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준기 목사는 ‘교회와 선교는 하나’라는 주장을 이론만이 아닌, 선교적 교회 개척 실행의 순종을 통해 확인하고 있다. 그동안 그같은 생각과 순종의 여정을 저서 <끝까지 가라> 등 10권의 책에 담아냈다. 이 칼럼은 그의 저서 발췌와 집필을 통해 선교적 교회의 다양한 모습을 소개한다. <편집자>
큰 교회 vs 작은 교회
강의나 설교를 다니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 “웨이처치는 ‘작은 교회 운동’을 하나요?”
내가 대답한다. “아니요.”
질문이 하나 더 돌아온다. “그렇다면 웨이처치도 메가처치 현상에 동조하나요?”
그러면 나는 또 대답한다. “그것도 아닌데요.”
데이브 브라우닝(Dave Browning)은 작은 교회를 ‘본질에 집중하는 교회’로 정의한다(《작은 교회가 아름답다》, 옥당, 2010, 47-52쪽).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은 교회를 다르게 정의한다. 그들은 ‘모이는 성도의 수가 적은 교회’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성도 수가 20명 이하로 유지되어야 한다”라는 식이다. 그 일반적인 사고방식에 대한 내 대답은 “No!”이다. 크고 작은 다양한 교회들의 연합을 어거스틴은 이렇게 설명했다.
“본질적인 것에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서는 다양성을, 그리고 나머지 모든 것에서는 사랑을 추구하라.” 작은 교회 운동이 만약 교회의 기능(본질)에 집중하기 위해 형태(비본질)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신학과 관련한 질문이라면 그 대답은 “Yes!”가 될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크기의 틀로만 논의하는 것이라면 “No”라고 답해야 한다. 왜냐면 ‘크기’라는 기준으로 교회를 제한하는 신학적 사고는 ‘성경’이 아닌 ‘현상’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작은 교회 운동은 메가처치 현상의 비성경적인 부분을 지적하며 그 대안을 제시한 모델이다. 하지만 본인들이 비판하는 메가처치 현상만큼이나 자신들도 교회를 성도의 수라는 틀로 바라보고 있다.
결국 “성도가 몇 명이냐”라는 틀이 그 생각의 기초이다. 많으냐 적으냐를 따지는 한, 작은 교회 운동은 메가처치 현상과 뿌리가 크게 다르지 않다. 신광은 박사도 같은 지적을 한다.
“메가처치 현상의 대안이 ‘큰 교회 vs 작은 교회’라는 틀로 제시되는 것은 메가처치 현상이 쳐 놓은 ‘크기’라는 프레임에 스스로 갇히는 결과를 낳는다.”_신광은, (《메가처치를 넘어서》, 포이에마, 2016, 218쪽)
대안이 아니라 성경
웨이처치는 큰 교회 운동이나 작은 교회 운동에 관심이 없다. 다만 성경에 관심이 있다. 우리는 처음부터 지금껏 어떤 현상에 대한 ‘대안’을 말한 적이 없다. 대안은 이념을 만들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교회를 이념으로 진행한다면 그 동기는 믿음이 아니라 신념이 되고 말 것이다.
현상을 바꾸는 힘은 신념에 있지만 성경을 따르는 힘은 믿음에 있다. 우리는 신념의 자녀들이 아니라 믿음의 자녀들이다. 교회는 옳다고 믿는 것을 따르는 이념 공동체가 아니다. 성경을 따르는 믿음의 공동체이다.
작은 교회 운동은 옳고 멋지다. 하지만 그것이 메가처치 현상의 반작용에 의한 하나의 이념인 이상 우리는 관심이 없다. 교회는 특별한 사람만 알 수 있는 특별한 대안을 따라가지 않는다. 오히려 누구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정답을 따라간다.
교회는 어떤 현상을 뒤집기 위해 진행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이 말하는 것을 제한 없이 직접 실행하다 보면 덜컥 생겨 버린다.
누군가는 또 묻는다. “웨이처치가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신학자나 멘토는 누구입니까?”
그때마다 우리는 대답해왔다. “예수 그리스도!”
또 어떤 사람들이 묻는다. “웨이처치의 기초가 되는 교단이나 단체는 어디입니까?”
그때도 우리는 대답해왔다. “성경책이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고, 성경의 기초 위에 섰다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로부터 도출된 대안을 실행한다는 말은 적어도 교회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교회의 역사가 이를 보여준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상황과 시대를 초월해서 성도들이 희생으로 실행해왔던 스토리가 교회사를 이루고 있다. 교회는 이념을 좇지 않고 진리를 따른다.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님
교회가 좇는 진리는 하나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예수로 하나가 된다. 교회는 모여서 기도하고 말씀을 배우며 실천을 서로 돕는다(행 1:14, 2:16-47, 마 28:20).
