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선교열전 (11) – 전라남도편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올해 한국의 기독교 역사는 132주년을 맞고 있다. 구한말부터 본격화된 개신교 선교 역사는 문화, 교육, 의료 분야에서 우리나라 역사와 맥을 같이 하며 한반도의 근대화와 함께 진행됐다. 우리나라 곳곳의 선교역사를 통해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사랑을 되새겨본다. <편집자>
목포 선교부의 설립
1894년 이후 미국의 남장로교 테이트와 레이놀즈 선교사에 의해 전주에 선교부(Mission Station)가 세워진 후 전라도 남부 지방 선교부 설치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전라도의 북부 지역으로만 선교사업이 치우치는 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교사 회의는 1895년 6월 벨(Bell) 목사를 전라도 남부 지방의 개척 책임자로 정했다. 벨은 전주에 있던 해리슨(Harrison)과 함께 한 달 남짓 동안 남부 지방 좌수영 등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이곳은 교통이 불편해 차라리 남부의 내륙지방이자 행정 중심지인 나주가 선교 후보지로 지목됐다. 당시 나주는 전라남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벨은 전킨과 함께 1896년 11월에서 12월 사이 4주간의 일정으로 나주 지방을 방문·답사하고 1897년 이른 봄에는 선교 기지로 초가 한 채를 구입해 거처로 삼았다. 그리고 어학 선생이자 매서인(賣書人: 성경을 팔거나 복음을 전했던 사람) 변창연과 더불어 거리 전도를 했다.
그즈음 조선 정부 안에서는 친일·친청·친러파의 세력들이 심각하게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궁중에서 민비가 시해되는 참변이 일어나고, 고종 황제가 러시아 공관으로 거소를 옮기는 아관파천으로 인해 정세가 불안해졌다.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나주 관아의 관리들은 강한 쇄국사상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 외국인의 성내 거주를 허락할 수 없다고 했다.
벨과 전킨이 나주 선교를 계속하려 하자 이번에는 나주의 양반 유지들이 일어났다. 그들은 양인들은 나주에서 떠나라며 사람들을 보내 죽이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나주의 외국인과 외래종교에 대한 반대는 군산이나 전주에서 겪은 것보다 더 심했다. 선교부는 나주 선교부 설치를 포기하고 변창연을 남겨 두고 떠나야만 했다.
그러는 동안 1897년 10월 1일 목포는 외국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무역항이 되었다. 후에 목포는 나주보다 더 크고 빨리 성장하는 도시가 되어 전남선교의 중요한 기지가 되었다.
믿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1897년 11월 27일, 목포에 도착한 벨 목사 부부는 함께 온 한국인 조력자와 함께 방 한 칸을 빌어 같이 숙식하면서 새로운 기지를 마련했다. 12월 하순에는 아주 적합한 장소를 물색하고 가격 흥정까지 마쳤다. 그는 새로 구입한 토지 옆에 있는 초가집 한 채를 임시 거처와 예배처소로 사용하면서 천막을 치고 미국인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구경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전도 운동을 벌인 지 두달 남짓 되었는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예배에 참석하게 되자 벨은 큰 용기를 얻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버지니아주에서 의료선교사 클레멘트 오웬(Clement G. Owen) 의사가 목포에 도착해 진료소를 설치했다.
1899년 초에는 프레드리카 스트레퍼(F. Riea Straeffer) 양이 여자들과 아이들을 위한 복음 사역을 위해 합류하면서 목포 선교는 더욱 활발해졌다. 더욱이 나주에서부터 함께 했던 변창연이 목포로 옮겨와 적극 협력함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천막 교회를 이루었다. 노학구(魯學九)·김만실(金萬實)·김현수(金顯洙)·임성옥(任成玉)·지원근(池源根)·마서규(馬瑞奎)·김치도(金致道) 등 20여명이 개종하여 만복동(현 양동)에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리면서 목포교회(현 양동교회)가 시작되었다.
1899년 여름, 벨 목사는 주일 예배 참석자 수가 30명쯤이라고 보고했다. 변창연의 책임하에 접견실이 개설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와서 질문하고 성경을 사가고 유인물을 받아가거나 그저 편하게 와서 쉬는 곳이 되었다. 1900년 3월 5일은 세례자 첫 시험이 치러졌다. 이날 네 사람이 학습교인이 되었다. 그해 봄과 여름에 30명의 세례 지원자 중 6명이 세례를 받고 8명이 학습을 받았으며 나머지는 공부를 더 하기로 했다. 선교사들은 초기 성도들의 성품을 기뻐하며 이렇게 적었다.
“많은 사람들이 주일 오후에는 두 사람씩 짝지어 세상으로 나가 설교했다. …그들은 이미 교회를 지을 계획을 얘기하고 있었다. …아무도 자기가 믿게 된 구주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간증하지 않고서는 세례를 받지 않았다.” <계속> [복음기도신문]
참고문헌: <한국선교이야기>(조지 톰슨 브라운 지음, 도서출판 동연,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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