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높이라 Prize Wisdom 잠 4:8

[특별기획] LST 함정을 타고 대포항으로

▲ 6.25전쟁 당시 운용되던 LST함.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기여자: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

[정전협정 70주년 특별기획]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27)

1952년 1월 초순, 중대장님의 몸이 회복되었지만 1연대로 원대 복귀가 되지 않고 1개월간 미국 고등군사반으로 발령이 나서 도미하게 되었다. 전쟁 이후 오랜 시간 생사를 함께했던 중대장님과 서운하지만 작별을 해야 했다. 그 날의 아쉬움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이었다. 중대장님과 작별하는 날, 그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조 중사 때문에 나는 정말 행복했다. 영원히 너를 잊을 수가 없구나. 부디 이 양과 결혼에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라. 정말 고맙다.”

이것이 마지막 이별이 될 줄은 몰랐다. 그 후로 중대장님은 물론 정두현 상사님과 이인식 상사님의 소식조차 알 수 없었다. 그 후 나는 생사를 함께 했던 분들과 헤어진 상황에서 생명을 위협받는 최전방 1연대로 복귀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저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기대하며 오직 사랑하는 이 양과 가까이에서 지낼 수 있기만을 기도했다.

용감한 군 생활에 힘을 주셨던 분들이 모두 곁을 떠나시고 나니 말 그대로 날개 잃은 새가 된 기분이었다. 육군병원에서 이 양에게 편지를 한번 띄웠지만 군사우편이라 제대로 못 받았는지 이 양에게선 아무 답신이 없었다.

1952년 1월 상순, 부대 배속명령을 받았다. 보병 제877부대(제 7후방 예비대대)였다. 위치를 확인해보니 강원도 주문진이었다. 주문진에서 양양은 35km 정도다. 자동차로 40분 거리였다. 또 한번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깨달았다.

877부대에 전속된 후 1952년 1월 1일, 나는 드디어 일등중사로 진급했다. 877부대에 전속된 며칠 후, 대구본부 주번 하사관을 명받고 야간 순찰 시간을 이용해 주번 완장을 호주머니에 넣고 군용차를 타고 양양으로 달렸다. 지리산 공비토벌 참전 4개월 만에 다시 양양 땅을 밟게 됐다.

느닷없이 나타난 나를 보고 이 양의 부모님과 이 양은 어찌된 일이냐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주문진에 있는 후방 예비대대에 전속됨을 설명했다. 이 양 아버님은 이 넓은 땅에서 가까운 주문진으로 오게 됐다고 무척 기뻐하셨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기뻐한 사람은 이 양이었다. 주번 하사관이 근무지를 이탈했기 때문에 오래 머물 수는 없어 얼굴만 보이고는 급히 부대로 돌아왔다. 그 후 두 번 정도 양양을 다녀왔다.

1952년 3월 10일, 육군본부 정보학교에 입학하여 포로신문 전공 반에서 2개월간의 교육을 받게 됐다. 주문진을 떠나기 직전 이 양과 작별인사를 하고 육군본부가 있는 대구로 떠났다. 2개월간의 정보학교 교육을 수료하고 원대복귀 하려는데 부대가 경북 영덕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그런데 원대복귀 증명서의 기간이 1일밖에 허락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영덕으로 가서 복귀 신고를 마쳤다. 이튿날부터 영덕경찰서 상주 근무원으로 명받았다.

제7 후방경비대대는 상주, 영덕, 봉화, 춘양 등지에 출몰하여 민간을 약탈하는 지리산에서 분산된 공비들을 소탕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였다. 어쩌다보니 경찰서 정보과에서 일하는 특수직 요원이 됐다. 참으로 사람일은 모를 일이다. 덕분에 다른 사람의 간섭 없이 비교적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되었다. 명실상부한 정보원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근무에 임하게 되었다.

1952년 6월 상순경, 경북 상주군 화북면에 공비가 자주 나타나 민간인을 공격하고 식량을 약탈해 치안마저 위협을 받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우리 부대는 화북면에 진영을 치고 공비소탕작전에 임했다. 하루는 공비들이 야숙했던 곳에서 구들장 밑에 지휘관이 숨겨 놓은 하얀 메모지를 발견했는데 내용인즉 언제 어느 아지트로 떠날 것이니 지원해 달라는 공비들의 요청사항이 적혀 있었다. 메모지를 찾으러 공비가 나타날 것을 확신하고 주변에 잠복했다.

갑자기 능선 위에서 가랑잎을 날리며 어미 산돼지가 새끼 다섯 마리와 함께 뛰어 내려왔다. 병사 하나가 사살하려 하자 소대장이 가로막았다. 잠시 후, 산돼지들이 지나가고 석양이 질 무렵 같은 방향의 능선에서 가랑잎을 헤치며 인민군 장교가 권총을 빼어들고 ‘좌우’를 살피며 내려왔다. 그는 우리가 설정한 표적지로 조금씩 접근해왔다.

지휘관이 발사하기 전에는 누구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이미 작전 지시가 있었기에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구들장을 들어내는 순간, 소대장이 권총을 발사해 인민군 장교를 생포했다. 그는 얼마나 놀랐는지 그 자리에서 바지에 실례를 했다. 그 후 공비들의 아지트를 파악한 우리 부대는 상당한 전과를 세웠다.

