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은혜의 복음 (4)
사울이 받은 무서운 저주는 ‘불경건’에서 비롯됐다. 그는 믿음의 모든 모양을 다 가지고 있었다. 베냐민 지파였으며, 이스라엘 사람이었고, 위급할 때 법궤를 가져올 줄도 알았고, 하나님께 제사드릴 줄도 알았다. 오늘날로 말한다면 사울 그는 크리스천의 모든 문화와 자격을 다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그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을 믿어 본 적이 없었다.
신학을 연구하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워 경건하게 섬겨야 할 영원하신 살아계신 분이시다. 사실 사람이 볼 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람이 보지 않을 그때에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두 눈으로 보신다는 것이다. ‘코람데오’라는 라틴어는 하나님 앞에서의 ‘면전 의식’을 뜻한다. 사람이 보든 안 보든 하나님은 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사울의 관념 속 하나님 vs 다윗의 살아계시는 하나님
폐위된 왕 사울에게 하나님은 관념 속에 존재하는 분이셨다. 하지만 쫓겨 다니던 다윗에게 하나님은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셨다. 다윗의 시편은 그가 겪은 고난과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위기에서 나왔다. 하나님의 기적 없이는 한순간도 살아남을 수 없을 때, 보장된 내일이 없을 때 그의 주옥같은 시편들이 만들어졌다. 그에게 하나님은 피난처였으며, 산성이었으며, 구원의 뿔이었으며, 빛이었다.
비단 다윗뿐일까? 다윗처럼 우리도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다. 숨 쉬고, 침 삼키는 순간마다 우리에겐 주님이 너무나 필요하다. 매일, 순간순간 다윗처럼 당신도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있는가? 말씀에 매달리고 있는가? 사실 다윗은 그의 삶에서 ‘스스로’ 왕 노릇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모든 순간에 왕 되신 하나님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삶의 모든 자리가 하나님이 살아계신 자리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저주 받은 옛 반역죄는 슬금슬금 기어 올라오기 시작한다. 우리는 결코 우리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한국교회는 신학 이론이나, 대단한 조직이나, 성직의 권위가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한다. 설교강단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기도하는 자리는 우리 영성을 자랑하는 자리가 되어선 안 된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드러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 앞에 사는 가정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시간이 주님 앞에서 사는 경건한 시간이 되어야 한다. 직장이나 학교에서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은 옛 추억 속에 살아계신 분, 이론 속에 계시는 분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의 호흡보다 더욱 생생하게 살아계신다. 하나님을 죽은 하나님으로 여기고 있다면 지금 당장 회개하라! 사울의 가장 큰 비극은 한 번도 하나님을 믿어 본 적 없었다는 것이다. 목사가, 장로가 불신자일 수 있다. 교리적으로는 유신론자지만 실천적으로는 무신론자일 수 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가장 두려운 건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들어 가는 것이다.(2016. 5 메시지 정리)<계속> [GNPNEWS]
김용의 선교사(순회선교사.LOG미션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