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은 세상적으로 잘살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무대 중앙에 세우면서 가치가 역전된 ‘거꾸로의 나라’임을 선언한다 ”
레슬리 뉴비긴은 “기독교의 이야기는 단지 옆에 두고 바라만 보는 렌즈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 눈에 쓰고 들여다보는 렌즈가 된다.”라고 말했다.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는 실제 삶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도 로마서 1-11장에서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교리를 풍성하게 제시한 뒤 12장 1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라고 말한다. 성경은 복음이 삶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치는 힘이 된다고 말한다.
팀 켈러는 신약학자인 사이먼 개더콜(Simon Gathercole)이 말하는 복음의 개요를 통해 복음의 무궁무진한 영향력을 볼 수 있는 세 가지 공통적인 진리가 있다고 말한다.
1. 성육신과 위에서 아래로 임하는(Upside-down) 복음의 속성
‘위에서 아래로 임하는’ 복음의 속성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고자’하는 세상의 가치관과 반대되는 속성이다.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종이 되셨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세상의 가치를 전복시키는 방식으로 임한다. 성경은 세상적으로 잘살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무대 중앙에 세우면서 가치가 역전된 ‘거꾸로의 나라’임을 선언한다.
팀 켈러는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여인’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창세기에 나오는 ‘레아’를 언급한다. ‘레아’는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한 여인이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레아에게 다가가셔서 “내가 너의 진짜 신랑이다. 나는 남편없는 자들의 남편이며, 고아들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시고, “설령 레아의 남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지라도, 나는 레아의 남편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팀 켈러는 하나님이 이렇게 레아를 사랑하고 선택하시는 이유는 단지 약자를 편애하셔서가 아니라 그것이 복음의 속성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여인을 세상의 구원을 담당한 분이신 예수님의 어머니로 만드는 것이 바로 ‘위에서 아래로 임하는’ 복음의 속성이다. 이 레아의 모습은 예수님을 닮았다. 예수님도 구유에서 태어나셨고 우리가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 자기 백성마저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버렸으며, 심지어 하나님도 예수님을 원하지 않으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시며 예수님은 죽음을 맞이하셨다. 어째서 예수님은 아무도 원치 않는 사람이 되셨을까? 바로 우리를 위해서다. 예수님은 친히 사람이 되셔서 겪으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그런 연약함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시다. 구원은 이렇게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희망이 없고, 윤리적 실패자며, 죄인이어서 완전히 망했으며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런 소망도 없는 레아와 레아의 자손을 위해 위에서 아래로 임한 것이다.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
2. 속죄와 안에서 바깥으로 임하는(Inside-out) 복음의 속성
바리새파 사람들은 내적 측면보다 외적 측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했다.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삶의 변화는 언제나 내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세상은 내가 무엇을 행하면 그 대가로 상을 받을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복음은 그 반대다.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시고 은혜로 값없이 사랑하셨음을 깨닫게 되면 비로소 내면의 기쁨과 감사가 생기고 그 은혜로 그분께 순종하는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종교는 바깥에서 우리 내면을 강요하는 것이라면, 복음은 우리 안에서 바깥으로 솟아나는 것이다.
