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곳에서 아무 것도 찾지 못한다면 정말 당혹스럽다.
반대로 정말 기대할 수 없는 곳에서 생각지 못한 경험을 하거나 대상을 만나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세워진 신학교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신학자에게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면 얼마나 당혹스러운가?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성경진리, 그 중심 진리는 십자가일진데 아무리 수업을 들어도 정작 있어야 할 십자가의 복음은 온데간데없고, 오히려 없어도 될 것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온다면 얼마나 당혹스러운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천국은 믿음으로만 들어간다. 살아있는 참된 믿음이 주여 주여 하는 자에겐 있지 않을까?
귀신까지 쫓아내는 자에게는 있을 줄 알았는데 그에게 그런 믿음이 없다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는 자에게는 있을 줄 알았는데 그에게 그런 믿음이 없다면, 얼마나 당혹스러운가? 주님은 이런 일이 마지막 날에 드러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니고데모와 수가성 여인
니고데모, 그는 바리새인이었고 당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선생이었으나 ‘거듭남’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주님이 책망하셨다. 이스라엘의 영적 스승으로 자부하던 그가 주님의 ‘영적인’ 말씀을 못 알아듣는다면 누가 알아들을 수 있을까!
그런데 놀랍게도 사마리아의 수가라 하는 동네의 세속적인 여인은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는다. 유대인들로부터 개처럼 취급받던 사마리아인, 그것도 가장 부도덕했던 여자. 누가 보더라도 가장 못 알아들을 사람이, 가장 잘 알아들었어야 했던 니고데모와 다르게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는다.
예배에 관한 진리, 너무나 파격적인 말씀이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1-24)”
영적인 감각이라고는 전혀 기대할 것 없어 보이는 그 여인이 대답한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요 4:25)”
여인의 대답에 주님은 ‘내가 그라’고 하신다. 그러자 그 여인은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거한다. 그녀는 대단한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났다. 가장 세속적이며 육적인 여인이 메시야에 대한 주님의 선포를 알아듣고 그를 증거했다. 수가성 전체를 뒤흔든 일이 가장 기대할 수 없는 여인을 통해 일어났다.
부자관원과 세리장 삭개오
영생을 얻기에 가장 합당해 보이는 젊은 부자 관원이 예수님 앞에 나타났다. 영적인 갈망과 높은 도덕적 수준과 율법적 의를 가진 그였다. 그러나 그에겐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없었다. 남들이 보기에 부담스러울 만큼 거룩했던 그는 결국 돈과 영생 사이에서 돈을 선택하고 떠나갔다.
그앞에 그와는 견줄 수 없이 초라한 세리장 삭개오가 나타난다. 돈의 노예가 된 그에게 영생을 소유할만한 목마름이 있었을 것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구원이 여기 있을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모든 자가 존경하는 주의 종에게는 있을 줄 알았는데 주님을 믿는 믿음을 전혀 볼 수 없다면…. 이처럼 예배당 안에서 구원 받을 복음을 발견할 수 없다면 얼마나 당혹스러운 일인가! (2014.8) <계속> [GNP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