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공산당의 불법 남침으로 야기된 6·25 전쟁이 일어난 지 꼭 74주년이 되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요즘 학생들 대부분은 ‘한국이 북침을 했다’고 믿고 있다. 전교조의 활동으로 교과서도 그리 만들고, 교실에서도 그렇게 가르친다고 들었다. 북의 선전 선동을 자유대한민국에서 그대로 받아쓰고, 공산당의 선전을 마치 교리처럼 생각하고, 젊은이들에게 주입하려고 안달하고 있다. 그래서 요즘에 반공을 말하면 영락없이 수구 꼴통보수로 몰리고 꼰대로 취급받기 일쑤이다.
반면에 평화를 말하고 이념과 사상을 초월해서 우리 민족끼리를 부르짖는 사람들을 통 큰 지도자로, 열린 지도자로, 열린 지성인으로 대우받는다. 그들은 6·25 때 공산당이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점령하지 못해서 공산 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하여 못내 아쉽게 생각하고 있다. 하기는 북쪽은 6·25 전쟁 후에 끊임없이 붉은 사상교육을 다그쳐 왔지만, 한국은 자유 방임에 빠져서, 지금 서울에 인공기가 걸려도 잡아가는 기관이 없다. 이는 결국 세작들의 집요한 공작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언론, 예술까지 모두 장악했기 때문이다.
6·25는 김일성이 대한민국을 적화하기 위해서, 주일 새벽, 휴일에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군인들은 모두가 주말 휴가를 얻어 간 사이를 이용해서,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3·8선을 넘어 쳐들어 왔다. 자유대한민국을 세운 지 꼭 2년 만이었다. 국방도 허술했고, 나라도 정돈되지 않은 틈을 타서 한국을 공산화하기 위해서 벌인 천인공노할 북한 공산당의 작품이었다. 우리나라는 자다가 쇠망치로 얻어맞은 꼴이었다. 북한 공산당은 잘 훈련된 인민군과 탱크, 비행기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왔고, 수많은 피난민 행렬은 남으로 남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때 나도 그 피난민 중의 하나였다. 내가 초등학교 학생이었으니 꼭 10살이었다. 부모와 형제들을 따라 내게 맞는 짐을 지고, 포항의 송도로 피난 가서 가족들과 합심해서 방공호를 팠다. 밤이 되자 피아간 총알의 불꽃이 장관이었고, 폭격기가 쉼 없이 퍼부었다. 한 밤인데도 비행기의 폭격으로 인해 대낮처럼 밝았다. 머리 위로 박격포가 터졌고, 그 파편들로 인해 금방 사람들이 쓰러지고, 피를 흘리며 넘어지는 것을 눈으로 늘 보았다. 전쟁은 참으로 비극이고 비참했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었고, 영산강으로 피난민들이 한꺼번에 보트를 타고 가다 전복되어 죽은 사람들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내가 다니던 포항남부초등학교는 불탔고, 우리 집도 잿더미가 되었다. 인민군들이 포항을 점령하자 우리는 그렇게 정처 없이 남으로 남으로 피난대열에 끼여 남의 집 헛간에 자기도 하고, 간간이 군인들이 먹는 주먹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나는 본래 병약해서 피난 중에 전염병인 이질과 호열자(콜레라) 등을 앓았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았고, 울산 방어진까지 가는 동안 우리 가족은 미군 부대에서 나온 성냥을 칼로 두 쪽으로 나누어 팔면서 겨우 연명을 해왔다. 3개월 후에 울산 방어진에서 포항으로 다시 돌아오니 포항제일교회만 온전히 보전되어 있고, 나머지는 말 그대로 도시는 초토화, 쑥대밭이 되어있었고, 폭격으로 인해 거대한 웅덩이가 여기저기에 있었다. 집은 폭격으로 없어지고, 거리에는 시체들이 치워지지 않고 널려 있었다.
6·25 전쟁에서 공산군을 막아낸 것은 바로 그 유명한 「다부동 전투」에서였다. 공산군 곧 인민군은 숫자나 화력 면에서 우세했기에, 아군이 다부동 전투에서 밀려나면 대구가 무너지고, 대구가 무너지면 김해평야를 거쳐 임시수도 부산이 점령될 위기였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김일성의 꿈이 이루어져 공산주의 나라가 될 뻔했다. 그때 우리 군과 유엔군은 결사 항전으로 피의 계곡을 이루면서까지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다부동 전투는 피아간에 시체의 산을 이루었고, 피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1950년 8월 13일~30일간의 다부동 전투를 승리를 이끈 부대는 사단장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1사단이었다. 세계전사에 보기 드문 전쟁으로, 10여 차례 고지를 뺏고, 뺏기는 전투였다.
그 후 유엔군이 합세했고,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백선엽 장군은 일본에 있던 맥아더 장군의 지원을 받아 적군 지역에 융단 폭격을 해서 인민군을 무력화시켰고, 대구를 지키고, 그 후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바꾸어, 인민군을 3·8선 이북으로 몰아냈다. 그리고 서울을 수복하고, 평양을 탈환했고, 계속 북진하여 압록강까지 가서 통일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 국군은 중국 공산당의 인해전술로 꿈에 그리던 남북통일을 놓쳤다. 중국 공산당은 지난 70년간 우리에게 단 한 번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우리의 주 적이다. 그자들은 지금도 한국에 또 다른 인해전술로 모여들어, 정치와 경제와 언론에 간여하고, 여론 몰이를 하고 선거에 개입하는 등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아직도 6·25, 74주년을 맞이하면서 말끝마다 이승만을 물고 늘어지고, 미국과 유엔군을 문제 삼는 사람들이 지금도 정권의 실세이자 평화통일의 견인차라고 한다. 나는 지금, 74년 전에 6·25 전쟁 당시, 이 땅에 유엔군으로 와서 참전했던 미국 군목 사이몬(Simon)이 차고 있던 그 십자가를 양복 왼쪽에 패용하고 있다. 그리고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대구를 지켜낸, 미군과 유엔군과 한국군이 너무너무 고마워서 대구시민이 직접 만든 조그마한 기념품 손수건을 이번 달부터 가지고 다닌다. 결코 6·25을 잊지 말자는 뜻이다. 그 기념품 손수건에는, “Thank you UN Army, 1951 Taegu Korea”라는 글과 성조기와 유엔기와 태극기가 함께 그려져 있다.
아직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6·25가 일어난 지 74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복음기도신문]
정성구 박사 | 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40여년간 목회자, 설교자로 활동해왔으며, 최근 다양한 국내외 시사를 기독교 세계관으로 조명한 칼럼으로 시대를 깨우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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