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당신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다양한 달력 앱과 사이트에서 한 주의 첫날이 월요일로 바뀌었다. 원한다면 일요일을 첫 날로 수정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기본값이 변경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건 사실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토요일과 일요일은 한 주를 마무리하는 이틀, 한 쌍이다. 드라마 ‘다운튼 애비’에는 백 년 전 노동 계급이 시간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전혀 모르는 나이 든 그랜섬 부인이, “주말이 뭐예요?” 하고 묻는 장면이 있다. 정규 업무 시간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이므로 한 주간의 첫 번째 날을 월요일로 보는 건 합리적이다. 한마디로 노동을 시작하는 날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이다. 일주일을 단지 노동 주간(workweek)으로 축소하는 현실은 나를 괴롭힌다.
주간과 노동 주간
시간에 맞춰 방향을 어떻게 정하는가, 그러니까 살아가는 이 시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삶과 목적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달라진다. 시간의 순서를 어떻게 정하는가라는 질문 속에는 도덕적 교훈이 담겨 있다.
월요일을 시작으로 본다는 건, 오로지 일의 측면에서 삶을 바라봄을 의미한다. 중요한 건 생산성이다. 일요일 우선 사고방식과 월요일 우선 사고방식을 대조해 보라. 한 주가 예배와 안식으로 시작할 때, 뒤따르는 모든 것은 은혜와 감사의 빛 속으로 스며든다. 일조차도 예배의 일부가 된다.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누구인가로부터 시작한다.
일요일이 특별한가?
하지만 트레빈, 당신이 그랬잖아? 일요일이 다른 날이랑 비교해서 특별할 게 없다고. 따라서 달력이 바뀐 것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이야. 맞다. 불행히도 사실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에게도 교회에서 보내는 한 시간 정도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토요일과 하나 다를 바 없다. 여가를 즐기거나 또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어디선가 일에 몰두하는 평범한 날일 뿐이다.
그러나 일요일을 대하는 이런 방식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선조들과 제대로 된 보조를 맞추지 못하도록 한다. 거의 백 년 전에 남침례교단이 채택한 최초의 합의문, ‘침례교 신앙과 메시지(The Baptist Faith and Message)’는 오로지 주일에 대해서만 전체 기사를 할애했을 뿐만 아니라, 올바른 청지기로서 일요일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에 관해서도 분명하게 명시했다.
한 주의 첫날은 주의 날이다. 정기적으로 지켜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의무(institution)이다. 이날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며, 공적이든 사적이든 오로지 예배와 영적 헌신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한다. 세상적인 오락을 삼가고 세속적인 노동에서 벗어나야 한다. 단 꼭 필요한 일과 선행의 경우에는 예외이다.
이 성명이 2000년에 개정되었을 때, ‘세상적인 오락을 삼가고 세속적인 노동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부분은 삭제되었다.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호소하는 내용이 들어갔다.
최근 버전이 오늘날 남침례교의 생각을 더 잘 반영한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더 나아졌다는 의미일까? 제한을 없앴다는 것이(이건 일요일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 문화적 변화와 우연하게도 겹친다) 주를 향한 신실함이 더 커졌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세상의 문화를 수용하려는 태도가 더 커졌다는 의미일까? 내가 지금 너무나도 성급하게 일요일을 단지 아침에 교회 가는 사람들이 더 많은 또 다른 토요일처럼 간주하고 있는 건 아닐까?
왜 일요일인가?
일요일의 역사를 쓴 후스토 곤잘레스는 그리스도인이 일요일을 공공 예배의 날로 선택한 이유를 설명한다. 다름 아니라, 이날에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새 창조의 시작을 이루고 영원한 안식과 기쁨을 가져오셨기 때문에 ‘주일’이라는 것이다.
