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그냥 어울리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 아주 어울리지 않는다. 그들의 노래와 그들의 형편이 도저히 연결이 되지 않는다. ‘티써래’에서 쫓겨나온 교인들의 찬양 내용이 그들의 형편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찬양의 내용은 세계 선교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전쟁의 위험을 피해 쫓겨난 공동체이다.
1월 30일 주일 예배는 태국 국경에 있는 연약한 공동체에서 드렸다. 격려와 위로를 하기 위해서이다. 미얀마의 ‘티써래’라는 지역에서 온 작은 공동체이다. 며칠 전에 그들은 그 마을에서 이곳으로 피신하였다. 그 지역에서 전투가 조만 간에 시작될 것이라고 한다. 그들이 살던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전투가 산발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전투가 발생하면 아이들은 피신하기 어렵다. 그곳에 있었던 기숙사 아이들은 미얀마군과 카렌군의 충돌 조짐으로 이미 집으로 돌아갔다. 이 가운데 부모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40명 정도 있다. 고아와 같은 이들은 갈 곳이 없었다. 일단 안전한 태국으로 피신한 곳이다.
그들은 연약함으로 둘러샇인 무기력한 공동체이다. 그들은 태국 시민권도 없다. 태국 거주증도 없다. 그 지역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농사를 짓는 외진 밭에 임시 거주지를 만들어 지낸다. 나무 잎으로 얽기 설기 만든 지붕은 불안하다. 1월의 밤은 열대지방이지만 한기를 느낀다. 문이 없는 숙소는 밤 찬바람을 막을 수가 없다. 수도도 전기도 없다. 누가 보아도 동정이 갈 수밖에 없는 주변인들이었다.
그런데 예배 시간에 특송 가사가 믿을 수가 없었다. 온 세상에 나가서 선교하자는 내용이었다. 후렴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모든 세상으로 가서 그들에게 예수의 구원의 길과 영생의 도를 나누세. 주님의 일을 위한 삶을 주님께 드리세.”
찬양은 그들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선교 소망을 표현하였다. 이들의 상황을 담은 가사가 있다. 3절의 내용이 이들의 형편을 잘 표현했다.
“가끔은 우리 가운데 환난과 시험이 다가오지만 하나님께 너를 드리면 하나님은 너와 함께 영원히 함께 하시네”
이들의 어려운 상황도 표현하지만 그 어려움을 넘어선 고백을 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 자신도 돌보지 못하는데 어떻게 세계 선교를 하겠다는 것인가? 이 찬양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부르는가 궁금하였다. 그래서 예배 후에 목회자에게 질문을 하였다.
“찬양을 들으니 세계 선교를 한다는데 어떻게 한다는 의미인가요?”
이 질문에 대한 담임목회자 ‘무무애’의 답이 뇌리에 박힌다.
“함께 온 21명의 사역자들은 하루 이상 걸리는 먼 곳에서 이곳에 왔습니다. 집에 대한 그리움이 있지만 이곳에 있는 다양한 민족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미 그들은 세계 선교에 대한 이해를 그들 방식으로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그들의 사역을 설명한다. ‘티써래’의 학교에는 4개 민족의 자녀들이 다니고 있다. 카렌(스고) 학생들이 많지만 ‘버마족’, ‘몽족’ 과 ‘카렌(포)’가 있다. 그들은 기숙사에서도 같이 지내는데, 영적으로 깊이 있는 돌봄을 받고 있다.
“우리 학교 학생 300여명 가운데 기독교인들은 20명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학생들이 복음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21명의 교사들이 복음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전투의 위협과 생존을 위한 힘겨운 삶의 여정 가운데에서도 세계 선교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명을 다시 한번 찬양으로 고백하고 있다.
성경에 이와 비슷한 사람들이 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이다. 그들도 쫓겨난 자들이었다. 그들은 AD 52년 글라우디오 황제의 명으로 로마에 살다가 추방됐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고린도였다. 쫓겨난 한 가지 이유만으로 사회적, 경제적, 심리적 어려움이 동시에 찾아온다. 객관적인 형편으로 그들을 넘어선 선교를 할 형편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이 쫓겨났기 때문에 바울을 만난다. 그리고 그의 집에서 교회가 시작된다. 이방인 선교의 큰 획을 그은 사건이다. 이후 에베소와 다시 로마까지 선교는 확장된다.
쫓겨난 자들은 억울하다. 설움도 많다. 기독교 선교의 신비는 그것 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랬듯이 ‘티써래’ 교회의 사역자들도 동일한 길을 걷고 있다. 이들의 상황이 너무 급박하여 긴급구호를 위한 기금을 지난주에 보내주었다. 그 사용 내용을 듣던 내가 숙연해진다.
“보내주신 헌금 가운데 일부는 우리보다 더 어려운 이웃들 90가정을 위하여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전쟁으로 3받(100원)도 아쉬운 분들인데 각 가정에게 200받씩 전달했습니다.”
이들도 현재 형편과 미래를 생각하면 절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그들의 경계를 넘어 믿지 않은 이웃들을 섬기고 있다. 선교적 삶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들의 삶을 보고 이야기를 들으니 내 자신이 부끄럽다. 이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서 왔지만 오히려 더 큰 도전을 받는다. 이런 관점으로 보니 이들이야말로 세계 선교 소망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공동체이다. 여유가 있고 잘 준비되어 있는 선교도 필요하고 소중하다. 그렇지만 전쟁의 위협과 가난 속에서 실천되는 섬김이 선교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이 하심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쫓겨난 공동체의 세계 선교를 향한 소망과 실천은 복음의 의미를 더 풍성하게 해준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발견되는 신비이다. 그 신비한 성령의 선교 역사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그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배움의 특권이다. [복음기도신문]
오영철 선교사 | 1995년 GMS 선교사로 태국에 파송된 뒤, 현지 신학교에서 학생과 목회자를위한 교수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이곳에서 소수부족인 카렌족교회가 주민족인 타이족을 위한 선교적 교회를 세우는데 관심을 갖고 이들을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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