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년의 긴 미국 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다음세대를 세우는 일에 남은 인생을 드린 신민선 선교사를 만났다. 예수님을 알지 못한 불신자로 28세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72세에 선교사가 되어 돌아온 한국. 짧은 대화로는 다 담을 수 없는, 한 인생을 이끄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그의 이야기 속에서 느낄 수 있었다.
–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너무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요. 저는 지금 헤브론원형학교라는 기독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고, 또 도서실을 관리하고 있는데요. 뭔가를 가르친다기보다 지금도 계속 배우는 중이에요.”
– 미국에서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어떻게 헌신하게 되셨나요?
“결국 주님께서 이끌어 주신 거죠. 다음세대에 대한 부르심은 미국에 있을 때 한 선교단체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복음수련회를 열었는데요. 거기에 섬김이로 참여하면서 받게 되었어요. 저의 역할은 중보기도였는데 처음에 이 아이들의 모습은 전혀 복음 앞에 반응하는 태도가 아니었어요. 거의 듣지도 않고, 처음부터 계속 집에 가겠다고 하는 아이, 이것 달라 저것 달라 투정하는 아이, 중보기도를 하면서 참 낙심이 되었어요. ‘이렇게 해서 뭐가 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수련회가 마칠 때쯤 아이들의 고백을 듣는데, 저는 깜짝 놀랐어요. 그런 태도로 있었던 아이들도 선포되는 말씀을 다 듣고 있었더라고요. 그 수련회는 로스앤젤레스(LA)에서 열렸고 참여했던 아이들 중에는 미국 동부에서 온 아이들도 있었는데, 나중에는 그 아이들이 ‘왜 우리 동부에는 이런 수련회가 없냐.’고 갈급한 심정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어요. 그때 눈물이 왈칵 쏟아졌죠. 사실 그때까지 저는 메마르게만 보이는 이 미주 땅에는 소망이 없는 줄만 알았거든요. 그런데 복음이 청소년들에게 역사하는 것을 보니 너무 큰 소망이 되었어요.”
메마른 땅에서 경험한 복음의 능력
– 그렇게 다음세대에 대한 마음을 품게 되신 거군요.
“그랬죠. 그러고 나서 여기 헤브론원형학교가 처음 세워졌을 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잠깐 방문해서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치는지 보게 되었는데요. 수학수업을 참관하면서 충격을 받았어요. 그 수업에서 한 선생님이 ‘여러분, 성경 안에 수학이 있어요. 창세기에 보면 첫째 날, 둘째 날 하며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잖아요. 그때 하나님께서 숫자를 만드신 거예요.’라며 가르치는데, 저는 그런 수학수업은 평생에 처음 봤어요. 정말 성경이 교과서더라고요. 뿐만 아니라 ‘다시복음앞에’라는 집회에서 이 학교의 학생들이 로마서를 3장까지 외우면서 하는 뮤지컬 ‘로마에 온 편지’를 보고 ‘어릴 때부터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이 바로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 미국 생활은 다 정리하신 건가요? 그 과정을 좀 나누어 주세요.
“지금은 미국에 있었던 모든 것들을 다 정리하고 아주 헌신을 하게 되었지만, 처음에는 한 1, 2년만 섬길 생각이었어요. 제가 한 40대만 되었어도 종신으로 헌신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것 같은데, 제가 46년생이거든요. 아무튼 참 우여곡절이 많았는데요. 최종적으로 결단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어요.
섬기던 교회에서는 전도사로 사역하며 예배부를 맡고 있었고, 미국에 있던 동생들도 제가 한국에 오는 것을 다 반대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세대에 대한 부르심에 순종을 했죠. 이곳에 도착하고 보니 산들이 둘러 서 있었고, 또 눈이 많이 와서 참 아름답더라고요. 그래서 사진을 찍어서 문자메시지로 지인들에게 보내면서 이런 아름다운 곳에 잘 있다는 것을 알렸어요. 그런데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죠. 이곳에 온 지 4일 만에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면서 발목이 부러져 버렸어요.”
헌신 결단과 함께 발목 골절 “위기”
– 많이 어려우셨겠어요.