기독교가 문화에 영향을 주고 또한 문화 자체를 형성함에 따라, 일요일 예배와 안식일 휴식의 병합은 흔한 현상이 되었다. 명목상 교인 또는 비교인에게조차도 복음이 끼친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달력의 가르침
달력은 가르친다. 내게는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온 가족이 안식일을 지키는 친구가 있다. 촛불을 켜고 전례를 낭송하며 토요일 해가 질 때까지 그들은 인터넷에 전혀 접속하지 않는다. 내 친구는 안식일을 시작하며 가족을 인도한다. 안식일 준수는 그 가족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가족 전체에게 매우 유익하다. 마르바 던은 이렇게 말했다. “거룩한 날을 구별함으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로 하여금 나를 되찾고, 내게 활력을 주고 또 새롭게 함으로 나를 주의 백성으로 통치할 수 있도록 한다.”
달력은 중요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이탈리아 신부 돈 가에타노 탄탈로(Don Gaetano Tantalo)는 두 유대인 가족을 자신의 집과 교회에 아홉 달 동안 숨겼다. 그는 유월절 만찬(Seder)에 필요한 특별한 음식을 찾아줄 정도로 그들의 종교적 의식을 존중했다. 이스라엘에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에는 숫자가 적힌 종이가 있다. 1944년도이고 숫자가 계산되어 있는데, 다름 아니라 아무도 모르게 유대인 달력을 조사해서 유대인 친구들이 그들에게 중요한 성일을 기념할 수 있도록 도왔던 탄탈로의 노력의 흔적이다.
달력은 단지 가르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달력은 드러낸다. 12일에 걸친 크리스마스가 이상하게 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1월까지도 크리스마스 장식이 남아 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소비주의에 의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체스터턴과 다른 사람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실상 누구보다 빨리 “크리스마스 장식에 열을 올리던” 사람이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오늘날 문화에 저항하는 반체제적 관행을 수립함으로 현대 문화가 초래한 일탈에 저항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이제는 이해하고 존경한다.
교회도 달력에 의해 형성된다.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오순절 (그리고 놀랍게도 “평상시(Ordinary Time)”라는 이름)이라는 독특한 계절을 가진 전통적 기독교 연도에 눈살을 찌푸리는 교회들은 일반적으로 성경 이야기가 드러내는 위대한 순간들을 문화적 표식으로 대체한다. 그건 주로 소비 충동에 의한 것이다. 밸런타인데이, 어머니날, 아버지날, 그리고 여름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현충일과 노동절.
전통적인 교회 달력을 따르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시간을 어떻게 표시하는가에 따라서 발생하는 교육의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연방 정부와 대기업은 달력의 영향력을 잘 알고 있다. 굳이 정부는 왜 “긍지의 달 (Pride Month)”을 만들어서 표시할까? (성 혁명이라는 핵심 포인트로 전환된) 표현적 개인주의를 기념하고 이를 통해 오늘날에도 도덕적 인정과 긍정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정체성과 행동으로 국민을 바꾸고 교육하기 위해서이다.
다시 일요일로
달력은 중립적이지 않다. 따라서 디지털 장치가 한 주의 첫날인 일요일에서 멀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말라. 기본 설정을 변경하여 일요일을 시작일로 바꾸라.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일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해서 더 깊이 생각하도록 하자.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는 왕이신 예수님을 따른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예배하는 날로 일주일에서 하루를 정했다. 그날은 결코 마지막 날이 아닌 처음 날이다. 우리는 그의 선하심과 은혜를 노래하며, 다시 돌아와 죽음을 영원히 없애겠다는 약속을 믿는다. 일요일은 바로 그의 날이다. 그리고 그가 가장 중요하다. [복음기도신문]
원제: Is Sunday Still the First Day of the Week?
트레빈 왁스(Trevin Wax) | LifeWay Christian Resources의 신학과 커뮤니케이션학과의 부학장이며 Wheaton College의 외래 교수이고, The Gospel Project의 편집자이다. ‘디스 이즈 아워 타임’, ‘일그러진 복음’, ‘우리시대의 6가지 우상’, ‘Gospel Centered Teaching’을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