이 일은 성령님이 주도하신다. 성경 저자도 성령이시고(딤후 3:16, 벧후 1:21), 성경 교사도 성령이시니(요 14:26), 한 성령 안에서 교회는 한 말씀을 따를 수 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다.
분열은 예수님 밖에 거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생긴다(고전 1:11,12,30). 교회 모임의 구성원들은 모두 성령의 임재가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행 1:8). 성령님이 교회를 하나 되게 하신다.
처음 성령님이 임하셨을 때 제자들은 각국의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했다(행 2:4). 바벨탑 이후, 인류가 다 여러 언어로 흩어졌다(창 11:7,8). 하지만 이를 성령께서 다시 방언 사건으로 하나 되게 하셨다(행 2:16-18).
성령님은 교회를 사랑과 평안으로 하나 되게 하시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 되게 하신다(엡 4:1-8). 모두 함께 그분의 말씀을 따르도록 인도하신다. 남녀노소와 빈부가 모여 함께 성경을 좇아 하나의 교회가 될 수 있는 근거가 성령님이다. 성령의 사람일 때 진리로 연합한다.
충분조건
교회 모임의 내용을 보라. 사도행전 1장에서 성령님의 임재에 대한 약속과 그 실행이 없었다면 2장의 교회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최초의 교회 모임에 대해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초대교회의 이 모습이 너무 멋져서 많은 사람들이 그 모임의 내용을 따라 한다. 하지만 사도행전 2장 앞에는 1장이 있다. 우리에게는 사도행전 1장 없이 2장만 취사선택할 권한이 없다. 1장에 기록된 성령임재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과 이행이 교회에 대한 충분조건이다.
성령의 사람들이 모이면 교회가 탄생된다. 하지만 그 반대는 충분조건일 수 없다. 성경을 배웠다고 다 교회가 될 수는 없다. 함께 모여 식사교제와 예배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아무리 서로 물건을 나눠 쓴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교회가 될 수 없다. 성령님의 임재가 교회의 원인이다.
흔히들 사도행전 2장을 예배, 전도, 교제, 훈련, 봉사의 다섯 가지로 요약한다(릭 워렌 Rick Warren, 《목적이 이끄는 교회: 새들백교회 이야기》, 디모데, 1995, 125쪽). 그러나 다섯 가지 요소 중 어느 것 하나를 추구한다고 해서 교회가 이뤄지지는 않는다. 모두 성령의 역사 바깥에서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교회는 신비한 모임이다. 성령의 임재와 충만하심이 있는 성도들일 때, 한 성령 안에서 하나의 모임이 되어 교회로 존재한다.
회개
베드로 사도는 성령임재의 원리를 이렇게 설명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그 비결이다. 성령님은 거룩하신 분이다. 그분과 공존하려면 회개해야 한다. 성령임재뿐만 아니다. 성령충만의 비결도 회개이다.
교회는 이념이 아니라 진리를 좇는다.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되는 길은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령충만은 회개하며 예수님을 따를 때 이뤄진다. 한마디로 회개 공동체이다. 회개하지 않는 신자, 예수님을 좇지 않는 성도는 교회 모임에서 나뉜다.
회개의 기준은 예수님이다. 그분이 곧 말씀이시다(요 1:14). 어떤 종교인이나 인간 선생의 이념 때문에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회개한다. 성경 진리에서 벗어나는 것을 회개한다. 회개란 예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눅 7:37). 그분께 부딪혀 품안의 옥합을 산산조각 깨뜨리는 것이다(막 14:3).
교회 모임은 정치나 리더십으로가 아니라 회개로 진행된다. 회개할 때 성령 안에서 한마음과 한 뜻이 된 사람들이 모인다.
집중의 비밀은 불필요한 것들을 배제하는 데 있다_하워드 헨드릭스(Howard Hendricks) [복음기도신문]
이 칼럼은 필자의 저서 <끝까지 가라(도서출판 규장)>에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발췌, 게재합니다.
송준기 | 총신신대원 졸. 웨이처치 담임 목사. ‘교회와 선교는 하나’라는 주장을 이론만이 아닌, 선교적 교회 개척 실행을 통해 순종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저서 <끝까지 가라> 등 10권의 책에 그동안의 생각과 순종의 여정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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