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높이라 Prize Wisdom 잠 4:8

[김봄 칼럼] 깔루깔루가 데려온 울지 않는 아이

사진: 김봄 제공

동네의 깔루깔루(개구쟁이를 현지에서 부르는 말)들이 숨이 넘어갈 듯이 나를 부르면서 찾는다. 나가보니 서너 살쯤 보이는 남자아이를 내 앞으로 데리고 온다. 처음 보는 아이였다.

이 아이를 전도했다는 뜻인가? 그래서 복음을 전하라고 데리고 왔나? 싶었는데 깔루깔루들이 아이의 귀를 보여준다. 세상에! 라는 말이 그냥 터져 나올 정도로 진물이 가득 고여 있다.

아이를 옆으로 눕히고 귀 안의 상태를 보니 곪아 터진 진물로 귀 안은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어른들은 뭐 하고 있었던 걸까? 아무리 병원에 데리고 갈 상황이 안되고, 약이 없어 치료를 못 해주더라도 적어도 닦아 줄 수는 있었을 텐데.

괜히 나는 얼굴도 모르는 아이의 부모를 원망해 본다. 위기에 처한 아이들을 볼 때마다 생긴 버릇이다. 버릇처럼 생긴 안타까운 마음이 그들을 향한 원망이 되고, 그 원망은 해줄 게 없는 나를 향한 자책이 되기도 한다.

이 정도가 될 정도면 엄청나게 아팠을 텐데, 마을이 떠나가도록 울어도 시원찮을 판에 아이의 표정은 덤덤하다. 아이의 어떤 마음도 읽을 수가 없다. 아픔은커녕 처음 만나는 이방인을 향한 서먹함이나, 두려움조차도 읽히지 않는다. 어떤 감정도 들키지 않겠다는 작정을 한 것처럼 말이다.

‘오시야?’ (괜찮아?) 라고 물었더니 대답이 없다.

소독하고, 항생제를 먹이는데도, 아이는 눈만 끔뻑거릴 뿐 무표정은 여전하다. 이름을 물었지만, 대답이 없다. 깔루깔루들도 모른다면서 아이가 말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엄마는? 아빠는? 집은 어디야?’ 손짓 발짓을 해가면서 물었지만, 아이는 도리어 나의 시선을 피한다. 다행히 깔루깔루들이 아이의 집을 알고 있었다. 아이를 업고 깔루깔루들을 따라 10여 분 숲길을 따라가다 보니 짓다 만 아이의 집이 나온다.

지붕은 슬래브를 얹다 말았고, 집 역시 벽돌을 쌓다 만. 그야말로 폐허 같은 곳이다. 스프링이 다 꺼진 흉물스러운 침대 매트 위에 아무렇게 벗어 던진 옷가지들과 마당에 굴러다니는 살림살이들이 사람이 살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렸는데도 어른은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한글 수업을 앞둔 나는 언제까지 기다릴 수 없어 옆집에 아이를 부탁하고 내일 다시 오겠다며 발길을 돌려야만 했는데, 온종일 아이가 눈에 밟혀서 마음에 천근 같은 납덩이를 달아 놓은 것 같았다.

당장 가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에 다음 날 아침 일정이 끝나자마자 아이의 집을 방문하겠다고 다짐하면서 다음 날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른 아침. 아이가 먼저 나를 찾아왔다. 진물이 흐르는 귀를 가리키며,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아이의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른 걸음으로도 10분이나 되는 거리를, 이 작은 아이가 맨발로 걸어왔을 것을 상상하니, 목이 멨지만, 어제와 달리 아이의 눈빛에 마음이 담겨 있어서 감사했다.

치료를 해주고 약을 먹이기 위해 빵을 주었더니, 며칠 굶은 것처럼 허겁지겁 먹는다.

나는 아이를 ‘브래드’라고 부르기로 했다. 아이에게 ‘나는 샤론티차. 너는 브래드’라고 했지만 아이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빵만 먹는다.

아이와 함께 집으로 가니 역시나 아무도 없다. 할 수 없이 깔루깔루들을 불러 사탕과 비스킷을 상으로 걸고 브래드를 부탁했고, 깔루깔루들은 훌륭하게 역할을 잘 수행해주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브래드가 찾아왔다. 찾아오는 시각이 더 빨라지고 있다. 이른 아침 아이의 노고를 덜어주기 위해 일찍 서둘렀는데도, 브래드의 부지런함을 이기지 못했다.

행여, 내가 자기 집으로 찾아올까 봐, 그래서 아침마다 누리는 일대일 맞춤 치료와 빵 한 조각의 특권을 뺏길까봐 아이는 새벽마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아이는 하루에 한 번, 이른 아침, 나에게 찾아와 치료받고, 빵을 함께 나누어 먹었다. 5일 만에 아이의 귀에서 나오는 진물이 멈췄다.

다음날 주일. 브래드는 교회에 왔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해도, 아이는 뭔가를 알아듣는 것처럼, 율동했고 진지한 표정으로 설교 말씀을 듣고, 두 손 모아 기도했다. 무엇을 기도했을까? 아이의 기도 제목으로 함께 손을 잡고 기도해 주고 싶었다. 아프면 울 수 있는 아이가 되기를 원하는 나의 기도 제목도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계속> [복음기도신문]

*이 칼럼은 필자의 저서 <작지만 피어있는 꽃들>에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발췌, 게재합니다.

김봄 | 기록하는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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