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을 둘러싼 논란의 진실(10)- 진보당 조봉암의 사형에 대한 이승만의 역할은?
조봉암은 조선공산당의 창당 멤버로서 원로 공산주의자였다. 해방 후 박헌영과 노선 갈등을 빚어 조선공산당에서 이탈한 다음 대한민국의 건국 대열에 참가했다. 그는 고향 인천에서 제헌의원에 당선된 뒤 뛰어난 의정 활동으로 이승만에 의해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그가 농림부 장관으로 재직한 기간은 1949년 2월 말까지 6개월에 불과했고, 그가 중심이 된 농림부안은 채택되지 않았다. 따라서 흔히 조봉암이 1950년 2월에 관련법이 국회를 최종 통과하게 한 농지개혁의 큰 공로 자로 평가하는 것은 과장된 것이다.
이후 그는 1950년에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국회 부의장으로까지 선출되었으며,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야당 민국당의 이시영 후보와 거의 대등한 79만여 표의 지지를 받았다. 이로 인해 그는 신익희, 조병옥, 장면, 이범석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유력 정치인으로 세간의 평가를 받게 됐다.
그러한 그가 1955년 진보세력을 모아 진보당을 창당하는 과정에서 195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이승만 대통령에 이은 제2위 216만 표를 획득했다.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남북한의 평화통일안을 내세웠으며, 이는 이후 1956년 11월에 창당된 진보당의 당강령으로 채택됐다.
진보당의 평화통일안은 유엔의 감시하에서 남북한이 대등한 입장에서 통일방안을 협상하자는 것이었다. 진보당의 평화통일안은 이승만 대통령이 내세운 평화통일안과 유사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의 감시하에 남북한이 인구비례에 따른 총선거의 실시를 주장한 반면, 진보당은 남북한이 대등한 위치에서 협상할 것을 주장한 점에서 결정적으로 달랐다.
결과적으로 진보당의 평화통일안은 당시 북한이 선전하고 있던 평화통일안에 호응하는 성격을 지녔으며, 바로 그 점으로 인해 1958년 진보당 사건에 휘말리게 됐다. 1958년 1월, 검찰은 진보당의 평화통일안이 국가보안법을 위반한다는 혐의로 조봉암을 위시한 진보당의 간부들을 구속했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쟁점이 된 것은 진보당의 평화통일안이 아니라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이 북한을 오가는 무역상 양명산과 접촉하여 북한이 내려보낸 자금을 수령한 사실 여부였다.
쟁점은 조봉암이 양명산이 북한의 간첩임을 인지했는가의 여부였다. 재판부는 결국 이를 인정하여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평화통일안 자체는 헌법이 보장하는 사상과 언론의 자유 범위 안의 것으로 인정되어 무죄 선고를 받았다.
조봉암의 수사, 재판, 사형 집행을 두고 이후 큰 논란이 벌어졌지만, 대법원에서 주심을 맡은 김갑수 대법관은 조봉암이 북한 간첩 양명산으로부터 북한이 내려보낸 자금을 수수한 것은 여러 관련 증거에서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개입한 흔적은 없다. 이승만이 그의 정적 조봉암을 사법살인했다는 주장은 이승만이 김구 살해의 배후라는 주장만큼 그의 반대세력에 의해 지어진 음모론으로 여겨질 뿐이다. <자료제공: 월드뷰>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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