팀 켈러는 누가복음 15장을 설교하면서 집을 나갔다 돌아온 둘째 아들을 향해 분노하는 첫째 아들을 언급한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 15:29-30)
첫째 아들은 자신이 “아버지의 명을 섬겨 어김이 없었다”라고 항변한다. 율법에 순종하고, 교회 생활을 충실하게 했다는 것이다. 결국 첫째 아들은 외적인 행위를 통해 보상을 얻으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었다. 팀 켈러는 “자기가 주인이 되는 두 가지 길 중 하나는 도덕률을 깨뜨리면서 마음대로 사는 길이고, 또 하나는 모든 도덕률을 지키고 지극히 선한 삶을 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첫째 아들은 선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잃은 것이 아니라, 그 선함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을 잃은 것이다. 첫째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장애물은 그의 죄가 아니라 그의 선한 삶이었다. 그의 악행이 아니라 의로움이 아버지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이 첫째 아들에게 가장 필요한 해결책은 무엇인가? 아버지를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이며, 아버지의 사랑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떤 행위를 하지 않아도 이미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랑을 받는 자녀임을 확신해야 한다. 그것을 확신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다. 예수님은 진정한 첫째 아들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온 우주의 주인이 우리를 사랑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다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모든 변화는 결단과 결심을 통한 행동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의 속성을 누리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나는 이미 용납되었고, 나는 이미 사랑받고 있다. 나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귀한 자녀라는 그 내면의 확신으로부터 변화는 시작된다. 이렇듯 복음은 내면에서 시작하여 바깥으로 임한다. (‘탕부 하나님’)
3. 부활과 미래를 앞서 경험하는(Forward-back) 복음의 속성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그 부활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직 그 나라는 완성되지 않았다. 메시아의 왕국은 두 단계로 도래한다. 예수님이 세상에 처음 오셨을 때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되었지만, 두 번째 다시 이 땅에 오실 때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already)’ 임하였지만 ‘아직(not yet)’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살고 있다. 미래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도래할 것임을 그리스도인들은 확신하며 살아가고 있고, 미래에 임할 하나님 나라의 보증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셨다. 신약학자 조지 래드는 이것을 ‘미래의 현존(The presence of the Future)’이라고 말했고,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은 미래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성령님과 동행하며 오늘 현재 맛보며 사는 삶이다.
팀 켈러는 에베소서 2장을 설교하면서 우리의 몸이 종말에 부활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자신의 부활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이미 부활했다고 말한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4-6)
바울은 구원받은 우리가 이미 영적으로 승천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변화가 단순히 개과천선의 차원이 아니며, 새로운 종교 단체에 가입한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되면 땅에서 하늘로 옮겨진다는 말이며, 내세의 능력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연합된다는 말이다. 하나님께 죽어있었던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들을 수 있는 산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영적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우리가 믿을 때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객관적 진리와 미래의 원리를 바탕으로, 천국의 삶이 지금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에게 주관적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미래에 처할 최종상태를 이미 지금부터 맛보기로 경험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자유롭게 변화되어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마음속에 하나님의 실재와 영광과 사랑을 느끼며,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들로 더불어 새로운 사랑의 연대를 이룬다. 영적 부활이란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으면서도 어떤 의미에서 하늘에 산다는 뜻이다. 현재 속에서 미래를 산다는 뜻이다.” (‘부활을 입다’)
사이먼 개더콜이 언급한 복음의 세 가지 속성은 다양한 성경 본문에서 복음의 부요함을 드러내주는 좋은 도구가 된다. ‘위에서 아래로 임하는 속성’은 교회를 진실한 공동체, 헌신적인 구제와 자원의 나눔 그리고 영적 훈련, 계층간 화해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모습으로, ‘안에서 바깥으로 향하는 속성’은 개인의 회심, 은혜에 대한 각성, 복음 전도, 교회 개척 등으로, ‘미래를 앞서 경험하는 속성’은 도시와 이웃의 복지, 사회 참여, 문화 변혁, 그리고 기독교 세계관으로 사람들을 훈련하게 하고 직업과 신앙을 통합하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복음의 세 가지 속성을 이해할 때, 우리는 좀 더 풍성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고, 그 영향력은 더 크고 넓게 공동체 안에서 나타나게 된다. 복음은 단지 옆에 두고 바라만 보는 렌즈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 눈에 쓰고 들여다보는 렌즈가 된다. 그렇게 복음은 우리의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은 미래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성령님과 동행하며 오늘 현재 맛보며 사는 삶이다 ”
고상섭 목사 | 영남신학대학교와 합동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그 사랑교회’를 개척해 섬기고 있다. ‘팀 켈러 연구가’이자 CTC코리아 강사로 활동하고 있고 최근 공저한 ‘팀 켈러를 읽는 중입니다’ 를 출간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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