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 에들(Eva Edl)은 10살 무렵 제2차 세계대전 시절 죽음의 수용소를 경험했다. 그런 그녀는 이제 자신이 미국의 감옥에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을 것으로 여기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법무부가 그녀를 진료소출입자유법(FACE) 위반혐의로 기소해, 에들은 최대 11년 징역형과 35만 달러에 달하는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
곧 89세가 될 에들은 “이제 나는 그곳(감옥)에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나는 지금 묘한 심정이다…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있으며 장의사와는 아직 이야기 해보지 않았다.”고 데일리시그널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말했다.
독일계 다뉴브 슈바벤 출신의 에들은 2차세계대전 시절이 생각난다면 그때를 떠올렸다. 당시 그녀와 가족들은 티토(Tito)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 치하의 군인들에게 검거됐다.
당시 9살이었던 그녀는 가축수송차량에 실려 유고슬라비아 내 수용소에 보내졌다. “사람들의 몸과 몸이 맞붙은 상태여서 어린아이였던 나는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우리는 음식도 물도 없었다…”
그녀는 “한벌밖에 없는 더러운 옷을 입고 하나밖에 없는 야외변소를 함께 사용해야 했다. 그런데 설사를 앓는 수많은 이들이 어떻게 하나뿐인 야외변소로 갈 수 있으니…그곳은 오물과 질병이 만연했다.”고 회상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당시 그녀의 어머니는 들판에서 강제 노동 현장에서 벗어나 목숨을 걸고 자신을 찾아나섰다. 에들의 어머니는 마침내 자신의 어린 딸이 너무 약해져 걷지도 못한 채 굶주린데다 머릿니와 기생충으로 “곪아터진 채” 썩은 내 나는 짚더미 위에 누워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 그녀의 어머니의 노력으로 그들은 기적적으로 미국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을 한 에들이 1955년 미국으로 온 뒤 생명을 구하는 일이라면, 인권위기를 맞은 어떤 사람이든 돕는 삶을 살게 됐다.
에들은 1968년 영어 수업 시간에 누군가가 미국이 낙태를 합법화해야 할 지 여부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대법원이 헌법상 낙태를 권리로 인정하기로 결정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은 1973년에야 나왔다.)
에들은 “당시 나는 낙태가 무슨 뜻인지 몰랐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들은 설명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종양’ 정도로 여기는 인식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누구라도 한 아이의 생명을 그저 끝내버릴 수 있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녀는 “사람들이 실제로 자기 아이들을 죽이려고 생각한다는 게 너무 끔찍하게 들렸고, 그 때문에 나는 늘 이 문제를 제기했다.”고 말했다.
1988년 애틀랜타에서 열린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 현장에서 그녀는 낙태가 비밀스럽고 은밀한 방식으로 일어나는게 아니며 오히려 태아들은 끔찍한 서비스를 공개광고하는 낙태 클리닉에서 낙태된다는 걸 처음 알고는 충격을 받았다.
1988년 7월부터 수백 명의 프로라이프(태아생명존중) 시위대가 전당대회장 밖에서 시위했다. 뉴욕타임즈는 1988년 10월 경찰이 이 시위와 관련해 약 400명의 시위대를 체포했다고 보도했다.
그 기간 동안 에들은 남편과 이 문제를 논의하고 그는 지지의사를 표명했다. 그런 다음 애틀랜타에 위치한 어떤 낙태 클리닉 밖에서 기도하며 시위대에 동참해 여성들이 클리닉에 들어가 아기를 낙태하려는 걸 막도록 설득하려 했다.
그날 그녀는 오퍼레이션 레스큐(Operation Rescue)의 리더인 랜달 테리(Randall Terry)가 이끄는 많은 이들과 함께 체포됐다.
에들은 경찰이 체포된 많은 시위대 팔을 탈골시키는 등 그들을 잔혹하게 다뤘다고 말한다. 그녀는 프로라이프 활동가들은 경찰이 무력 진압 할 것에 대해 경고 받았으며 이에 경찰에 위협적으로 접근하는 듯하면, 무릎 꿇고 기어갔다고 당시를 설명했다.
그녀는 “나는 시위 내내 엉엉 울었고 틀림없이 눈물의 길을 남겼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녀는 미국이 심지어 태아 낙태까지도 고려한다는 사실에 상심했다.
