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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TGC 칼럼] 아플 때까지 듣자

pexels의 Bayram Yalçın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는 문제가 하나 있다면, 듣는 것이다. 진짜로 듣는 것 말이다. 내 마음은 항상 시속 100마일을 달린다.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쉬지 않고 움직인다. 누가 말을 걸면 잠시 집중하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주의를 기울이지만, 어느새 내 생각은 미래를 향한다. 다음 스케줄, 새로운 칼럼에 대한 아이디어, 가족이나 친구, 팟캐스트 세그먼트, 좀 있다가 뭘 먹지 등등. 사실 나는 대부분의 경우에 반만 듣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나를 보고 제대로 듣지 않는다고 말하는 친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이 이리저리 움직일 때 그들은 바로 알아차린다. 내 가족은 어떨까? 그들은 내게 듣는 능력을 개선하라고 충고할 것이다. (아내에 비하면 나는 비참할 정도로 형편없다!) 지난 몇 년 동안 조금 나아졌을지 모르지만, 온전히 상대에게 주의를 기울일 만큼 마음의 속도를 늦추는 것은 여전히 내가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다.

느림의 미학

크리스틴 로젠은 최근에 쓴 The Extinction of Experience: Being Human in a Disembodied World(경험의 멸종: 육체가 없는 세상에서의 인간됨)에서 디지털 시대에 시, 음악, 예술의 아름다움에 몸을 맡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탐구한다. 점점 더 주의가 산만해지고, 우리는 거의 속도를 늦추지 않고 오로지 눈앞에 있는 것에만 온전히 집중한다. 그녀는 잘 알려진 인용구를 소개한다. “대부분의 예술 작품은 천천히 비밀을 드러낸다.”

예술에 대한 이 말이 사실이라면, 성경에 대해서는 어떨까? 더 그렇지 않을까? 성경은 결코 쉬운 책이 아니다. 성경이 쉽지 않다고 해서 그 핵심 메시지인 구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구원을 보여준다. 하지만 성경은 요구하는 게 있다. 생각과 인내와 헌신이다. 성경을 진정으로 내면화하고 소화하는 길은 험난하다. 그건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졌다. 왜냐하면 바로 그게 성령이 우리 삶에서 일하시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소음 너머 듣는 소명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기 어려운 이유가 무엇일까? 휴대폰과 각종 기기, 바쁜 일정, 또는 끝없는 정보의 흐름을 들 수 있다. 정보는 말 그대로 과부하이자 쉬지 않고 터지는 폭격과 다르지 않다. 우리의 주의를 끌기 위해 경쟁하는 뉴스와 논평은 끊이지 않고 흘러들어온다. 하지만 산만함을 일으키는 이유의 일부가 전혀 다른 출처라면 어떨까? 치과에서 듣는 라디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배경 잡담으로 전락시키는 종교적 일상이 그 원인이라는 생각을 한 적은 없는가?

행여 종교 활동, 심지어 교회 생활이 나로 하여금 진짜 제대로 듣지 못하게 하는 건 아닐까? 심지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선포하실 때, 도무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조차 모를 정도로까지? 그래서 우리는 계획하고, 준비하고, 심지어 그분의 입을 막고 가로채서 말하기까지 한다. 우리는 행여 사역의 바쁨이라는 핑계로 그분의 음성을 피하고 있지는 않은가?

변화산의 베드로를 생각해 보자. 그는 엘리야와 모세 곁에서 영광 가운데 빛나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첫 반응이 무엇이었는가? 말하고, 계획하고, 제안하고, 전략을 세우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전까지, 그는 무언가를 하려고 서두르고 있었다. 그런 그를 멈춰 세운 건 아버지의 음성이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의 말을 들어라!”

명령은 뭔가를 하라는 게 아니었다. 무슨 말을 하라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전혀 아니었다. 오로지 들으라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영광 앞에서 인간의 종교성은 벗겨진다. 좋은 의도가 녹아내린다. 영적 훈련은 쪼그라든다. 우리의 임무는 오로지 하나, 듣는 것이다.

아플 때까지 듣자

존 웹스터는 Confronted by Grace: Meditations of a Theologian(은혜가 다가오다: 한 신학자의 묵상)에서 이렇게 썼다.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다시 스위치를 끄기 전에 잠시나마 생각 없이 주파수를 맞추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진정한 경청, 강렬한 경청, 고통스러운 경청을 의미한다. 말씀하신 것을 주의 깊게 듣고, 예수님께 주의를 기울이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이 그분이기 때문이다. 그분 안에서, 또 그분으로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빛이신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신다.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라. (96)

진정한 경청. 강렬한 경청. 고통스러운 경청. 인내심과 결단력을 가지고 성경을 깊이 파고들라. 성령께서 우리가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부요함과 심오함으로 밝혀 주실 것을 믿으라.

우리는 수많은 목소리가 주의를 끌려고 발버둥치는 세상, 온갖 곳에서 인플루언서들이 상품을 팔기 위해서 소리를 지르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각종 목소리와 인플루언서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교회가 끊임없이 소음을 내는 또 다른 장소가 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단지 배경 수다로 전락한다면,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세상 온갖 것에는 귀를 기울이는 우리가 정작 창조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능력을 키우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아마도 오늘날 우리가 키울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이고 반문화적인 실천이 하나 있다면, 말씀을 듣는 데 필요한 강렬한 집중력 배양일 것이다. 말씀으로부터 나의 초점을 빼앗는 그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결단이다.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며 축복을 받을 때까지 그분을 놓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도 아플 때까지 듣는 것이다. [복음기도신문]

원제: Listening That Hurts

트레빈 왁스(Trevin Wax) | LifeWay Christian Resources의 신학과 커뮤니케이션학과의 부학장이며 Wheaton College의 외래 교수이고, The Gospel Project의 편집자이다. ‘디스 이즈 아워 타임’, ‘일그러진 복음’, ‘우리시대의 6가지 우상’, ‘Gospel Centered Teaching’을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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