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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이제 아버지를 용서해 드리십시오

사진: LOGAN WEAVER on Unsplash

 기독교에서 용서는 원한을 누그러뜨리는 감정 이상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용서는 희생을 수반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최고의 사랑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신다 

부모와 긴장 관계에 있거나 아예 그 관계가 끊어진 경우, 부모의 죄와 결점을 당신은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가(심지어 돌아가신 경우라 해도)? 그 모든 문제를 은혜의 렌즈를 통해 보는 법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나는 상담 전문가는 아니지만, 나와 아버지(1984년에 돌아가셨다) 사이를 진술하자면 이렇다. 우리 둘 사이는 경색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이해와 자비와 용서를 향한 느린 여정을 걸어 왔다. 내 이야기의 일부를 공유함으로 앞의 두 질문에 답하려고 한다. 내 이야기는 다들 그렇듯이, 나만의 이야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이끄신 길을 바라보면, 아마도 당신 앞에 놓인 길도 명확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용서할 것인가?

용서에 관한 질문부터 시작하자. 우리가 나쁜 경험에서 얻은 유익을 볼 수 있을 때 용서는 더 쉬워진다. 아버지가 나를 학대한 방식은 신문에서나 읽는 끔찍한 방식은 아니었기에 (물론 신문보다 더 심한 학대를 받은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나는 아버지의 결점을 통해 실제로 세 가지 면에서 내 삶이 더 쉬운 길로 들어섰음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쉽게 나는 성공했다는 느낌을 받았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쉽게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었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쉽게, 물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지만, 나는 그리스도를 고백할 수 있었다.

나쁨에서 시작해 선함으로

아버지를 끊임없이 헐뜯으며 아버지를 게으른 패배자라고 욕을 해댄 어머니를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을 보면서 성공했다고 느끼기가 더 쉬웠다. 어머니의 그 비난은 정당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40년 동안 꾸준히 일했고, 술에 취하지도 않았고, 어머니를 때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하버드를 졸업했지만 상대적으로 성취도가 낮은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존경조차 받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았다.

엊그제, 반세기 전에 극장에서 보았던 영화 ‘러브 스토리’를 스트리밍으로 다시 보았다. 하버드 대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성공한 대학생 운동선수는 그의 아버지와 극도로 팽팽한 긴장 관계에 있다. 그의 아버지는 물려받은 재산이 많은 엘리트 변호사인데다가 1928년 올림픽에 출전하기도 했다. 자기 아버지를 ‘선생님’(Sir)이라고 부르는 이 아들은 도무지 아버지의 높은 기대에 부응할 수 없을 것 같아 괴로워한다. 이 아들과 비교할 때 나는 조금만 성공해도 아주 만족했으니, 결코 나쁜 게 아니다.

아버지가 집을 비운 건 아니지만, 나와는 거리감이 있었다. 그 때문에 여러 가지 고통을 받았지만, 동시에 아버지의 생각을 별로 신경 쓰지 않게 되면서 나는 나름 쉽게 독립심을 갖게 되었다. 열네 살 때 나는 아버지의 반대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유대교를 떠났다. 나중에 아버지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사실과 조만간 비유대인 여자와 결혼할 거라고 말씀드릴 때도 아버지가 반대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다.

물론 아버지가 반대했더라도 내게는 수전과 결혼했을 배짱과 판단력이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평소 좋은 부자 관계를 가진 유대인도 결혼 문제 때문에 관계가 망가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싶어 하지만 여전히 망설이고 있고 또 유대인 부모를 화나게 하지 않기 위해서 기독교 신앙을 비밀로 유지하기도 한다. 사실 예수님은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유대인임을 밝히셨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감추는 것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 아무튼, 적어도 내게는 그런 문제가 없었다.

보이지 않는 희생

물론 기독교에서 용서는 원한을 누그러뜨리는 감정 이상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용서는 희생을 수반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최고의 사랑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신다. 러브 스토리는 “사랑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거야”라는 유명한 대사를 남겼지만, 나로서는 내 자존심을 희생하고, 아버지가 나에게 해주신 모든 것에 대해 내가 한 번도 고맙다고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미안하다고 말씀드릴 때 비로소 나는 아버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내게 생명을 주신 것으로 시작한 아버지의 선물은 나를 위한 지속적인 물질적 공급으로 이어졌다. 나는 빚을 거의 지지 않고 비싼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서른이 될 때까지 자가용이 없었지만, 나는 일찍부터 운전을 했고 자동차 유지비도 내가 내지 않았다. 아버지는 대공황 시기에 가난하게 자랐지만, 아버지 덕에 우리 가족은 집 때문에 고생한 적이 없었다. 우리는 배고픈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 아버지가 준 무형의 유산이 더 크게 느껴진다. 아버지의 삶에 대한 나의 연구를 토대로 할 때, 아버지는 십대 시절에 커다란 반유대주의에 직면했음을 나는 80퍼센트 확신한다. 아버지는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전쟁 생존자와 난민을 위한 번역가이자 봉사자로 일했던 아버지가 2차 세계대전 직후에 강제 수용소를 목격했을 것이라고, 나는 90퍼센트 확신한다. 물론 거기에 관해서도 아버지는 이야기한 적이 없다.

