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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칼럼] 다원주의 사상에 대응하라

▲ 사진: freelyphotos.com

다원주의는 성경 역사와 초대 교회 시대부터 등장했지만, 그러한 사상은 근대 및 이후 포스트모던 시대에 이르러 더욱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곳마다 다원주의 사상이 자리해 왔다. 성경적인 신앙생활에 비성경적인 사상과 관습을 양립시키려는 다원주의가 새로운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 역사 가운데 늘 잔존해 오다가 이 시대에 특히 확산되어 신자들에게 깊은 우려를 자아내고 있는 게 사실이다. 다원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에서도 과거와 현재 사이에 큰 차이가 생겼다. 이를테면 성경 및 초대 교회 역사에서 다원주의에 반대하던 모습이 오늘날에는 기꺼이 수용하는 양상으로 바뀌고 있다.

다원주의의 흔적은 이스라엘 초기 역사 때부터 발견된다. 고대 예루살렘 안에는 전통적인 성전 예배와 더불어 우상 숭배가 공존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해마다 절기를 지키며 성전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는 등 기존의 예배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비도덕적인 행위를 일삼으며 바알 신을 숭배한다거나 아니면 암몬 족속이 섬기던 몰렉 신에게 어린아이를 제물로 갖다 바치는 일을 겸하여 했기 때문이다(렘 7:8-10). 이에 선지자들은, 특히 신명기 18장에서 금지하고 있는 이교 관습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끊임없이 질책했다. 일례로 열왕기하 23장은 얼마나 많은 우상 숭배가 이스라엘 사회에 유입되었으면 끝내 요시아 왕이 정화 운동을 벌이게 되었는지를 잘 보여 준다. 마찬가지로 여러 선지자들도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과 행위에서 단일한 토대가 되는 모세 언약을 기억하도록 그 백성을 일깨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초대 교회 유대인의 율법준수 강조도 다원주의의 한 형태

이후 초대 교회 역사에서는 다원주의가 몇 가지 형태로 출현했다. 먼저 유대주의자들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며 반드시 유대인의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그중에서도 특히 할례 의식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영지주의자들도 등장하여 기존 복음서와는 다른 복음서를 제시하며 결혼이나 특정 음식을 금했으며 이를 통하여 더 높은 영적 지식을 획득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 어떤 이들은 천사 숭배라든가 일련의 금욕주의적 규칙들을 강조하기도 했다. 바울은 그러한 다원주의에 대해 “다른 복음”이라고 규정하며 비판했다(갈 1:6-9). 그는 복음만이 유일하게 “바른 말”로서 우리에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이라고 설명했다(딤전 6:3; 딤후 1:13-14).

그런데 이러한 바울의 가르침과 달리, 최근에 교회사 학자들이 입버릇처럼 내세우는 주장이 있다. 바로 초창기 기독교는 단일성을 갖추지 않았으며 매우 넓은 다양성을 띤 신앙 운동으로서 그 안에 서로 다른 견해들이 공존했지만 어떤 견해가 진짜이고 어떤 견해가 가짜인지를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 복음서 저자도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해 다른 이들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을 표현했다고 주장한다. 또 바울 서신도 이신칭의 교리에 기반한 또 하나의 기독교를 대변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와 같은 교회사 학자들은 기독교를 더 이상 단수로 표현하지 않는다. 대신에 각각의 본문과 신학 또는 관습에 따라 ‘기독교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 교리 및 관행의 단일화는 초대 교회 시대보다 훨씬 이후인 국교화가 이뤄질 때 나타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단’과 ‘정통’의 구분도 공의회가 형성된 4세기부터 발생하여 로마 제국의 칙령에 따라 강제적으로 확립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 결과 영지주의 같은 운동은 완전히 진압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승자가 역사를 기록하기 때문에, 이전의 수많은 기독교 견해들은 오랫동안 역사의 이면에 묻히게 되었고,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주의 깊은 연구를 통해 다시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초창기 기독교 변증가들, 단일한 진리를 자랑스럽게 여겨

