 신라가 강해졌던 것은 화랑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화랑도는 청소년 수련체제이면서 동시에 군사로 변할 수 있는 조직이었다. 나라가 강성하려면 국민의 정신이 강성해야 한다. 강성함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중의 첫째요 기본은 군사력으로 강함이다. 그것도 화랑도와 같이 정신 무장이 되어 있는 강성함이다. 내가 군산 비행단에 있을 때에 포대 병사에게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했을 때에 ‘생각해 보겠다’는 정도의 대답이 나와서는 안 된다.

말이 다른 곳으로 새려 한다. 당시 나의 교련 점수는 120점이었다. 실제로 120점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군인으로서 학생들의 교련 훈련을 위해 학교에 파견되어 있던 하사관이 교련 실기 시험을 보면서 엎드려 쏴 자세를 한 나를 보더니 눈빛이 살아 있다고 하면서 120점을 준다고 말했다. 실제 점수는 100점이 최고여서 100점으로 기록했다. 나는 군목이 되기 전에 벌써 군인다운 어떤 정신이 있었다.

대학 시절에는 1학년 때에 성남에 위치한 문무대라는 곳에 1주일 간 입소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들어가자마자 2분의 시간 내에 분배해준 이름표를 군복에 다는 명령이 떨어졌다. 태어나서 한 번도 바느질을 해보지 않은 나는 우선 바늘귀에 실을 꿰는 것 자체도 어려웠다. 더 문제는 도대체 바느질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옆 친구가 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 따라하는데 하다가 그만 바늘이 손가락에 푹 들어갔다. 꽤 박혔는데도 너무 긴장을 해서 그런지 아픈지도 잘 모르겠고 비명도 안 질렀다. 아니 못 질렀다. 2분이 지나서 그 이름표를 단 군복을 입고 다시 내무반을 떠나 연병장에 집합했는데, 나의 이름표는 한 부분만 옷에 너덜너덜한 채 걸려있는 것이지 꿰매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훈련은 나중에 3사관학교에서 받은 것과 비슷했다. 그런데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월요일에 문무대에 입소하여 금요일에 학교로 돌아왔다. 그 1주일 사이에 온도 변화가 컸다. 마지막 추위가 지나고 봄꽃이 피는 시기였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나는 1주일 간 단 한 명의 여자를 볼 수 없었다. 그런데 학교로 돌아와 꽃은 피었지 날씨는 따뜻하지 꽃무늬 치마와 청색 재킷을 입은 여학생 등 예쁘게 차려입은 여성들이 화장품 냄새를 풍기며 화사하게 웃으며 지나갔다. 비록 자기들끼리 말하고 웃으며 지나가는 것이지만 마치 나를 향해 웃어주는 것 같았다. 눈물이 나도록 기뻤다. 아, 나는 아담의 후손이 틀림없다. 나의 조상이 여자를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한 것을 아주 온 몸과 온 마음을 다해 ‘아멘’한다. 나는 문무대라는 지옥에서 금요일 날 구원받았다. 그러나 그때는 이 모든 것이 국방을 위한 누군가의 수고의 대가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2. 전방입소에서 들은 6.25전쟁

대학 2학년 때는 전방에 1주일 간 입소했다. 육군 몇 사단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 가지 아는 것은 북한 GOP가 약 800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거리가 평지에서는 꽤 긴 거리로 느껴질 수 있으나 휴전선 철책에서는 산허리에서 서로 쳐다보는 것이라 사실은 매우 가깝게 보인다.

이곳에서는 군사 훈련을 받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군사 훈련이 아니라 학생들로 하여금 나라가 어떻게 지켜지고 있는 지를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지금 나는 수십 년이 지나 그때를 회상한다. 그리고 지금 학생들도 그 때처럼 문무대와 전방 입소를 해보는 것이 좋다고 본다. 특히 여학생들도 여군이 되어 이런 경험을 해보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대통령이라면 나는 교육법을 그렇게 바꿀 것이다.

한 지휘관이 한국전쟁사에 관해 말해주었다. 그 때 들은 것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으로부터 해방 이후 한국은 박헌영의 남조선 노동당 세력에 의해 불안했다. 북조선 노동당의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 아래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50분 경, ‘폭풍’이란 암호로 전쟁을 시작했다. 김일성은 한 달 내에 전쟁을 끝내려 했다. 세 방향으로 남침을 시작한 북한은 일단 6월 27일까지 서울을 점령하고 다시 남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부전선에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6사단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종오(金鍾五) 제 6사단장은 (당시 계급 대령) 북한군이 전쟁을 일으킬 것을 미리 내다보고 병사들로 하여금 진지를 구축하고 휴가를 금하였다. 그의 예상대로 전쟁이 일어났고 중부전선으로 내려오는 북한군의 진격을 5일이나 늦추었다. 이것 때문에 국군과 미군은 대전 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다시 낙동강 최후의 방어선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전쟁은 김일성의 생각대로 한 달 만에 끝났을 수 있다. 김종오 장군은 휴전을 앞두고 9사단장이 되어 중공군과 함께 고지 점령을 위해 끝없이 싸웠던 백마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966년에 타계하여 국립묘지에 영면(永眠)했다. 나라를 구한 영웅이다.

