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의 교회는 박해 속에서 성장하고 있다. 특히 토착교회들의 열정은 매우 고무적이었다. ‘부흥의 현장 스리랑카를 가다’ 기획취재를 통해 만나 본 스리랑카 현지 목회자들은 한결같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난 확실한 간증이 있었다. 그리고 핍박과 고난에 대한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평온했다. 그리고 복음 전도에 힘을 쏟고 있었다. 지금은 스리랑카의 추수의 계절이다. 따라서 추수의 주인 되신 주님께 더욱 간절한 기도를 올릴 때이다.
십자가 걸린 교회는 보기 어렵다
불교 국가 스리랑카의 교회 건물 외벽에는 대부분 십자가나 교회명패를 찾아보기 어렵다. 때문에 얼핏 보기에는 교회 건물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멀리서 십자가를 보고 가까이 가보면 식민지시대에 건립된 역사가 오래된 카톨릭교회가 대부분이었다. 이같은 스리랑카 교회의 상황을 한 목회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오늘날 스리랑카의 기독교는 역동적인 동시에 연약하며 핍박을 받고 있다. 불교 민족주의는 복음전도를 식민주의로, 기독교로의 개종을 국가에 대한 반역이라 낙인찍고 있다. 그러나 헌신적인 지도자들과 초교파적인 연합은 스리랑카 교회의 앞길을 개척하고 있다.” 호주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스리랑카 출신의 카말 위라쿤 목사가 지난 3월 로잔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 밝힌 스리랑카 교회의 현실이다.
오랜 세월 동안 식민지 경험을 통해 서구사회, 특히 그들로부터 전달된 기독교문화에 대해서는 소위 ‘쓴 뿌리’를 갖고 있다.
캔디에서 만난 한 선교사는 “남부지방의 고산지역에 있는 아름다운 차밭이 현지인들이 도구도 거의 없이 맨손으로 개간됐다고 들었다.”며 “지금도 차밭에서 일하는 현지 여성들의 하루 수입은 2000원 정도로 열악한 상태인데, 이같은 구조적인 문제의 뿌리가 기독교문화에 바탕을 둔 서구문화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결국 색안경을 쓰고 기독교를 보게 된 오해를 불식시키며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지금 이 시대를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의 몫으로 남아 있다.
27년간 싱할라와 타밀족의 내전, 100만 난민 낳아
어느 나라나 그렇듯 스리랑카 역시 역사적, 민족적, 문화적으로 매우 복잡한 환경에 둘러싸여 있다. 인구는 크게 싱할라족(약 75%)과 타밀족(약 15%)으로 양분되는데, 대부분 싱할라족은 불교도, 타밀족은 힌두교도이다.
식민시대를 거치면서 조금 표면화된 두 민족 간의 갈등은 1948년 독립 이후 권력이 싱할라족에게 편중되면서 고조되기 시작했다. 결국 1983년 내전이 발발해
2009년 타밀반군의 패배로 끝나기까지 27년간 10만 여명이 사망하고, 100만명에 가까운 난민이 발생하는 비극을 낳았다.
따라서 싱할라족이 중심이 된 스리랑카의 불교는 강한 민족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내전을 거치면서 거칠고 전투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카말 목사는 “싱할라 불교도들은 국가적, 인종적, 그리고 종교적 정체성으로 함께 결부되어 있다. 진짜 스리랑카인이 되는 것은 싱할라 불교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종교를 바꾸도록 제 안하는 것은 불교와 싱할라족과 국가에 대한 삼중 배반행위가 되는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따라서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가진 복음주의 교회들은 가장 주요한 공격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최근 몇 년 간 교회 수백 여 곳이 파괴되거나 훼손되었고, 순교자들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로 불교계는 기독교, 힌두교도 등 타종교인에 대해 사실을 과장되고 부풀리거나, 사실과는 상반된 증거를 들이대며 공격하는 사례도 빈발하고 있다는 것이 익명을 요구하는 현지 관계자들의 시각이다.
본지 취재팀이 도착한 무렵, 발생한 불교도와 무슬림의 충돌(이 충돌로 무슬림이 3명 사망하고 80여명이 부상을 입고, 무슬림 상점과 시설은 상당한 재산상의 손실을 입었다)은 사실상 불교도들의 일방적인 공격이라는 것이 현지에서 만난 한 관계자의 시각이다. 그는 “소수인 무슬림이 이곳에서 먼저 불교도의 심기를 건드려 충돌하기 어려운 구조”라고 말했다.
식민지배와 함께한 기독교의 숙제
스리랑카의 기독교는 식민지배 역사와 함께 시작됐다. 1505년 포르투갈이 스리랑카를 식민지화 하면서 천주교를, 1600년대 중반에는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을 몰아내고 네덜란드 개혁교회를 들여왔다. 그리고 1802년에는 영국이 성공회, 감리교, 침례교 및 구세군 교회들을 들여왔다.
따라서 스리랑카의 기독교는 450년간이라는 기나 긴 시간 동안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많은 아픔과 상처를 안겨주었던 ‘식민통치’와 역사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그리고 식민통치와 함께 스리랑카로 들어왔던 기독교는 1722년 인구의 21%에 달했지만, 독립 이후 급속하게 쇠퇴했다.
식민시대를 통해 들어온 주류교단들은 20세기 초기와 중기 사이에 자유주의 신학에 의해 복음의 활기를 빼앗겼다. 또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자이며 주님이라고 선포하지 않는 명목주의로 전락한 기독교는 스리랑카 문화를 변화시킬 능력을 상실했다.
급증하는 스리랑카의 복음주의자
반면 스리랑카의 신생교회들은 20세기 중후반부터 역동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2010년판 세계기도정보에 따르면 1960년에 인구의 0.2%이던 복음주의자는 2010년에 1.2%로 무려 13배가 증가했다.
카말 목사는 “20세기 후반 국제복음화운동이 스리랑카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주로 교단에 속하지 않거나 신생 교단의 독립적 복음전도의 증가로 인해 일어났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교회들의 움직임에는 많은 위험요소가 포함되어있다. 전통적인 교단 구조나 책임감, 신학과 교리의 부재는 때때로 부실운영, 개인숭배, 거짓가르침 등에 취약하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카말 목사는 “지금 스리랑카 교회가 따라야 할 본보기는 신약 성경에 나오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이다. 우리 스리랑카인의 국가 정체성 위에 온전히 살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타협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스리랑카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변 문화에 순응하라는 압박에 담대히 맞서서 하나님 나라와 그 분의 공의를 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GNP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