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선교사’로서 사역을 한다. 하지만 그녀가 소위‘선교사’인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전통적인 선교사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점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선교사로서 파송예배를 드린적도 없다. 그러니 파송장도 없다. 선교사로 임명한 단체도 없다. 그녀의 후원을 위한 선교후원회도 없다. 선교사훈련을 공식적으로 받은 적도 없다. 후웨이나라는 몽족을 위한 교회의 선교사 ‘푸앙락’에 관한 이야기다.
푸앙락은 올해 42세의 여성이다. 매홍손도의 깽홈교회에서 개척한 몽족마을 후웨이나를 담임하고 있다. 카렌교회의 몽족선교는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은 영역이다. 선교하는 카렌교회가 되는 것이 소망인데, 이것을 구체화하는 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10여년 전에 깽홈교회를 방문할 때 그 소식을 들었다. 바로 옆에 있는 몽족마을에서 그 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당시 소수의 교인들이 모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이번에 깽홈교회를 방문하면서 몽족교회 소식을 질문했다. 담임목회자를 통하여 그 동안의 이야기를 듣는데 깜짝 놀랐다. 교인들이 백명이 넘게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했다고 한다. 카렌침례교회가 개척한 타민족교회에서 이렇게 성장하는 경우는 처음이다. 그 이유가 궁금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 교회를 담임하는 사역자 ‘푸앙락’ 때문이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서 같이 만나자고 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듣고 싶었다.
그녀는 외형적으로 눈에 띄는 여인이 아니다. 평범하다 못하여 연약함마저 느껴진다. 정규적인 학교는 초등학교만 나왔고 통신과정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신학과정은 3개월 단기과정을 한 이후 비정규 과정으로 공부를 한 것이 전부다. 육체적으로나 학력으로 자랑할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 그의 몽족을 위한 사역의 여정들을 이야기할 때는 외적인 연약함과 대조적인 에너지를 느낄 수가 있었다.
“작년에 종교지도자가 회심하여 40명 정도의 가족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35가구인데 이제 102명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했습니다.”
선교지에서 소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하나님의 역사가 깊은 산속에서 역동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녀의 몽족교회를 위한 헌신이 궁금했다.
“카렌 여성으로 어떻게 해서 몽족교회에서 일을 하게 됐습니까?”
2008년 그 마을을 방문하게된 그녀는 한 노인의 간청을 잊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 마을의 영혼을 돌보아야 하겠다는 부르심을 느꼈다고 한다. 깽홈교회는 이미 20여년 전부터 바로 옆 마을인 후웨이나 몽족 마을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렇지만 정기적으로 방문하지는 못했다. 절기 때 방문하고 필요할 때 돌보고 비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정도였다. 그녀도 그런 방문팀으로 갔다. 그런데 그 노인의 간청이 푸앙삭의 마음속에서 계속 메아리쳐 울린 것이다. 이후로 매 주일마다 몽족마을에서 복음을 전하고 예배를 인도했다. 그때 그녀의 나이가 21세였다.
“처음 일부 교인들은 몽족 마을에 정기적으로 가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가지 않으면 그들을 복음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의 고백 속에는 하나님과 복음을 위한 뜨거운 사랑과 헌신이 녹아있었다. 처음에는 깽홈교회에서 그녀의 사역을 지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2018년에 처음으로 월 200받(약 7000원)을 지원했다. 그러다가 작년 2020년부터 월 1500받(약 50000원)으로 올렸다. 일반적인 한국 선교사의 후원 내용과 전혀 다른 액수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선교사로서의 부르심과 헌신, 그리고 사역의 결실은 한국 선교사가 본 받아야 할 내용이다.
더 놀라운 이야기를 한다.
“올해부터 후웨이나교회에서 저를 위해 1000받을 사례비로 주기 시작했습니다.”
후웨이나교회는 작년부터 헌금이 많아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일부를 그들을 돌보는 영적 목자인 푸앙락에게 주기 시작하였다. 이제 성인으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자립의 모습은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지금 교회건축을 계획하는데 약 100만 받(약 3500만 원) 정도가 됩니다. 외부지원을 받지 않고 그들 스스로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안내하려고 합니다.”
놀랍게도 모교회인 깽홈교회의 자립 전통이 자연스럽게 몽족교회에게 흘러가고 있었다. 깽홈교회의 교회당과 회의실 등의 건축을 진행하며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요청할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은 교인들의 마땅한 책임임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성숙한 모습이 아직도 어린 몽족교회에 자연스럽게 이식되고 있었다. 잠시 그 몽족 마을을 방문하여 그 교회 지도자를 만나면서 그것을 확인했다.
한국교회에서 파송한 많은 선교사의 교회 개척 패턴이 있다. 개척한 교회가 스스로 교회당을 건축하고 스스로 목회자의 사례비를 주는 것이 목표이다. 그런데 소위 개척한 많은 교회가 스스로 건축하지 않고 한국교회의 후원을 기다린다. 개척한 교회 사역자의 사례비도 한국교회를 의지하는 경향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카렌교회인 깽홈교회의 후웨이나 몽족교회의 경우는 매우 다른 양상이다. 사역자의 사례비는 물론이고 교회건축도 스스로 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학력도 미약하고 외모는 평범하다. 파송예배도 없었고, 선교 후원회도 없고 선교사라는 공식명칭도 없는 그녀가 왜 이렇게 커보일까? 어쩌면 그녀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선교의 원형에 더 충실한 모습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선교 이야기들 속에는 이름조차 나와 있지 않은 많은 무명의 선교사들이 있다. 세상에서의 인정은 커녕 오히려 박해와 환란 중에도 복음을 전했다. 하나님이 부르신 선교사의 삶을 묵묵히 걸어갔던 분들이다. 그 분들의 섬김들이 있었기에 하나님 나라는 누룩처럼 번져 나갔다.
‘선교사’라는 타이틀이 너무 흔한 세계이다. ‘선교’라는 기관과 훈련이 참 많은 세상이다. 그러기에 많은 선교사들이 ‘선교사’라는 위치를 선명하게 드러내려고 애쓰는 것 같다. 선교에 관한 많은 보고와 소개와 광고가 주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원인이 이것인 듯 싶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깽홈교회’와 ‘푸앙락’ 사역자는 가장 초라하고 처진 주변부의 연약한 존재들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남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의도나 관심은 찾아 볼 수도 없다. 그런데 그들의 현장 이야기는 결코 초라하거나 연약하지 않다. 복음의 역동성이 드러나며, 스스로 헌신하고 드리는 성숙한 이야기가 조용하게 진행되고 있다. 한국교회 선교가 이루고자 하는 선교의 중요한 목표인 ‘자립의 과정들’이 연약한 사람들을 통하여 놀랍게 실현된다. 무명 선교사의 놀라운 현장의 모습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세상 나라와 다름을 다시 실감한다. [복음기도신문]
오영철 선교사 | 1995년 GMS 선교사로 태국에 파송된 뒤, 현지 신학교에서 학생과 목회자를위한 교수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이곳에서 소수부족인 카렌족교회가 주민족인 타이족을 위한 선교적 교회를 세우는데 관심을 갖고 이들을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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