약 3개월간 공비 소탕 임무를 마무리하고 상주 시내 모 초등학교에서 부대가 대기하던 중 나는 또 제7후방 경비대대를 떠나야 했다. 신설 사단의 기간요원으로 차출된 것이다. 당시 사단 창설요원은 분대장급 대우를 받았다.

집결 장소는 부산항만 제2부두에 정박중인 LST함정이었다. 나는 군장을 정리하고 완전무장하여 부산항 제2부두를 찾아 상주를 떠났다. 이튿날 부산에 도착했는데 도로 곳곳에 제21사단 기간요원집결이라는 화살표시가 붙어 있어 쉽게 제2부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본인 여부를 확인하고 바로 제2사단 63연대 정보과 선임하사관이란 직분을 부여받았다. 선내에는 이미 소속별로 집결지가 배정되어 있었다. 63연대를 찾아 정보과장에게 신고했다. 제63연대 정보과 기간요원은 정보과장 주 대위와 선임하사관인 나 두 사람이 전부였다. 작전상 기밀이라 LST의 행선을 물어볼 수도 없고 물어서도 안 된다. 기간요원 모두 어디로 가는지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듯했다.

1952년 11월초, LST는 부산항을 떠났다. 어떤 사람들은 인천으로 갈거라고 내게 귀띔했다. 만약 목적지가 인천이라면 이 양과의 만남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착잡해졌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모든 운명을 맡기고 주님 뜻대로 지켜주시길 기도했다.

출항 2일째 되는 아침 배 멀미로 고생하는 병사들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하선 명령이 하달됐다. 모두들 군장을 메고 배에서 내렸다. 먼저 내린 병사들이 인천항이 아니라 강원도 대포항 이라고 외친다. 대포항 이라면 양양군에 속한 곳이다. 감사의 고백이 절로 나왔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참으로 신묘막측하다.

육지에 올라와 연대별로 집결한 후 도보로 행군하여 양양군 강현면에 도착했다. 63연대가 숙영할 소나무 숲에는 수십 개의 야영 천막이 이미 설치돼 있었고 병사들이 도착하여 기간요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보과 사무실에는 2등 중사 2명, 하사 1명과 일등병 2명 등 모두 5명이 대기 중이었다. 일등병 한 명을 차출해 정보과의 연락병으로 세웠다.

내가 숙영할 민가는 복골(하복리) 이장댁이었다. 이장님은 나를 무척 반기는 기색이었다. 방 안은 이미 불을 지펴 따뜻하게 데워 놓았고 이것저것 신경을 써 주셨다. 그날 밤부터 나는 정보과장의 지시에 따라 사병들의 민가 출입을 막기 위해 헌병 1명을 대동하고 밤늦게까지 순찰을 해야 했다.

어느 날, 이장님을 조용히 만나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장님, 혹시 양양 시내에 사는 이광묵씨를 아십니까?”
“알고 말고요, 그분이 양양 일등 갑부죠.”
나는 이미 처삼촌이 될 분이 양양의 갑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분이 바로 나의 처삼촌이 되실 분인데 구교리에는 장인 어른이 살고 계십니다.”라고 말했다.
“아니, 벌써 결혼하셨나요?” 놀라면서 내 나이를 물었다.
“금년 20세입니다. 아직 결혼은 못했지만 약혼녀가 구교리에 살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나면 결혼할 겁니다.”
“그분들이 우리 집에 선임하사님이 계신 것을 알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연락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지금 당장 소식을 전하고 오겠습니다.”

그리곤 바로 자리를 떴다. 하복리에서 양양까지 거리는 8km 정도다. 걸어가도 한 시간이면 족히 갈 수 있다. 이장님이 양양에 있는 이 양 집에 다녀왔다.

“선임하사님, 내일 모두 우리 집으로 온답니다.” 그는 흥분하면서 말했다. 참으로 하나님의 역사는 놀라울 뿐이다. 이 넓은 땅에서 또 다시 이 양 곁으로 인도해 주시다니…. 할렐루야!

1952년 11월 20일경으로 기억된다. 아침에 양숙 엄마, 이 양의 친구, 그리고 이 양이 이장 댁에 나타났다. 헤어진 지 무려 6개월 만의 상봉이다. 양숙 엄마는 어떻게 소식 하나 없이 이렇게 무심 할 수 있느냐고 타박이다. 다음날 정보과장님께 양양에 다녀올 계획을 말씀드렸다.

“아니 양양에 약혼녀가 있었단 말인가?” 과장님은 흔쾌히 외출을 승인해 주었다. 나는 항상 기적과 같은 삶을 살아온 사나이다. 마당에 들어서니 어머님이 손을 잡은 채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셨다. 그 사이 병마와 싸우시던 아버님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기다리시던 외동딸의 결혼식도 보지 못하시고 너무 빨리 61세에 세상을 떠나신 아버님의 죽음을 애도하며 어머님을 위로해 드렸다. 일주일쯤 지난 후 양숙 엄마와 이 양 친척들이 다시 내 숙소를 방문했다.

이 양의 친척들은 아직 전쟁이 끝나진 않았지만 더 이상 미루지 말고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 좋겠다며 내 의사를 물었다. 갑작스런 제안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복음기도신문]

조용학 | 1934~2013. 충남 단양 생(生). 학도병으로 6.25전쟁 참전. 삼미그룹 총무과장 정년퇴직. 서울 노원구 국가유공자수훈회 사무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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