이렇게 역사를 수정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에는 분명한 오류가 있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이나 신약 시대의 바울이 거짓 교사들을 질책했듯이, 초창기 기독교의 변증가들 역시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들의 가르침을 반박했다. 가령 3세기 초에 히폴리투스는 ‘모든 이단에 대한 논박’(Refutation of All Heresies)이라는 책을 저술했고,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도 교회가 4세기에 이르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단일한 메시지를 가르쳤다는 증거를 남겼다. 이를테면 이레니우스는 185년에 기록한 자료에서 교회는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지만, “한 가정을 이루고 있으며 마치 한 마음을 가진 것처럼 신앙하고 한 입을 가진 것처럼 설교한다. 그리고 세상에는 여러 언어가 존재하지만, 전통의 의미는 하나이고 동일하다”라고 말했다. 터툴리안도 200년 경에 이렇게 기록했다. “내가 첫 번째로 강조하려는 원리는 이렇다. 곧 그리스도께서 하나의 명확한 진리 체계를 세우셨으므로 세상은 이를 수정하지 않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처음부터 기독교를 변증했던 자들은 사도들의 성경적 가르침에서 비롯된 단일한 진리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비록 다원주의는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경 역사와 초대 교회 시대부터 등장했지만, 그러한 사상은 근대 및 이후 포스트모던 시대에 이르러 더욱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와 맞지 않는 이질적인 세계관을 주창하는 자들이 다양한 철학적·문화적 현상을 들어 그들 나름대로 기독교를 재해석하며 여러 가지 대안적인 신앙관을 제시해 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를 전통적인 신앙에 포함시켜야 기독교가 생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수많은 ‘기독교들’이 19세기에 등장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견해들은 사도들이 전수해 준 역사적 신앙보다 당대의 문화적 규범에 더 어울리는 모습을 띠고 있었다.

예를 들어 영국 이신론이 유럽으로 확산된 이후 활동한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기독교를 일종의 합리적인 도덕주의로 새롭게 규정했다. 그는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Religion within the Bounds of Bare Reason, 1793)라는 저술을 통해 명백히 도덕적인 행위만이 참으로 기독교적인 행위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구약성경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고, 타락의 역사성도 거부했으며, 나아가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 사역에 대해서도 도덕적 무책임의 정점에 있다며 경멸했다. 또한 전통적인 기독교 용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그러한 용어를 자주 차용했는데, 예를 들면 ‘거듭남’이란 사람들 속에 자리한 가장 깊은 내면의 경향성이 황금률을 따르게 되는 변화를 일컫는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기도나 예배를 비롯한 다른 신앙 활동들은 모두 올바른 도덕적 행위에 대한 미신적 대체물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칸트와 슐라이어마허, 객관적 교리보다 주관적 의식 앞세우게 만들어

이러한 합리주의에 이어 낭만주의가 독일에서 주요한 세계관으로 부상할 때,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는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교회가 성경 및 종교개혁의 원리로 돌아가도록 함으로써 당대의 사조를 따라가려는 문화적 흐름에 그가 반대하였더라면 어떠했을까? 그러나 그는 오히려 신앙을 재정의하려는 근대성의 영향을 쫓아 감상적인 기독교를 내세우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주관적 의식이 객관적 교리보다 우선하게 되었다. 또한 성경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종교적 경험을 기록한 문서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리란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종교적 의식에 관한 표현에 다름 아니었다. 그래서 칸트와 같이 슐라이어마허도 인간의 타락을 부인했고, 그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또한 미신적으로 취급하며 수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속죄 교리를 대체하는 신비주의적 관점을 주창하며, 예수님은 사람들이 내면에 있는 신 의식에 참여하도록 만드신 분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칸트와 슐라이어마허는 바로 내재신학(즉 진리의 근거를 자기 내면에서 찾으려는 신학)을 대변하는 모델이 되었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앙의 범위를 그릇된 방향으로 확장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여러 신학자와 목회자가 잇따라 기독교를 새롭게 해석하며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 전통적인 교리에 자기 해석을 끼워 맞추려고 했다. 그래서 정통적인 교파에서도 교회가 추구해야 할 목표는 ‘관용’이 되었으며, 자유주의 진영은 계속 성장하여 1920년대에는 개신교의 주요 교단을 거의 장악하게 되었다.