그녀는 “당시 내 눈에 미국은 정의와 기회가 있고 모든 것이 좋은 나라였다. 내가 원래 살던 곳에서는 누가 지배자가 되건 그가 가하는 억압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의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던 당시 우리에게는 미국이 등대와도 같았다”고 말했다.
당시 경찰이 주저앉아 있는 자신의 팔을 경찰봉에 걸어 버스에 내던져버렸다. 이때 어떤 사람들은 어깨가 탈골되기도 하고, 또 머리를 다치기도 해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다.
이것이 그녀의 최초 “구출작전” 참여였다. 이 말은 프로라이프 활동가들이 낙태 클리닉에서 자행되는 낙태를 막으려 시도할 때 사용하는 용어다. 진료소출입자유법에 따르면 이러한 활동은 범죄로 간주된다.
진료소출입자유법은 “생식 건강관리 서비스”를 훼방하려는 무력 사용이나 방해 또는 재산 손상을 금지하고 있다. 이 법이 이론적으로는 예배당과 임신지원센터 및 낙태 클리닉들을 보호하고 있다. 하지만 바이든 행정부에서 법무부는 주로 에들과 같은 프로라이프 활동가를 핍박하는데 진료소출입자유법을 이용했다.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은 2022년부터 법무부는 5건의 구출작전, 물론 법무부는 구출이 아닌 “봉쇄”로 지칭하지만, 에들을 진료소출입자유법 관련 혐의로 기소했다.
에들은 구출작전에 참여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는 ‘죽음의 수용소’라고 부르는 낙태 클리닉 입구 앞을 몸으로 가로막아서 아무도 거기에 들어가 아이를 죽이지 못하게 한다.”
에들은 1988년 10월에 일어난 그 사건 이후, 자신이 미국 전역에서 50회 이상의 구출작전에 참여했으며 약 50번 체포됐다고 말한다.
그러던 그녀는 이제 감옥에 갈 위기에 놓였다.
그녀는 “내가 알기로 나는 약 11년의 징역형과 35만 달러 벌금형을 부과받게 된다”고 말했다.
에들은 그녀가 낙태 클리닉 사람들에게 어떤 폭력도 행사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법무부는 그녀의 혐의에 대해 코멘트 해달라는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낙태를 앞둔 아기들의 생명을 구하려 했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은 전적으로 정당하다고 말한다.
에들은 자신이 미국 전역에서 여러 차례 체포된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그녀는 과거 (미국에 오기 전) 가코바(Gakowa) 때를 기억하며 말했다.
“우리는 검거된 후 처형되기 위해 가축수송차량에 실려 집단학살 수용소로 향하고 있었다. 만약 당시 시민들이 두려움을 이겨내고 죽음의 수용소 입구와 열차 사이 철로에 서 있었다면 어땠을까? 기차는 멈춰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열차 경비병들이 열차를 가로막은 사람들을 검거하느라 바쁠 때 다른 집단이 들어와서 열차칸을 비틀어 열고 우릴 풀어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당시 가축수송차량이 지나갈 때 사람들이 길가에 서서 엉엉 울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하지만 그렇게 울고 있는 것만으로는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됐다.”고 말했다.
죽음의 수용소 생존자인 그녀는 “우리는 여성과 클리닉 사이를 우리 몸으로 막아섰다. 그렇게 낙태반대 상담가들이 여성들과 대화할 시간을 벌고 그녀들이 아기에 대한 사랑으로 마음을 열고 아기를 살리길 바랬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과 동료 프로라이프 활동가들이 “바이든 행정부의 어젠다에 방해가 되면서” 진료소출입자유법의 표적이 됐다고 믿는다. 그녀는 일생 동안 13명의 대통령을 경험했는데 바이든은 그중에서도 최악이라고 말한다.
진료소출입자유법 위반혐의로 기소된 에들과 다른 피고인들은 자신들이 재판에서 이미지나 사진을 보여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 즉 태아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행동했다고 말하는 것이 금지됐다.
미국 테네시중부연방검찰청(The U.S. Attorney’s Office for the Middle District of Tennessee)에 따르면 에들과 다른 세 명의 피고인은 이번 사건으로 최대 6개월의 징역형과 5년의 감독조건부 석방 및 최대 1만 달러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
그녀는 7월 30일에 선고를 받을 것이라 말했다. 다음 재판은 8월 6일 디트로이트 연방법원에서 열린다.
그녀는 “나는 나의 지나온 경험 때문에라도 인간 생명을 신성하게 생각한다. 정부는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걸 허용할 권한이 없다. 그리고 살인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다.”라고 말했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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