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을 둘러싼 논란의 진실(7)-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 당시 홀로 서울 탈출했나?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기습적으로 공격하자 한국정부가 서울에서 무질서하게 퇴각한 것은 사실이다. 정부 각료와 국회의원 들은 개별적으로 서울을 탈출했다. 탈출하지 못하고 북한군에 억류, 납치된 국회의원도 20~30명이나 됐다. 기습공격에 대비한 비상계획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당시 신문은 북한군이 기습적으로 공격해 왔으나 국군에 의해 격퇴되고 있으며, 국군은 황해도의 옹진반도까지 진격하고 있다는 등의 오보를 내고 있었다. 국방부가 전황을 엉터리로 발표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발발한 이후 48시간 동안 서울에 머문 대통령이 그 사이 어떤 일을 했는지는 시간대별로 자세하게 살필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정부와 유엔과 동경의 연합군사령부에 군사 원조를 요청하는 등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빼놓지 않고 정확히 수행했다. 각료 회의를 소집했으며 국회는 서울을 사수하는 결의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을 위시한 정부 요인들은 전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다. 대통령이 참모들의 피난 권유를 물리치면서 27일 새벽까지 경무대에 머문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렇게 고집을 부리자 보좌진에 의해 북한군의 선발대가 이미 서울에 진입했다는 허위 보고가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대통령 일행은 황급하게 서울을 떠나게 됐다. 그리고 24 시간 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다. 따지고 보면 대통령의 피난은 매우 위험하게도 너무 늦은 시간에 이루어졌다. 이 모든 혼란 상황은 우선 전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보고하는 국방체계가 허술한 가운데 비상시에 정부와 시민의 피난을 안전하게 유도하는 비상계획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달 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다시 서울에서 퇴각해야 하는 이른바 1·4 후퇴 때는 상황이 달랐다. 미리 세워진 비상계획에 따라 정부는 시민과 더불어 질서정연하게 퇴각했다. 이같이 건국 초창기의 비상계획과 훈련의 결여로 발생한 것을 대통령이 혼자 살려고 줄행랑쳤다는 비난은 국가를 전근대적인 도덕적 질서로 감각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대변할 뿐이다. 전 근대적 국가 관념은 백성들이 당하는 각종 재난의 책임을 군왕에게 묻는다. 실제 1950년 당시 신익희 국회의장을 비롯한 정부 요인들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쟁의 책임이 본인에게 있음을 시인하는, 곧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전근대의 군왕들이 했던 죄기론(罪己論)과 유사한 성명을 발표하도록 권유한 바가 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내가 무슨 당나라의 현종이라도 되느냐?”라며 이를 단호하게 거부한 적이 있다. 전쟁의 책임은 명확하게 전쟁을 유발한 김일성을 위시한 북한의 공산세력에 묻고 따져야 한다.<자료제공: 월드뷰>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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