“아무래도 여러 사람들의 축복보다는 반대 가운데서 헌신하게 된 것이기도 하고, 또 오자마자 어떤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런 일이 갑자기 생긴 것이어서 너무 제 마음이 무거웠어요. 지인들에게 말하기도 너무 부끄러웠고요. 개인적으로는 왜 믿음으로 순종한 저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혼란스러운 마음도 생겼어요.
그런데 그때 병원에 입원해 있는 저에게 한 선교사님이 방문해 주셔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허락하심입니다.’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 말씀을 믿음으로 취했죠. 병원에서 퇴원을 하고 바로 학교를 섬길 수가 없었기 때문에 회복하는 동안 ‘전능자의그늘미니스트리’라는 선교단체에서 머물게 되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곳은 제가 가기 일주일 전에 휠체어로 화장실 등 모든 곳을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는 거예요. 건물을 처음부터 그런 용도로 공사를 한 것이었는데 제가 처음으로 건물의 용도에 맞게 사용하게 된 거죠. 정말 말 그대로 하나님의 허락하심이었어요.”
–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을 경험하셨군요.
“그 이후로도 아무튼 계속 순조롭지는 않았어요. 회복하는 동안에도 제 마음 속에서는 수시로 갈등이 일어나고 평안하지는 못했죠. 어느 정도 회복한 이후에 본격적으로 학교가 진행되는 과정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바쁜 일정을 보내는 다른 선생님들의 모습을 보며 저는 더 주눅이 들었어요. 컴퓨터도 모르고, 기도정보 복사하는 것도 어렵고, 어느 것 하나도 익숙한 것이 없었죠. 그때마다 계속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니까 다른 지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그렇게 위축되어 있다 보니 그들의 말과 행동에 제가 스스로 오해하고 상처를 받기도 했어요.
그러면서 이곳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만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주님께 원망하는 마음도 생기기 시작했죠. 결국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하고 1년만 섬기고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종신선교사의 삶 결단
에녹과 동행하시고
38년 된 병자를 찾아와 고치신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된다
복음 앞에 서다
모압 여인 룻과 같았던 인생
시어머니 통해 예수님 만나
십자가 복음 통해 복음이 실제
– 주님이 마음을 가난하게 이끄셨네요.
“그렇죠(웃음). 그러고 얼마 후 학교에서 한 주 동안 열방을 위해 기도하는 ‘느헤미야52기도’를 하게 되었는데요. 제가 맡은 시간에 기도 인도를 하다가 창세기 5장에서 에녹을 보게 되었어요. 24절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는 말씀이 나오는데요. 그 말씀을 보는데 갑자기 주님이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민선아. 너 나와 함께 있지 않을래?’ 제가 평소에 에녹을 좋아했거든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늘 살고 싶어 했어요. 저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아멘.’하고 대답했어요.
그러고 났더니 하나님께서 기도 중에 계속 말씀을 주셨어요. 요한복음 5장에서는 38년 된 병자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보여주셨는데요. 도저히 자기 자신을 어찌할 수 없는 병자를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친히 고쳐주시잖아요. 그것을 보니 제 나이가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라, 뭘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셨어요. 그리고 학교의 허락을 얻어 미국에 다녀왔어요. 미국에 차도 있었고, 저의 모든 살림들이 임대 컨테이너에 있었는데 다 정리했어요. 이제 새로운 마음으로, 종신으로 주님과 동행하게 되었어요.”
미국의 모든 삶의 흔적들 정리
– 지금은 행복하세요?
“너무 행복하죠. 그후로는 자잘한 문제들이 있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요즘은 정말 하나님께 감사한 것뿐이죠. 길을 걸어도 감사하고. 여긴 또 산책로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이런 자연 속에서 산다는 것도 너무 감사한 일이죠. 인생의 마지막을 이렇게 주님과 동행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셔서 너무 행복해요.”
–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인생 이야기도 좀 해 주세요.
“저는 아주 철저한 불교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가 태어나기 전에 할머니께서 불공을 드렸는데, 그 기도 덕분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불교에 아주 특심인 집안이었죠. 그래서 어느 때까지는 소고기 외에는 다른 고기를 먹어보지 못했어요. 어머니는 제가 23살 때 돌아가셨는데 제가 네 형제 중 맏이여서 동생들을 돌보느라 많이 힘들었던 기억이 나요. 참 소망 없는 나날들을 보내다가 친구 오빠의 소개로 선을 보게 되었는데요. 결국 그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었고, 남편의 가족들과 함께 미국에 이민을 가게 되었어요.