그런데 김종오 장군은 일본에 쥬오(中央) 대학에 유학을 갔다. 1944년에 일본의 정책에 의하여 학도병이 되었고 똑똑하니까 소위가 되었다. 현재 친일파 인명사전을 만든 사람들의 정의(definition)에 의하면 하사관 이상의 계급이면 친일파라고 했다. 이 정의에 의하면 김종오 장군은 친일파이다. 이 정의를 따르면 동작동 국립묘지에 영면한 장군은 다시 깨어나서 무덤을 옮겨야 한다. 그것이 지금 대한민국 국민이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대한민국을 사회주의 나라로 만들려는 사람들이 선동하는 것인가? 도대체 민족말살정책을 펴는 1940년대의 식민지 조선에서 똑똑한 사람 중에 친일파로 규정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나? 독립 운동하러 만주로 가지 않았으면 조선 땅에 남아 살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을 친일파라고 해야 하나? 똑똑해서 일본의 중간 지도자로 선 사람들이 모두 친일파로 규정되는 것이 올바른 판단이란 말인가? 민족의 비극을 단칼에 잘라서 친일파라고 정의 내리는 그 기준이 정말 적합한 것인지 조금은 그 시대를 입체적으로 보면서 문제가 있음을 느낀다.

구약신학을 전공한 임 ○○ 교수와 대학 동창인데 이 친구와 함께 전방에서 무엇을 하다가 장난을 치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도망을 간 것인지 그 친구가 도망을 한 것인지 여하튼 우리 둘이는 서로 잡으려고 뛰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길 양옆으로는 모두 지뢰밭이었다. 우리를 인솔해서 이동하던 군인은 뒤쫓아 오면서 얼굴이 새하얘졌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그렇게 뛰다가 길 이외에 숲속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는 명령을 잊고 들어가게 된다면 그야말로 지뢰가 터지게 되는 것이다. 대학생 데려다 놓고 통솔을 제대로 못해서 사고가 난다면 매우 큰 일이다. 절대로 사고가 일어나면 안 되었다. 아무 일이 없었지만 그 병사에게는 참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3. 철책 경계 근무를 선다는 것

당시 지휘관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려본다. 당시 일반 사병에게는 M16 소총이 지급되었다. 또 이들에게는 30발 탄창 2개와 수류탄 두 개가 지급된다. 초소에는 좌우에 클레이모어가 있고 방아쇠가 있다. 야간 초소 근무 때에 만일 적으로 여겨지는 소리가 나면 소리 나는 쪽의 클레이모어를 터뜨린다. 이 무기는 수류탄처럼 쇠 파편이 전방으로 퍼져나가 대대 병력을 살상할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을 갖고 있다. 후폭풍도 약 15미터 정도가 되기 때문에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놓고 폭발스위치를 누른다. 클레이모어를 터뜨린 다음에는 수류탄 두 개 그러니까 초병이 둘이니까 네 개가 터진다. 그 다음 M16 소총을 자동으로 놓고 30발을 한꺼번에 쏜다. 두 초병이 쏘니까 60발을 쏜 것이다. 그 다음에 탄창을 갈아 끼고 자동이 아니라 한발씩 사격할 수 있도록 수동으로 놓고 소리 나는 쪽을 겨냥하고 응시한다. 그러면 전방에서는 총, 수류탄 등 터지는 소리가 나면 자동으로 비상이 걸리고 아군이 도우러 온다.

한번은 초소의 전방에서 이런 소리가 나서 매뉴얼대로 사격하고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다. 아침이 되고 조사를 했을 때에 그 자리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흩어진 멧돼지의 파편이 발견됐다.

추웠다. 정말 그렇다. 비상이 걸렸을 때 철책 초소 근무는 밤 10시부터 아침 6시까지 2시간을 자고 2시간을 경계 근무를 서는 형태로 진행된다고 한다. 2시간이라도 일반 가정집에서 자는 것처럼 잔다면 피곤이 좀 풀릴 것이다. 그런데 전방의 내무반은 보급된 모든 군복을 다 껴입고 자도 제대로 잠이 들지 않을 정도로 추웠다. 겨우 잠들만 하면 보초 교대할 시간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밤 시간을 보내며 생활하는 것은 참으로 힘들었다. 지금은 군인들을 위한 환경이 좋아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1980년대 전방의 내무반은 정말 추웠다.

그렇게 춥게 초소 근무를 서다가 새벽을 맞았다. 북한 국가로 추정되는 노래가 들려왔다. 노래가사는 없이 음악만 나오는데 멋있어 보였다. 그 때는 왜 같은 민족이 이렇게 나누어져 있어야 하는 슬픔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사실 낮에 보았을 때에 북한 초소의 움직임이 보였다. 놀라운 일이다. 적이라고 서로 총구를 겨냥하고 있는데 그것이 같은 민족이라니. 그 때는 감상적으로 민족의 통일을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실제적 통일관을 갖고 있다. 만일 남한이 감상적 평화와 통일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허튼 생각일 뿐이다. 북한 공산당이라는 것은 남한의 순수하고 감상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대학생 때에 문익환 목사가 통일을 위해 우리 민족이 몸으로 지뢰 하나씩 터뜨려서라도 통일을 하자는 말에 동의했다. 그렇게 나는 감상적으로 뜨거웠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통일이 되나? 지금은 그런 말에 의심을 품는다. 문익환 목사가 지금의 내 나이였을 때에 그런 발언을 했다는 것은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나이에 그런 감상적 통일관을 말할 수 있나? 그렇게 해서 통일이 되나? 통일을 정말 책임지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해서 평화가 있고 통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대한민국은 북한과 중국의 조선족과 중앙아시아의 고려인과 일본의 재일교포, 그리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쓴 재미교포와 그 밖의 교포들에 대해서 문화적으로 책임이 있다. 가장 자유가 있고 개인의 책임에 의해 창의성을 발휘하며 단지 돈에 대한 탐욕이 아니라 그 돈을 투자로서 전환하여 자본주의의 발전을 통해 민족 번영의 길을 열어야 할 책임이 있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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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선 선교사 | GMS(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선교회) 소속으로 중국에서 사역 중 추방된 이후 인터넷을 활용한 중국 선교를 계속 감당하고 있으며 세계선교신학원에서 신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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