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높이라 Prize Wisdom 잠 4:8

[박태양 칼럼] 청담, 기독교와의 혼합도 싫어한 독실한 불심(佛心)

사진: Yamin Ohmar on unsplash

눈먼 기독교(24)

신을 죽임으로써 불교와 기독교가 하나가 되는 길을 현각 스님이 제시했다면, 기독교는 아예 상종할 가치가 없는 종교로 생각하고 배타적으로 기독교를 대한 승려가 바로 청담 스님이다. 청담 스님은 불교의 참 모습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우선 자신이 근검절약의 본을 보였고, 불교 내의 잘못된 인습을 고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전수하려고 노력했다. 혹자는 성철 스님이 참 수도승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힘썼고, 청담 스님은 불교의 정화에 앞장섰다고도 말한다. 불교다운 불교를 주장했던 스님답게 청담은 기독교의 교리가 잘못됐다는 점을 매우 강한 어조로 비판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왜 복숭아를[1] 보기 좋게 만들어 놓고는, 또 따먹지 말라는 소리만 안 했어도 안 따먹을 게 아닙니까? 따먹지 말라는 말을 해서 천진한 동심에 호기심을 불어넣어 주었으니 따먹지 말라는 소리가 따먹으라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만든 아들을 말 안 들었다고 벌을 주었습니다. 어디 예수만 독생자입니까? 우리도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독생자 아닙니까? 자기 손으로 일 저지르도록 만들어 놓고 일을 저질렀다고 해서 지옥에다 가둬놓고 영원히 못 나오게 한다면 그것도 말이 안 됩니다.[2]

도대체 하나님은 선악과를 왜 만들어서 사람을 시험에 들게 했느냐는 것이다. 또한 자기 말 안 듣는다고 지옥으로 협박하는 신은 예수이건, 하나님이건 잘못됐다는 것이다. 이 글이 들어 있는 책의 첫 장 제목이 ‘절대 신은 어떻게 죽었는가’이다. 청담에게 있어 기독교의 절대 신은 너무나 불합리한 존재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신일 수가 없다. 그래서 죽은 것이다. 그에게 있어 절대 신은 ‘죽었다’기 보다는 원래부터 ‘죽어있는’ 상태다.

많은 사람들이 청담과 같이 선악과 질문을 한다. 왜 하나님은 그것을 만들었을까?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선악과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기억하게 만들어 주는 보이는 하나님의 상징’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피조물의 속성을 잘 알고 계신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하나님을 잘 기억하도록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그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위치한 곳이 동산 중앙이었다. 눈에 잘 띄는 곳에 그 나무를 배치한 것이다. 보이는 상징인 선악과를 건드렸으므로 그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한 것이며 불순종이라는 죄를 지은 것이다.

청담은 흔히 세상 사람들이 말하듯이 말하고 있다. 그런 절대 권위를 가진 존재가 싫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그런 절대 권위자를 믿는 종교이고 불교는 자기 자신이 곧 신이라는 종교다. 물론 공식적으로 불교는 신을 믿지 않지만, 자기 안에 신이 있다는 것과 자기가 신이라는 것은 다른 말이 아니다. 청담은 불교의 가르침에 매우 충실하여 신도 부정하고, 절대 개념도 부정하고, 오직 마음만이 영원하다고 말한다.

불교의 정신은 어떤 형식이나 내용에 의해서 절대불변의 것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고 형식화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신도 부정하고 물질도 부정하고 오직 말하면 듣고 무엇을 생각하고 하는 이 마음자리만을 영원한 실재로 봅니다. 이 마음만이 참 나(眞我)고 우주의 주인공이고 진리라는 것입니다.[3]

사람의 마음만이 진정한 자기이고 우주적 진리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선승(禪僧)이라면 누구나 하는 말이다. 그런데 같은 책에서 청담은 그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은 다 헛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도대체 마음이 진짜라는 의미인지 가짜라는 의미인지 애매하다. 마음은 진짜인데 거기서 나오는 것은 가짜라는 의미로 말하는 것 같기는 한데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마음이 내는 현상계는 다 거짓말이고 꿈입니다. 부처도 꿈이고 예수도 공자도 다 꿈이고 지구 태양이 다 꿈입니다. 오직, 이 마음만이 전능한 주인공으로서 모든 것을 만드는 실재고 주재자입니다[4]
불교 이외의 다른 이론들은 다 완전무결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교의 사랑만 해도 한계가 있는 사랑이고 자기한테 국한되어 있는 사랑이지 한계 밖에는 한 치도 못 나가는 사랑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하고 예수 믿는 사람하고 만나면 부부간이나 부자간에도 서로 38선이 생깁니다. 종교가 다르면 한 집안에 살면서도 며느리하고 서로 원수가 되어서 불화가 생기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기독교의 잘못입니다.[5]

불교에 대한 자신의 신념이 워낙 확고해서 청담은 오직 불교만이 완전무결한 종교적 이론이라고 선포한다. 그러면서 기독교는 교리뿐만 아니라 사랑까지도 미흡한 것이라고 말한다. 불교다운 불교를 주장한 승려답게 타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해서 조금도 타협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런데 청담 스님처럼 불교다움을 지키기 위해 기독교와 혼합되는 것을 극구 싫어하는 모습이 역설적으로 기독교에는 이익이다. 청담 스님과는 다르게 요즘 많은 승려들이 종교 화합을 빙자한 종교 통합을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계적인 고승 틱낫한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자신이 쓴 『살아계신 붓다와 살아계신 그리스도』라는 책에서 “예수님과 부처 두 분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송이 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전 세계에서 온 불자들이 함께 모여 사는 프랑스의 한 마을에서 매일 예불을 드리는 제단 위에 부처 형상과 예수의 십자가를 함께 모시고 있다. 이런 모습을 세상에서는 환호한다. 그런데 청담은 그런 시대 조류에 아무 관심을 두지 않았다. 불교는 기독교와 다르다고 선명하게 외치는 청담 스님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기독교는 불교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래서 불교와 기독교가 결국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숭산, 현각, 틱낫한 보다 청담 스님이 기독교에는 더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1] 성경은 선악과를 복숭아 또는 어떤 특정 과일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2] 이청담, 『청담스님 수상록』, 동천사, 32쪽

[3] 앞의 책 40쪽

[4] 앞의 책 46쪽

[5] 앞의 책 93쪽

[복음기도신문]

*이 칼럼은 필자의 저서 <눈먼 기독교>에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발췌, 게재합니다.

박태양 목사 | 중앙대 졸. LG애드에서 5년 근무. 총신신대원(목회학), 풀러신대원(선교학 석사) 졸업. 충현교회 전도사, 사랑의교회 부목사, 개명교회 담임목사로 총 18년간 목회를 했다. 현재는 (사)복음과도시 사무총장으로서 소속 단체인 TGC코리아 대표와 공동체성경읽기 교회연합회 대표로 겸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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