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이번 여름에 다시 전라남도 목포를 방문했다. 일단 목포 하면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을 생각나게 한다. 필자가 이번에 목포를 다시 방문한 이유는, 1897년 3월 5일에 세워진 ‘목포양동교회’를 방문하기 위함이었다. 목포양동교회는 호남 기독교회의 탯줄이나 다름없다. 유진벨 선교사에 의해 양동교회가 세워진 지도 벌써 12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특별히 양동교회는 호남의 관문이자 1919년 3.1운동의 거점이 되어 양동교회 성도들은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만세운동에 앞장섰다. 지금은 양동교회가 기독교 장로회 소속이지만, 그 시절에는 통합도, 합동도, 고신도, 대신도 없는 하나의 장로교회 시절이었다. 필자의 관심은 1920년 4월 7일~8일에 양동교회에서 일어난 사건에 있었다.
1920년 4월, 3.1운동 1주년 기념 집회 겸 ‘평양 숭실전문학교 전도대’를 초빙해서 대대적 전도 집회를 열었다. 전도대는 호남에서 제일 큰 교회인 양동교회에 도착했다. 대표 김형재 외 17명의 전도대는 기악과 성악을 하는 음악인들을 비롯한 대형 전도단인 셈이었다.
그리고 그중에 연설 책임자요 설교책임자는 당시 숭실전문학교 졸업반인 평안북도 벽동 출신의 <박형룡>이었다. 그는 겨우 24세에 불과한 앳된 청년이었지만, 당대 최고의 견문과 학식으로 명쾌하고 재치있게 강연을 했었다. 그 당시 목포의 인구는 15,000명 정도였는데, 그날 양동교회에 참석한 인원은 1,300명이었으니 목포 인구의 10/1이 이 집회에 참석한 셈이었다. 양동교회는 말 그대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 시절 서양음악을 바로 받아드린 숭실학교 학생들의 악기 연주와 노래는 장안의 화제가 되었었고, TV와 라디오도 없던 시절, 사람들은 꾸역꾸역 교회로 모여들었다. 그 집회에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 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서너 배가 더 많았다고 한다. 그날 강연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겠다고 거수한 자는 남자가 20명, 여자가 6명이었다고 한다. 박형룡의 강연은 그냥 시사적인 것이나 교양 강좌가 아닌 복음의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집회를 마치고 다음 날 이른 아침 7시 20분이 되어 막 광주로 출발하려고 할 때, 박형룡은 경찰에 체포되어 목포 감옥에 송치되었다(1920.4.14일 동아일보 3면 기사).
필자는 박형룡 박사 아래서 7년을 공부했고, 그에게서 석사학위 논문지도를 받았다. 그래서 그에 대한 상당한 자료를 갖고 있으며 1940년대부터 만주 봉천신학교 교수 시절에 작성한 교의학(敎義學) 육필원고를 모두 가지고 있다(한국칼빈박물관 소장). 그중에 노트에 쓴 ‘박형룡 박사의 회고록’을 현대어로 풀어서 「정성구 편, 박형룡 박사의 회고록」을 출판한 바 있었다. 이번에 필자가 직접 목포양동교회를 방문해서 교회당을 둘러보았다. 1920년 박형룡이 목포양동교회에서 <하늘의 칼(天의 刀>이라는 제목으로 설파한 내용은 사실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필자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와 7년 동안 그에게서 배웠던 필자의 생각으로 박형룡 박사의 메시지는 ‘일제 강점과 박해는 반드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있을 것이다!’라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삼상2:10)는 성경의 말씀이다.
이때 방청석에 앉아 박형룡를 감시하고 있던 일본 경찰은 박형룡의 강연을 <항일, 반일사상>으로 규정하고 그를 목포 감옥에 송치했다. 그래서 박형룡은 두 달 동안 목포 감옥에 구금되어 있다가 정식재판을 받았다. 당시 목포양동교회 담임 목사인 이경필 목사의 위로가 컸다. 박형룡은 재판장으로부터 8개월의 형 선고를 받고 감옥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니 <하늘의 칼>이라는 강연의 내용은 일제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을 것이고, ‘조선의 독립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며 일본은 반드시 심판과 징계를 받아 패망할 것이다!’라는 메시지였다. 박형룡은 <보안법 위법자>라는 명패를 달고, 3.1운동 투사들과 함께 복역하면서 「목포 철장 10개월」이라는 주제로 시 한 수를 남겼다.
「1920년 4월 9일.
유달산에 해 기우러 석양이 된 때
목포부 연치동 20번지의
높은 담 철창 속에 드러왔고나
성명은 변경하여 햐꾸욘쥬고(140호)
기호는 낮아져서 오마에르다
간수도 노 호령에 떨고 있으니
영오 중에 이 신세 가련하고나」
라고 읊었다. 후일 박형룡은 한국교회 정통신학의 기수이자, <칼빈주의 교의학(敎義學)>을 수립한 한국교회의 교부가 되었다. 그가 가신지도 어언 45년이 지났지만, 박형룡을 단순히 신학자로만 볼 것이 아니라, 일제의 탄압에 맞서 <하늘의 칼> 곧 ‘하나님의 채찍이 반드시 일본을 멸망시킬 것이다!’라는 예언자적 메시지를 하다가 10개월 철장 신세를 진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는 공산주의 운동을 했던 사람들도 국가의 영웅으로 추대하고 동상도 세워주고, 가짜 애국자들을 국가유공자로 대우하는 시대인데, 민족을 깨우고 일제를 향해 ‘하나님의 불 심판과 칼 심판이 있을 것이다!’라고 외치다가 10개월 옥살이한 박형룡은 한국의 대 신학자이지만, 민족정기를 되살리는 애국자로서의 모습도 되새겨 봐야 할듯하다.
<하늘의 칼> 곧 하나님의 심판은 역사의 종말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어둡고 패역 한 시대에도 여전히 하늘의 칼은 번득이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복음기도신문]
정성구 박사 | 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40여년간 목회자, 설교자로 활동해왔으며, 최근 다양한 국내외 시사를 기독교 세계관으로 조명한 칼럼으로 시대를 깨우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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