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 70주년 특별기획]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8)
강원도 화천을 지나 황해도 남천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나는 인민군 117연대에 인계됐다. 그곳에서 오 일등병은 보지 못했다. 당시 인민군들은 아군(국군 및 유엔군)의 비행공습을 피하기 위해 주간 행군은 하지 않고 낮에는 숲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어서야 북쪽으로 후퇴했다.
그날도 인민군은 평탄한 소나무 숲속에서 야영을 하고 있었는데 국군 포로 10여 명을 중공군이 인민군에게 인계하려고 왔다. 그들은 전부 악기를 가지고 있었다. 군악 대원들이었던 것이다. 생포된 군악대원과 함께 포로만 관리하는 부대로 끌려가보니 거기엔 미군 포로 3명도 있었다. 포로들은 별도 천막에서 인민군의 감시하에 수용되었다. 생포된 군악대는 3사단 소속이고 미군 3명은 모두 3사단에 파견된 고문관들이었다.
그날 어둠이 내릴 때쯤 중공군 부대가 후퇴하기 시작했다. 인민군에 끌려가는 국군포로의 수는 20여 명에 달했다. 노끈이나 칡으로 포로들의 손목을 포박하고 4~5명의 인민군이 행렬 좌우로 감시하며 행군을 한다. 밤이 새고 날이 밝아오니 부대행렬은 평시와 같이 숲속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한다. 아군의 비행공습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 와중에도 인민군은 소대별로 모여 앉아 자아비판의 시간을 가진다. 한 병사가 정치적인 비판을 하거나 인민군 군기를 문란케 한 사례가 적발되면 앞에 세워 장시간 자아비판을 하게 한다. 생포된 국군들은 빳따로 한번 기합을 받는 것이 낫지 똑같은 죄목으로 며칠씩 자아비판하는 건 듣는 것도 지겹다고 했다. 약 1시간 동안 자아비판 시간이 끝나면 자유시간이 주어진다.
다 같이 일어나 인민군 특유의 탭댄스 춤을 신나게 추는데 볼수록 매력적이다. 이 탭댄스는 소련군의 춤에서 유래되어 인민군의 유일한 춤으로 즐기게 됐다고 한다. 그런데 연대장이 생포된 군 포로에게 인민군과 같이 춤을 추라고 했더니 미군 병사가 나와서 인민군과 함께 탭댄스를 신나게 췄다. 신기한 장면이다.
점심시간이다. 인민군의 식사는 간단하다. 짭짤한 주먹밥에 콩기름을 발라서 고소한 맛이 나며 맛이 있었다. 인민군 하나가 내 곁에 앉으며 국방군 식사보다 맛이 있느냐고 묻고 자기들의 주먹밥이 영양가가 훨씬 풍부하다고 자랑을 한다.
다음은 노래시간이다. 소대별로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는데 유행가를 부르는 전사는 하나도 없다. 모두 사상이 건전한 노래만 부른다. 이번에는 연대장이 일어서면서 국방군 동무들의 노래도 한번 들어보자고 제안하니 모두 ‘옳소’ 하면서 박수를 쳐댄다.
군악대가 ‘아리랑’을 멋지게 마쳤고 국방군 동무의 노래를 청하는데 노래하겠다는 친구가 없다. 연대장이 나를 지목하면서 “제일 나이 어린 동무가 한번 불러보시오.”라고 말했다. 모두 박수를 치면서 재촉한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노래 부르는 걸 마다한 적이 별로 없다.
나는 일어나 군악대를 향해 ‘나그네 설움’을 주문했다. 반주에 맞춰 2절까지 구슬프게 불렀다. ‘재창이요’ 소리를 지르며 앵콜을 요청한다. 머뭇거리며 주위를 바라보는데 연대장동무가 외친다.
“조 동무 재창이요. 한마디 더 불러 보시오.” 그는 박수를 치면서 말했다. 나는 다시 군악대를 향해 ‘울고 넘는 박달재’를 주문했다. 이번에는 긴장을 풀고 마음 놓고 ‘울고 넘는 박달재’를 구성지게 2절까지 불렀다. 연대장까지 일어서면서 환호의 박수를 친다.
해가 지면 또 북으로 행군이 시작된다. 그날은 초저녁부터 비가 내려 특명이 있을 때까지 모두 대기 중이었다. 인민군 연대장 연락병이 오더니 ‘조 동무, 연대장동무께서 오라니까 함께 가자요’라고 말했다. 그를 따라 연대장 막사에 갔더니 자리에 앉으라면서 말문을 열었다.
“조 동무는 몇 살이요?” 물었다.
나는 주저 없이 19세라고 대답했다.
“고향이 어디오.” 재차 물었다.
“충북 단양입니다.” 다시 물었다.
“언제 국군에 입대했는가?”
“6.25사변 직후 18세에 입대했습니다.”
“그러면 대구 팔공산 전투를 알고 있는가?”
“이야기는 들었지만 팔공산 전투는 모릅니다.”
대화를 바꿨다.
“남한 군은 조 동무처럼 어린나이 사람에게 입대를 강요한단 말이요.”
나는 약간 머뭇거리다가 내가 자원해서 입대했다고 대답하려다가 “그렇습니다. 강제 동원돼 입대했습니다.”라고 답했다.
간단한 질문이 끝나고 연대장은 내게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조 동무가 어제 저녁에 부른 나그네설움과 울고넘는 박달재 가사를 내게 적어줄 수 있겠나? ”
“2절까지 써서 드리겠습니다.”하고 메모지에 기록해 주었다.
“이것은 조 동무와 나만의 비밀이야 알았나?”
“네 잘 알겠습니다.”
연대장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의 고향은 충북 진천으로 고향 동무를 만나게 되어 반갑다며 노래를 잘 부른다고 추켜세웠다. 연대장은 내게 볶은 콩을 권하면서 자신이 7세 무렵 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 평양으로 이사해 중고등학교를 평양에서 마쳤다고 말했다. 오랜만에 ‘나그네 설움’ 노래 가락을 들으니 고향 생각이 난다는 것이다.
해방 후에 단양에서 노래자랑에 입선된 후 가장 열심히 불렀던 노래가 인민군 연대장의 마음을 향수에 젖게 했다는 생각에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44살 이었다. 그 세월을 살아오면서 어찌 인생무상을 한번도 느끼지 않았겠는가. 더구나 남쪽에 고향을 둔 사람인데…. 연대장 동무는 막사를 나오려는 내 등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일부터 나와 같이 행동해야 돼. 막사에 돌아가서 쉬어.” [복음기도신문]
조용학 | 1934~2013. 충남 단양 생(生). 학도병으로 6.25전쟁 참전. 삼미그룹 총무과장 정년퇴직. 서울 노원구 국가유공자수훈회 사무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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