그런데 시댁사람들이 모두 교회를 나가길래 저도 따라 다니기 시작했어요. 특히 시어머니께서 저에게 불교덩어리가 들어왔다고 하시면서 교회에 데리고 다니셨어요. 처음에는 아무것도 몰라서 졸다가 오기도 하곤 했는데 어느 순간 찬양을 하면서 어쩜 그리도 눈물이 나던지요. 그렇게 교회를 다녔지만 이민 초기에는 경제적인 면이 참 많이 어려웠어요. 일단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베이컨을 포장하는 공장에서 한동안 일을 했어요. 아주 밑바닥부터 시작한 거죠. 나중에는 대학에서 패션을 전공해서 10년 동안 옷을 만드는 일을 했어요. 남편과 함께 돈을 벌었는데 꽤 벌이가 좋아서 집도 사고, 좋은 차들을 몰고 다녔어요. 말하자면 아메리칸 드림이 이루어진 거였죠.”
– 자수성가하셨네요. 신앙생활은 어떠셨나요?
“사실 돌아보면 미국에서 제 인생이 모압 여인 룻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결국 시어머니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워낙 신앙적인 배경이 없었던 터라 사람들이 하자는 대로 하다 보니 이런 교회, 저런 교회를 다녔는데 한 5번 정도는 교회를 옮긴 것 같아요. 그러다가 마지막 교회에서 교역자들의 권유로 늦은 나이에 신학을 하고 15년 동안 전도사로 사역했어요.
그러나 그 와중에 교회 안에 있는 여러 연약함들과 의지했던 남편의 죽음과 수많은 사건들이 겹치면서 주님을 향한 갈급함이 더 깊어졌죠. 그러다가 지인의 소개로 한 훈련과정을 통해 복음 앞에 서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리고 얼마 후에 한국으로 들어와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6개월 동안 합숙하는 훈련도 받았어요. 그때야 비로소 정말 십자가 앞에 서는 시간을 가졌어요.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삶이 정말 실제가 되었어요. 그 후에는 그 단체의 미주지부와 동역하며 믿음의 걸음을 걷게 되었어요.”
“무슨 상황을 만나도 말씀에 붙들려 있다면…”
– 그리고 헌신을 하셨군요.
“네. 그런데 그렇게 받을 수 있는 훈련들을 다 마친 뒤에도 주님께 제 삶을 온전히 드리지 않으니까 여전히 공허했어요. 어느 날 아침 경치가 좋은 이층집에서 성경을 펴놓고 커피를 마시면서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왜 살지?’ 당시 저는 여유롭고, 별걱정이 없고, 재정도 그렇게 부족하지 않았는데요. 뭔가 할 것이 없는 제 모습을 보면서 ‘이건 아니다.’라는 마음이 들었어요. 삶을 다 드린 지금 생각해보니 바로 이것 때문이었던 거죠. 이곳에서 제 삶을 드리기 위해서였던 거죠.”
– 지금도 믿음의 걸음을 걷고 있는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요.
“결국 말씀과 기도밖에 없는 것 같아요. 무슨 상황을 만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있기만 하면 그 어떤 두려움도 나를 엄습하지 못하죠. 저는 은퇴 이후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헌신에 대한 권유를 받았어요. ‘이곳에 갔으면 좋겠다, 저곳에 갔으면 좋겠다.’ 하는 말들을 여러 믿음의 선배님들에게서 들었죠. 그런데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니까 그런 사람의 말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더라고요.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까요.
주님께 온전한 헌신을 드린 후에 한동안 몸이 꽤 아픈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는 정말 주님께 ‘1년만 살려주세요. 다음세대를 섬기고 싶어요.’ 하는 기도가 간절히 나왔어요. 그 전에는 언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었는데 말이에요. 이렇게 인생을 거의 다 경험해보니 지금은 다음세대를 세우는 일만큼 중요한 일이 없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간절해져요. 복음을 진작에 좀 만났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그러나 이것이 저에게 허락해 주신 인생이라는 것을 알아요. 복음을 살게 해 주신 하나님께 너무 감사해요.” [GNPNEWS]
J.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