자유주의가 주류 교회 안에서 다원주의 확산시켜

이처럼 자유주의가 주류 교회들 안에서 다원주의를 확산시키는 일에 성공을 거두자, 그 여파로 오늘날 교계 안에서는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바로 복음주의 교회 안으로 다원주의가 그 세력을 광범위하게 미치게 된 변화다. 그래서 복음주의 계열의 대학이나 신학교 안에서, 그리고 목회자나 신학자 가운데 일어난 변화를 다방면으로 (즉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또는 사회학적으로) 조사하는 연구들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한 연구에 따르면, 원래 복음주의란 역사적 정통주의의 가르침을 위협하는 외부적 세계관의 유입을 단호히 거부하는 입장을 대변했는데, 계속해서 부상하는 다원주의의 흐름을 따라 아이러니한 현상을 나타내게 되었다. 곧 처음에는 세상의 사조에 맞서기 위해 설립된 학교들이 이제는 그러한 사상을 받아들이는 변화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의 진행을 고려할 때 가장 긴급히 요구되는 교회의 사명은 세상의 사조와 뚜렷하게 구분되는 성경적 세계관을 분명히 제시하는 작업이다. 그 세계관은 통합적이고 일관적일 뿐 아니라 그 범위가 종합적이어야 한다. 또한 인생과 사상의 모든 측면을 성경의 내용을 사용해서 원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관점이어야 한다. 물론 그러한 관점은 하나님이 창조자시고, 역사를 다스리는 통치자시며, 자신이 지으신 만물을 궁극적으로 회복시키는 구속자가 되신다는 근본적 전제 위에 세워져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초월적인 주권자로 드러내실 뿐 아니라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궁극적으로 섭리하는 분으로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든 진리의 이면적 근원에는 바로 그분이 계신다. 그리고 그분만이 우리의 정체성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부합한 객관적인 법칙을 계시하신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세계관은 인간의 본성이나 구속의 수단 등에 관한 올바른 신학을 다룰 뿐만 아니라 인생의 전 영역에 그 범위가 미쳐야 한다. 결국 모든 인생은 신앙적인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1장 26절이 우리 신앙의 진실성 여부를 판단하는 일에 혀의 사용을 시금석으로 제시하듯이, 우리의 사상이나 행동도 그와 같은 시금석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우리가 어떤 학문적 주제를 연구하든지, 혹은 어떤 직업적 소명을 추구하든지, 아니면 어떤 문화적 활동에 참여하든지, 그 각각의 과정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성경에 부합한 질서와 합법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신자로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임무는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만드는 데서 더 나아가(고후 10:5), 우리의 모든 삶을 그렇게 해야 한다. 즉 인생 전체를 그리스도와 그분이 계시하신 말씀에 복종시켜야 한다.

우리가 인생의 모든 영역을 복음에 복종시키는 일을 할 때, 우리는 성경의 원리를 회피하거나 위반하는 이 세상의 접근을 멀리할 수 있다. 가령 실재를 물질로 환원시키는 무신론적 자연주의라든가 권력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설정하는 마키아벨리식 정치학 또는 질의 문제를 양으로 환산하여 분석하는 과학주의 등이 우리 주변에 명백히 자리하고 있다. 나아가 일상적인 사고와 생활 속으로까지 미묘하게 파고든 세상의 전제를 파헤치는 작업은 더욱 까다로운 수고를 요구한다. 특히 결과로 과정이 정당화되는 실용주의라든가 명백한 논리적 분석을 모호한 감정이나 직관으로 대체하는 주관주의적 영성 따위가 그와 같은 전제로 깊이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다원주의가 교회를 잠식해 가는 이상, 교회는 반드시 그에 대응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성경적 세계관을 발전시키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임무는 우리 각자에게 개인적으로 주어져 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전체에 주어진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목회자와 신학자는 홀로 이 사명을 수행할 수 없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반드시 이 사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바울도 자기 당대에 개개인만이 아니라 교회 전체에 편지를 보내며 그 사명을 감당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성경적 세계관의 대사가 되어야 한다. 매일의 소명 가운데 각자가 그래야 하며, 또한 교회의 가르침과 설교를 통해서 공동으로 그래야 한다. [복음기도신문]

“ 성경적 세계관을 발전시키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임무는 우리 각자에게 개인적으로 주어져 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전체에 주어진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

앤드류 호페커 Andrew Hoffecker |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명예교수.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를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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