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난민 리포트 (2)
우리는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있는 지역 가운데, 어디를 가야할지 선택해야 했다. 현재 많은 비영리단체(NGO)나 교회, 선교단체들은 난민을 돕기 위해 폴란드나 루마니아를 선택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우리는 헝가리를 선택했다. 그 이유는 세계인들에 의해 이미 많은 지원을 받고 있는 폴란드와 루마니아 사이에서 사각지대처럼 관심을 덜 받고 있는 곳이 바로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국경쪽이라는 소식을 현지 사역자들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예상 목적지였던 폴란드에서 이곳으로 변경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공항에 도착하다
우리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국제공항에 도착 후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인 데브레첸으로 향했다. 난민들이 국경을 탈출한 이후 대도시로 모이기 때문이다. 부다페스트 공항에서 차로 약 2시간 30분 이동하여 제2의 도시 데브레첸에 도착했다.
데브레첸은 헝가리 제 2의 도시로 부다페스트 동쪽 약 220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우크라이나·체코·슬로바키아·루마니아 등에 이르는 철도의 교점을 이룬다고 한다.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로, 제분·소시지·통조림·농업기계·피혁·담배·가구·의료기계 등의 공장이 있으며, 시내에는 대학·농업 아카데미·교육연구소·박물관 등 문화시설이 많다고 한다. 주변의 평야에서는 과수, 특히 포도의 재배가 성하며, 서부에 널리 전개되는 푸스타(pusta:초원)는 관광지로서도 유명하다고 알려져 있다.
16세기 이래 이 나라 신교도의 중심지를 이루어 ‘캘빈파(派)의 로마’라는 별칭이 있으며, 그와 관련된 건축물이 많다. 고대에는 슬라브인(人)이 거주했으나, 10세기에 마자르인이 점령했다. 1849년 이곳에서 고슈트를 수반으로 하는 혁명정부(革命政府)가 수립된 역사를 갖고 있다. 또 1944년 가을 소련군에 의하여 나치의 점령에서 해방되고 그 해 12월 헝가리 임시국민의회·임시정부가 성립된 곳이기도 하다.
연합.협력이 중요한 난민 지원 사역
우리를 맞이한 사람은 게리와 캐롤린 선교사다. 그들은 국경을 넘어온 많은 우크라이나 난민들에게 필요한 숙소와 음식을 조달하기 위해 주변의 교회와 학교와 같은 곳을 찾아가 이들을 돕고 있었다. 또 자신들의 창고와 집을 개방해, 난민들을 섬기고 있었다.
특히 이러한 난민 발생 사태에서 혼자서 단독 사역을 할 수도 없고, 실제로 어렵기도 하다. 이 때문에 보다 많은 정보가 있는 지역의 기관과 교회, 단체와의 협업이 가장 중요하다고 게리 선교사는 말한다. 그의 도움으로 우리는 국경 지역의 난민캠프를 방문했다. 이곳은 고등학교 시설인데, 일부 시설을 숙소로 개조해 난민 캠프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여러 난민을 만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필요한 난민들… 가장 필요한 의약품 조달이 쉽지 않아
난민들은 전쟁이 나서 부랴부랴 짐을 싸들고 나오다보니, 미처 챙기지 못해 많은 물품들을 필요로 한다. 머리를 말리는 드라이기부터 시작해서 여러가지 의류, 신발 등 필요한 것은 말로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다.
무엇보다도 시급한 건 의약품이다. 하지만 의약품을 구입하기는 쉽지 않다. 의약품을 구하려면 처방전이 필요한데, 외국인 신분으로 처방전을 얻기 힘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의약품을 지원해주고 싶은 국가들도 정부의 허락없이는 전달해주는 것도 쉽지 않다. 이들을 돕는 사람들이 이들의 필요를 가늠해 의약품을 준비해, 가방에 담아서 가져다 주기도 한다.
의약품의 안전성 문제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다급한 상황에서 원리원칙만으로는 이들을 도울 수가 없다. 난민들에게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로 여겨졌다.
그리고 그들은 예전에 취재했던 시리아 난민들과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시리아 난민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기 어렵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난민들은 사랑하는 고국의 재건사업을 위해 그리고 지금도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남편과 형제들이 있는 고국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그래서 많은 난민들이 국경에 머물고 있는 것도 여건이 허락되면 하루라도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난민들에게 소중한 다문화교회
너무나 당연하지만, 다양한 필요와 도움을 요청하는 이곳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에 좀 더 집중하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때 언어는 다르지만, 주님 안에서 하나됨에 있어서 꼭 필요한 공간이 바로 다문화교회이다.
다문화교회는 난민들에게 매우 소중한 신앙공동체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 고국의 전쟁과 기근 그리고 여러 힘든 상황 속에서 타국으로 가면 너무나 외롭기 마련이다. 또 난민캠프 근처의 현지 교회에 방문하게 되면 타지인이라는 느낌이나 상황이 더 외롭게 만든다고 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미 다양한 민족이 섞여있는 다문화교회는 난민들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형태의 교회모습이다.
이런 다문화교회 가운데 한 곳, 영국 미국 헝가리 이집트 루마니아 인도네시아 남아공 등 약 20개국의 유학생들이 있는 곳을 방문했다. 필자도 그들의 셀모임에 참여해 프랑스, 미국, 루마니아, 파키스탄 출신 학생들과 우리가 묵상중인 룻기에 대해서 나누고 특별히 한국말로도 그들을 위해 축복기도하기도 했다.
룻기를 통해 깨닫게 되는 난민들의 상황
우리는 이번 여정에서 룻기를 묵상하며 기도했다. 룻기를 보면서 우크라이나 난민들 역시 남편과 아들 그리고 아빠가 죽어가는 상황에서 피난갈 수 없는 상황이 룻기의 배경과 상당히 닮은 꼴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들을 위로하는 행위 자체가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받으시고, 그들을 예수의 가문으로 인도하는데에 꼭 필요한 시간이라는 것을 알려주셨다.
여러 선교사님이 섬기고 있는 다민족 유학생교회에 방문, 룻기 본문을 통해 말씀기도회를 진행했다. 특별히 난민과 같이 느껴지는 본문이 많이 와닿았다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룻1:16-17)
이렇게 룻기를 나누다가 하나 재밌는 사실을 발견했다. 룻이 참 훌륭한 며느리이고 우리가 닮아가야 할 신앙의 선배이지만, 고부간의 갈등은 전세계 모두가 풀기 힘든 숙제라고 외국인들도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룻1:4-5)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룻1:22)
나오미와 룻을 위해 보리 추수할 시즌의 먹을 것과 귀한 만남을 예비하신 것처럼 난민들을 위해 우리들을 위해 살 수 있도록 많은 것들을 세세하게 예비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한다. <계속>[복음기도신문]
최서우 선교사 | 영상사역단체 보게끔 미니스트리의 대표. 공중파와 기독교방송국 PD로 활동했으며, 현재 세계인터넷선교협의회(SWIM) 소속 미디어 선교사로 다양한 영상교육 및 온라인사역을 맡고 있다. 2015년 시리아 난민 동행 취재에 이어 최근 우크라이나 난민 사역을 영상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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