만약에 아버지가 나치 독일(Third Reich)의 폐허를 청소하는 중에 분명히 보았을 섬뜩한 장면들을 한창 자라던 내 머릿속에 집어넣었다면 어땠을까? 내 증조부모 중 누군가가 나치 군인과 나치 협력자가 쏜 총알을 머리에 맞았을 것이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올해 초에 출간한 ‘아버지를 위한 애도’(Lament for a Father)에서 썼듯이, 나는 반유대주의를 의식하지 않고 자랐다. 반유대주의가 분명히 있었지만, 나는 느끼지 못했다. 만약에 아버지가 반유대주의, 그러니까 이 세상이 나를 반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나의 뇌리에 새겨 두었다면?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의 십 년 동안 나는 심각하게 방황했지만, 그럼에도 홀로코스트라는 공포가 주는 악몽으로 손상되지 않은 전반적인 낙관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어른이 된 나는 아버지에게서 과거에 대한 정보를 좀 더 얻으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버지의 침묵 속에 담긴 깊은 뜻을 이제는 알 수 있다.

사건 현장에서 본 것을 아내에게 말하지 않는 살인 탐정처럼, 아버지는 어머니에게도 세세한 부분을 아껴 두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TV 쇼 ‘법과 질서’(law-and-order)가 자주 알려주듯, 비관주의라는 바이러스가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스스로를 심리적으로 고립시키는 사람에게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아버지는 기독교에 적대적이었다. 더불어 다른 사람을 위한 최고의 희생이라는 기독교의 중심 주제에 대해서도 적대적이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희생을 치렀고, 그 점에 대해 나는 뒤늦게나마 감사를 드린다.

어떻게 은혜를 베풀 것인가

두 번째 질문에 답할 차례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은혜의 렌즈를 통해 상대를 볼 수 있을까? 우리가 만약에 세속적인 방식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라고 말한다면, 그건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해 주세요”라는 의미이다. 아버지는 하버드에서 인정하는 신학으로 자신의 신학을 바꾸기까지 했지만, 결국 하버드라는 사회에 어울리지 못했기 때문에 하버드 대학원에서 퇴학당해야 했다. 그 일이 아버지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 되었을지 지금은 상상할 수 있다. 또한 독일에서 유대인 시체가 통나무처럼 쌓여있는 것을 보는 것이 어땠을지 상상할 수 있다. 아내와 아들들로부터 전혀 존경받지 못하는 모욕감이 어떤 것이었을지도 상상할 수 있다. 이것만으로 이미 스트라이크가 셋이니, 아버지가 삼진 아웃을 당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해한다는 것은 평행선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 미국으로 건너와 다시는 자기 아버지를 보지 못한 내 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를 크게 실망시켰을 것이다. 아버지는 정통 유대교를 떠나 유대교 재건주의를 받아들였다. 그건 오늘날 마치 근본주의자가 성공회 신자가 되는 것과 비슷한데, 그렇게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실망시켰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었고, 그렇게 아버지를 실망시켰다. 과거에 대한 연구를 통해 나는 내가 가족 전통주의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정신과 의사 에이브러햄 트워스키(Abraham Twerski)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에게는 네 가지가 필요하다. 공기, 음식, 음료, 그리고 비난할 누구”(Prager, The Rational Bible: Genesis, 53에서 인용). 부재했던 아버지에게 화를 내는 사람들은 아버지를 자신과 똑같은 복잡한 인간이 아니라 단순한 막대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사람은 아버지의 삶을 연구함으로 자기 자신을 회복시킬 수 있다.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경우라면 상호 비난을 없애고 좋은 관계를 위한 기회를 만들 수 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경우라면 아버지에 관한 더 많은 이해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 그리고 우리 자신을 위해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신다. 이것은 상이 함께 제시되는 유일한 계명이다. 부모를 공경하라. 그러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엡 6:2도 보라).

다시 말하지만, 나는 쉬웠다. 내 아버지는 악마적이지도 않았고, 단지 멀리 있었을 뿐이었다. 어느 쪽이든, 우리는 우리 모두가 다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부족한 방식도 다르고 그 정도도 다르지만, 부족하다는 점에서 예외는 없다. 아버지는 종종 자신의 아버지보다 자녀에게 더 나은 아버지가 되고 싶어 하고, 또한 자신이 받은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자녀에게 주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정작 자녀들은 아버지가 주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을 원하기도 한다. 재결합의 길은 우리 모두가 다 죄인이며, 정죄 받지 않으려면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을 얻는 데에서 시작한다(눅 6:37).

쇠사슬 끊기

그래서 나는 확실히 아버지의 죄를 용서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도 내 죄를 용서해 주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나에게 안경을 주셨기 때문에, 그리고 무한한 자비로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나는 이제 은혜의 렌즈로 아버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게 아니면, 우리는 자연적인 비참함 속에서 자신의 원죄를 전가할 뿐이다. 언뜻 보기에 쇠사슬은 세대를 이어 준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그 쇠사슬은 쉽게 끊어질 수 있게 된다.

기적적인 변화를 본 사람들은 사도 바울처럼 고백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4-25).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의 죄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놀라운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나 자신이 훨씬 더 못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을 받는 게 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는 상처를 입은 아버지를 사랑한다. 어머니 또한 아버지처럼 상처 입은 사람이고, 그건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치유하지 못하실 만큼 깊은 상처는 이 세상에 없다. [복음기도신문]

 나는 상처를 입은 아버지를 사랑한다. 어머니 또한 아버지처럼 상처 입은 사람이고, 그건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치유하지 못하실 만큼 깊은 상처는 이 세상에 없다 

마빈 올래스키(Marvin Olask) | 마빈 올래스키는 ‘World’의 편집장이며, 지은 책으로는 ‘공감하는 보수주의(Compassionate Conservatism)’와 ‘저널리즘 개혁하기(Reforming Journalism)’가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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